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국제 레짐 - 무정부 세계의 예외적 질서

Stein, Arthur A. “Coordination and Collaboration: Regimes in an Anarchic World.” International Organization 36(2), 1982.
Sep 10, 2025
국제 레짐 - 무정부 세계의 예외적 질서

1. 레짐(Regime)의 개념

레짐은 국가들이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포기하고, 일정한 규칙과 제약을 수용하며 행동을 조율하는 제도로 정의된다. 무정부적 국제체제 속에서도 국가들은 때때로 자율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선택을 한다. 중요한 점은, 레짐이 단순히 협력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협력은 이해관계가 자연스럽게 일치해 발생할 수 있지만, 레짐은 국가들이 의식적으로 행동을 제약하는 제도적 틀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예컨대, 단순한 물물교환이나 재난 구호 지원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황이므로 레짐이 필요하지 않지만, 군축 협정이나 무역 체제와 같이 규칙이 없으면 배신의 유인이 큰 상황에서는 레짐이 필요하다.국제기구와 레짐의 가장 큰 차이는 실체와 구조의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기구는 사무국, 회원국, 본부 건물 등 눈에 보이는 조직적 실체로서 존재하며, 단순히 국가들이 모여 토론하고 협력하는 장(場)을 제공할 뿐 반드시 회원국의 행동을 제약하지는 않는다. 반면 레짐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원칙, 규범, 규칙, 의사결정 절차의 집합으로, 국가들의 선택지를 좁히고 행동을 제약하며 기대를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국제기구는 레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레짐은 국제기구 없이도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명히 구분된다.

국제기구와 레짐의 가장 큰 차이는 실체와 구조의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기구는 사무국, 회원국, 본부 건물 등 눈에 보이는 조직적 실체로서 존재하며, 단순히 국가들이 모여 토론하고 협력하는 장(場)을 제공할 뿐 반드시 회원국의 행동을 제약하지는 않는다. 반면 레짐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원칙, 규범, 규칙, 의사결정 절차의 집합으로, 국가들의 선택지를 좁히고 행동을 제약하며 기대를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국제기구는 레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레짐은 국제기구 없이도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명히 구분된다

2. 레짐이 필요한 경우

(1) 공동이익의 딜레마 (Common Interests)

공동이익의 딜레마는 국가들이 협력하면 모두 이익을 얻지만, 독립적으로 행동하면 비효율적 균형(Pareto-deficient) 에 머무르는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가 죄수의 딜레마이다. 군비경쟁은 각국이 무장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 전략이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불리하다. SALT 협정 같은 군축 레짐은 이런 문제를 완화하려는 제도적 시도였다. 또한, 국제 커피협정처럼 시장 질서를 담합 형태로 관리한 사례나, 어업 남획 문제처럼 공유지의 비극을 다루는 제도 역시 공동이익의 딜레마에 대응한 레짐의 예이다. 이 경우 레짐은 규칙 준수를 감시하고 위반을 처벌하는 장치를 필요로 했다.

(2) 공동혐오의 딜레마 (Common Aversions)

공동혐오의 딜레마는 여러 균형이 가능하지만, 모두 피하고 싶은 최악의 결과가 명확히 존재하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복잡한 제도보다 간단한 규칙이나 관습만 있어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도로 주행 방향을 좌측으로 할지 우측으로 할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같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항공 교통 규칙에서 영어를 국제 공용어로 지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들은 모두 항공사고라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조정 규칙을 수용했다. 이런 경우 레짐은 자기 집행적(self-enforcing) 성격을 띠며, 복잡한 감시 장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3. 레짐의 형성 요인

.레짐은 궁극적으로 국가들의 선호(constellations of interests)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데 이 선호는 다시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 권력 분포: 패권적 권력은 다른 국가들의 선택지를 구조화했다. 2차대전 직후 미국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협력을 이끌어낸 사례는, 강대국이 약소국의 선호를 형성한 대표적인 예이다.
  • 기술: 무기체계의 성격이 선호를 좌우했다. 공격적 무기와 방어적 무기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안보 딜레마가 발생했지만, 만약 방어무기만 존재했다면 군축 레짐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 지식: 19세기까지 각국은 전염병 원인에 대한 합의가 없어 검역 규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콜레라와 황열병의 원인, 전염 경로, 백신이 발견되면서 국제위생회의와 WHO 같은 국제 보건 레짐이 형성될 수 있었다.
  • 국내 요인: 인구 규모, 산업 구조, 자원 수요 같은 국가 내부 특성도 선호를 형성했다. 예컨대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교역이나 해외 자원 확보를 위해 협력적 레짐을 필요로 했다.

