사회과학분야의 박사가 된다는 것은 참 고된 일이다.
이 학문은 말 그대로 ‘사회’ 과학이다. 자연과학이 아닌만큼 절대적 진실이란 것은 없다. 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설명하고, 나름 독창적인 예측도 내놓아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은 항시 탈탈 털릴 수밖에 없으며, 결코 진리가 될 수도 없다. 몇 년만 지나도 구식 사고가 될지도 모른다.
글 한 편 쓰는 것 자체로도 기쁨을 느끼는 행복형 인간은 대학원 생활이 고되지 않을 수도 있다. 글쓰기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도 이 생활을 즐길 수 있다 (e.g. 칼럼계의 스타.. 김영민 교수님). 거미줄같은 일상을 팽팽한 직선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영리한 자라면 더더욱 박사과정을 추천한다.
하지만 뻔한 교육과정에 익숙한 내게 글이란 ‘잘 써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잘 써야만 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사회과학의 고전들을 읽다보면 더욱이 그렇다. 이 정도 써낼 능력 없으면 학문을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겠다는 두려움이 먼저 든다.
인공지능은 내게 몇몇 그럴듯한 아이디어와 용기를 주긴 하지만, 아무리 갈궈봐도 마스터피스를을 써주진 않는다. 애초에 주문을 넣는 내가 멍청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그렇다. 아무리 매주 내 무릎까지 오는 저술들을 읽고 책상 앞에 앉아도 영감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잘 쓰고 싶다’ → ‘역시 난 아는게 없다’ →’AI 의 도움을 받자’ → ‘ 얘나 나나 멍청하군’ → ‘망작’ 의 무한 굴레에 빠진다.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업이다 보니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주기적으로 성취를 하면서 성장하는 것을 느끼는 유형이다.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고, 평가를 받고, 성과물을 내는 삶을 찬미한다. 뭐… 지향점은 사실 학문과는 꽤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왜 아직도 이걸 생업으로 하고있냐고 묻는다면…그냥 이게 제일 재밌기 때문이다 (?).
나는 아주 먼 옛날부터 이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아주 많이) 즐기는 학생이었다. 아침에 종이신문 오는 배달부 아저씨 발소리만 기다렸다. 신문에 있는 칼럼 하나 하나 아까워서 필사했고, 그 필사본은 무릎만치 쌓여서 버려야 할 때마다 눈물을 왈칵 흘렸다. 성장기의 나는 아마도 나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속한 세상을 먼저 이해하고자 했던 듯 하다.
내게 세상사는 늘 동화같았다. 국가는 이 난리로 싸울까. 야심차게 시작한 어떤 제도는 왜 금방 사라질까. 하다못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나를 둘러싼 이 세계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경이로움이었다.
그래서 고등교육에 진입했을 때, 특히 N교수님의 교실에 처음 앉았을 때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의 시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한 이론의 렌즈로 보면 세상이 이렇게 보이고, 다른 이론의 렌즈를 끼우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세상사를 읽어내는 새로운 눈을 준 것이 바로 학문이었다.
뭐 다사다난한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 발로 박사과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한다는 건 특히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껴안는 일이다. 학문이 끝까지 나를 먹여 살려줄지, 내가 잡아 먹히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보통 사람이 배가고프면 꿈을 제일 먼저 판다고 하던데 ㅎ) 어쨌든 나는 돌고 돌아 좋아하는 이 길을 선택했고, 우선은 포기할 마음이 없다.
이 블로그는 그 선택 앞에서 나 자신과 약속한 하나의 작은 다짐이다. 누구나 화려한 성과를 보여주고 싶다. 당연히 그렇다. 한 번에 끝내주는 논문 한 편 투고해서 이름도 날리고 싶고. 그게 사람 심리다.
하지만 나는 대단히 멍청하다. 이것은 인정해야한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한 방을 노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며 부딪히고 헤매고 깨달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매우 부끄러운데, 사실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아서 괜찮다 (설레발 금지). 기록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나를 꽤 오래 버티게 해줄 것 같다. 그리고 그 끝내주는 한 편이 나오면 다 블로그 덕분으로 하련다.
앞으로도 이곳에는 잘 정리된 글보다는 미완의 생각, 시행착오의 기록, 때로는 사소한 깨달음들을 적어보려 한다. 부디 우리 교수님이 이 몸부림을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교수님, 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 아무리 허술한 초고를 들고 가더라도, 내 진심과 노력을 조금은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
어쨌든 이 블로그는 내 부끄러움의 기록이자 성장일기다. 망해도 컨텐츠, 잘 되면 성과.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