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새로운 ‘투키디데스 읽기’

박성우,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투키디데스 읽기의 한계와 대안의 모색,” <국제정치논총> 48집, 3호 (2008).
Sep 23, 2025
새로운 ‘투키디데스 읽기’

I. 서론

서론은 국제정치 이론가들에게 투키디데스가 오랫동안 현실주의의 대표적 권위로 자리 잡아 왔음을 지적한다. 특히 인간본성 이해를 토대로 구조적 속성을 강조하는 신현실주의자들이 그를 자신들의 이론적 선구자로 간주했으며, 이는 투키디데스의 전쟁 서술이 국제정치 현실과 밀접히 맞닿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키디데스 읽기는 그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단순화해 현실주의적 해석으로만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저자는 투키디데스를 단순히 현실주의의 옹호자로 보는 기존 관점을 넘어, 그의 역사서 속에서 국제정치적 교훈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II. 신현실주의의 “투키디데스 읽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원인론

신현실주의자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세력 균형의 변화 같은 구조적 요인에서 찾으며, 투키디데스를 자신들의 이론적 선구자로 해석한다. 특히 “아테네의 세력 확장과 스파르타의 두려움”이라는 진술을 국제체제 불균형의 설명으로 일반화하지만, 이는 전쟁 발발의 복합적 맥락을 단순화한 것이다. 실제 투키디데스는 다양한 사건과 정치적 갈등을 기록했음에도 구조적 현실주의적 독해는 이를 간과한다.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멜로스 대담에 주목해 권력 정치와 인간 본성의 냉혹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멜로스 대담은 특정한 맥락의 사례임에도 현실주의자들은 이를 보편 원리로 확대하며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한다. 그 결과 투키디데스가 보여주는 인간·제도·사건의 다층적 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 투키디데스를 단순한 현실주의의 정당화 근거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역사적 텍스트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로운 해석은 세력 구조뿐 아니라 국가 제도, 지도자의 선택, 사건의 연쇄가 얽혀 국제정치를 형성하는 과정을 함께 주목함으로써, 투키디데스를 현실주의에 한정되지 않는 성찰적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III. 고전적 현실주의의 “투키디데스 읽기”와 멜로스 대담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을 국제정치의 근본 요인으로 간주하며, 투키디데스를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가로 해석한다. 그들에게 인간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존재이자, 두려움으로 인해 끝없는 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전제는 국제관계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이해되며, 그 결과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투키디데스의 멜로스 대담을 인간 본성과 권력 추구의 본질을 드러낸 사례로 강조한다.

멜로스 대담에서 아테네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멜로스에게 복종을 강요하면서, 정의나 도덕보다는 현실적 생존과 권력의 논리가 국제정치를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멜로스인들이 도덕과 정의를 호소했으나, 아테네인들은 그것을 단순한 수사로 치부하고 “강자는 원하는 것을 하고 약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논리를 내세웠다.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이 장면을 국제정치에서 도덕을 배제하고 권력을 최우선시하는 원리의 상징으로 읽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해석이 멜로스 대담의 복합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고 비판한다.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은 멜로스 대담에서 아테네인들의 태도를 ‘합리적 선택’의 전형으로 본다. 아테네인들은 국제정치에서 도덕이나 정의가 아니라 힘의 우위가 곧 생존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며, 약자인 멜로스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한다. 이들의 논리는 국제정치에서 생존을 위해 강자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약자는 강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멜로스인들의 독립 유지 시도는 비현실적 이상주의로 규정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합리성’ 개념이 단순히 권력 극대화 논리로 축소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멜로스인들 또한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선택을 했으며, 이는 도덕적·정치적 차원에서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다. 즉, 합리성은 단순히 힘의 우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멜로스 대담의 교훈은 현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힘의 논리에 따르는 것만이 합리적이다”라는 주장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투키디데스의 서술은 권력과 도덕, 생존과 가치가 충돌하는 복합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기준과 맥락에서의 합리성이 어떻게 주장되고 또 실패하는지를 보여준다