4. 레짐 변화와 유지

레짐은 선호 구조가 바뀌면 변화하거나 해체되었다. 권력 분포가 달라지거나, 기술과 지식이 새롭게 발전하면서 국가들의 선호가 변하면 레짐도 바뀌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레짐은 종종 원래의 조건이 변해도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 국가들은 모든 사안을 매번 다시 계산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따르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둘째, 제도를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 비용은 매우 컸기 때문에 기존 레짐이 유지되었다. 셋째, 시간이 흐르면서 레짐은 전통과 정당성을 획득했고, 이탈은 평판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넷째, 오랜 협력 경험은 국가들이 자기이익 극대화에서 공동극대화(joint maximization)로 의사결정 기준을 바꾸도록 만들기도 했다. 실제로 군축 협정처럼 협력 레짐을 운영하면서 상대 지도자와 신뢰 관계를 쌓은 국가는, 단순히 자국 이익만이 아니라 상대국의 안정적 존속에도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5. 결론

국제 레짐 연구는 국제정치를 단순히 권력 구조나 국내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구조와 국내 요인이 국가의 선호를 형성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이 선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략적 상호작용이 결과를 결정한다.

국제정치는 무정부적(anarchic)이지만, 그것이 곧 혼란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가들은 합리적 자기이익 계산을 통해 때로는 독립적 결정을 포기하고, 공동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레짐을 형성했다. 따라서 레짐은 무정부적 질서 속에서도 가능한 예외적 질서로 기능했다. 이는 현실주의와도 모순되지 않았다. 국가의 자율성과 자기이익 추구가 오히려 레짐 형성의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

국제 레짐 이론은 1970~80년대 국제질서 변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먼저,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하고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 석유파동이 발생하면서 기존의 국제경제 질서는 불안정해졌다. 이런 환경에서 무역, 금융, 에너지 같은 분야에서 국가 간 협력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가 중요한 학문적 과제가 되었다.

또한, 2차대전 이후 절대적 우위를 점했던 미국의 패권은 1970년대 이후 점차 약화되었고, 국제체제는 다극화로 나아갔다. 그 결과 “패권이 있어야만 국제 레짐이 성립한다”는 전통적 패권 안정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실제로 패권이 없더라도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 레짐이 유지되거나 형성되는 사례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 분포 변화만으로는 레짐 형성과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었다.

이와 함께 1950~60년대에 이상주의적이라 비판받으며 쇠퇴했던 국제기구 연구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국제기구’라는 형식적 존재보다, 국가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기대를 조정하는 “레짐”이라는 개념이 더 적합한 분석 단위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학문적 흐름

레짐 이론은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발전한 신자유제도주의(Neoliberal Institutionalism)의 핵심 축이었다. 현실주의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국제정치가 무정부적이고 국가가 자율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이익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국가들이 독립적 의사결정을 포기하고 제도적 틀을 만드는 경우가 있음을 설명했다.

이론적으로는 게임이론적 접근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죄수의 딜레마는 공동이익의 딜레마를, 조정게임(coordination game)은 공동혐오의 딜레마를 설명하는 틀로 활용되었다. 이를 통해 왜 국가들이 레짐을 통해 배신의 유인을 줄이고, 또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규칙을 설정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레짐 연구는 상호의존 이론(Keohane & Nye) 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제관계가 점점 더 촘촘히 연결되고 상호의존이 심화될수록, 국가들은 상대방의 선택이 곧 자신의 이익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레짐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제약 장치로 인식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짐 이론은 패권 안정론과의 논쟁 속에서 발전했다. 기존의 논의가 “패권적 권력이 있어야만 개방적 국제경제 질서가 유지된다”고 보았다면, 레짐 이론은 권력 분포가 직접적으로 질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기술·지식 같은 구조적 요인이 국가들의 선호를 형성하고, 이 선호의 상호작용 속에서 레짐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즉, 권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메워 준 것이 레짐 이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학자들은 국가 중심의 ‘레짐’ 대신 비국가 행위자와 다층적 협력을 포괄하는 ‘글로벌 거버넌스’라는 개념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거버넌스보다 더 구체적이고 권력관계에 민감한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들면 Global Ordering / World Order 처럼, 단순 협력 메커니즘보다 국제질서의 권력구조와 규범을 중점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레짐”은 좁고, “거버넌스”는 넓지만 추상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에 최근 연구는 “거버넌스”라는 큰 틀을 전제로 하되, 분야별·문제별·권력구조별 분석으로 더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논문은 시대적으로는 국제 레짐 연구의 고전으로서 무정부 속 협력 가능성을 설명한 지적 전환점이었고, 이론적으로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를 잇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설명력이 제한적이며, 권력과 불평등, 규범과 정체성, 그리고 비국가 행위자의 중요성을 간과한 고전으로 남았다. 따라서 2025년의 우리는 레짐 이론을 독립된 설명 이론이라기보다는, 글로벌 거버넌스 연구로 이어지는 지적 사다리의 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