IV. 국제정치이론에서 “투키디데스 읽기”의 자기반성과 한계

신현실주의와 고전적 현실주의의 해석은 오랫동안 투키디데스를 자신들의 이론적 선구자로 삼아왔지만, 국제정치학 내부에서도 그러한 해석이 가진 한계에 대한 비판이 이어져 왔다. 1980년대 냉전기에는 세력 균형과 구조적 요인을 중심으로 투키디데스를 읽는 방식이 지배적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국제정치 연구자들이 국가 제도, 개인 지도자의 역할, 국내 정치적 맥락, 도덕성 등 다양한 차원을 포함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투키디데스 읽기는 보다 넓은 맥락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특정 시대 상황에 매여 있거나 구조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미국의 일극체제 시기에는 아테네 제국의 성장과 쇠퇴 사이클에 관심 집중)

따라서 국제정치학자들의 투키디데스 읽기는 이론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결과적으로 투키디데스의 텍스트를 국제정치의 ‘보편적 교훈’으로 환원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국제정치 이론가들은 투키디데스의 전쟁 서술이 주는 교훈을 시대와 상황을 넘어선 불변의 원리로 제시하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텍스트의 복합성과 구체성을 축소시킨다. 결국 이 장은 “투키디데스 관점에서” 문맥을 통일성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V. 새로운 “투키디데스 읽기”를 찾아서

저자는 투키디데스가 단순히 전쟁 사실을 나열한 연대기가 아니라 특정한 의도를 가진 역사 저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의 작업을 ‘역사(historía)’라기보다 전쟁 경험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으로 본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사건의 기록을 넘어 정치적 교훈과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텍스트가 전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은 ‘푸시스(phusis, 자연)’와 ‘노모스(nomos, 법·규범)’의 관계다. 투키디데스는 푸시스를 단순히 자연적 힘이나 물리적 조건으로만 다루지 않고, 인간 본성과 사회적 관계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아테네 제국의 확장과 멜로스 대담에서 드러나는 논리는 권력 정치의 냉혹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간적 푸시스와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는 지점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특히 멜로스인들이 정의와 도덕을 호소했음에도 아테네인들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은, 국제정치에서 푸시스가 노모스를 압도할 수 있음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규범적 질서의 취약성과 한계 역시 부각시킨다.

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을 묘사하며, 인간이 상황에 따라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보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역병이나 내전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보존을 우선하며, 신이나 법에 대한 두려움조차 상실한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주장이라기보다, 특정 조건과 맥락 속에서 인간의 푸시스(physis, 본성)가 어떻게 왜곡되고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인들의 ‘강자의 논리’가 단순한 자연법칙의 진리라기보다는, 인간이 허브리스(hubris, 오만)에 빠질 때 나타나는 왜곡된 본성임을 지적하는 측면이 있다.

또한 투키디데스는 인간 행위의 언어적·사회적 차원에도 주목했다. 그는 로고스(logos, 말)와 에르곤(ergon, 행위)의 관계를 통해 전쟁 중 내외정치적 수사와 실제 행동이 서로를 어떻게 정당화하거나 왜곡하는지 보여준다. 아테네 제국의 경우, 로고스는 제국 시민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패권적 지위를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로고스는 현실의 힘 관계를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으며, 멜로스 대담에서처럼 권력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투키디데스는 대외정책과 관련된 연설(로고이)과 행동(에르가)의 관계가 제국의 흥망을 가르는 핵심이라고 보았다. 페리클레스 시기에는 공적인 말이 덕과 절제를 강조하면서 실제 정책과 행동이 이를 뒷받침해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현실 정당화의 로고이, 로고이를 통해 효율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에르가).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말은 설득과 공포의 언어로 바뀌었고, 행동도 점점 강압적이고 가혹하게 변했다. 즉, 말이 타락하면 행동도 왜곡되고, 그 결과가 다시 담론을 바꾸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분석틀로서 활동(kinesis)과 정체(hesuchia)의 변증법적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아테네는 끊임없는 활동과 팽창 덕분에 성장했지만, 지나친 원정과 확장은 재정과 내정을 지탱할 힘을 소진시켰다. 아테네는 말과 행동의 균형, 활동과 정체의 리듬을 잃어버리면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 투키디데스의 교훈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소환으로 인한 대실수(hamartia) 등).

VI. 결어: 투키디데스적 역사서술과 새로운 “투키디데스 읽기”

새로운 ‘투키디데스 읽기’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주제만을 투키디데스의 진정한 교훈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전쟁사의 근본적 교훈이 있다면 인간은 신과 동문의 중간에 위치함을 깨닫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자만하거나 또는 인간이기를 포기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여준 셈이다. 남은 과제는 이 교훈을 우리의 특수한 맥락에 활용하면서, 우리 현안 문제를 분석하고 처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