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1971년), 석유위기(1973년) 등으로 국제경제 질서가 불안정해지면서, “무정부(anarchy)” 상황에서도 협력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필요해짐.
- 현실주의는 “권력과 이익”만으로 협력을 설명했지만, 당시의 복잡한 경제적 상호의존(interdependence)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함
- 이에 따라 자유주의적 전통 + 제도(institutions)의 역할을 결합한 ‘신자유주의 제도주의(Neoliberal Institutionalism)’가 등장했고, 이 학문적 흐름 속에서 레짐 이론이 발전함
국제 레짐(Regime)의 개념은 스티븐 크래스너가 정의했듯이 “행위자들의 기대가 수렴하는 일련의 원칙, 규범, 규칙, 절차의 집합”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정의는 개념이 모호하고 요소 간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짐은 국제정치 분석에서 유용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학자들은 레짐의 형성·지속 요인과 국가 행동에 미치는 실제 효과에 주목해왔다. 이에 따라 국제 레짐을 설명하는 접근은 크게 세 가지 (현실주의(realism),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그리고 수정된 구조적 현실주의(modified structural realism)로 구분된다.
현실주의는 국가를 무정부적 국제체제 속에서 권력과 국익을 계산하는 합리적 행위자로 본다. 국가는 절대적 이익보다 상대적 이익(relative gains)을 중시하기 때문에 협력은 항상 제한적이며 권력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현실주의자들은 레짐을 권력의 부산물(epiphenomenon of power)로 간주한다. 즉, 강대국의 힘이 만들어낸 일시적 산물로, 권력 균형이 변하면 레짐도 함께 변한다. 결국 현실주의는 권력의 분포(distribution of power)를 국제정치의 핵심 설명 변수로 본다.겉보기에는 협상된 합의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강자의 영향력 아래에서 강요된 결과일 수 있으며, 규범이나 도덕적 기준은 국가의 자국이익 추구를 제약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현실주의는 레짐을 자율적 제도가 아닌 국제 권력 구조의 반영물로 본다.
제도주의(Institutionalism)는 현실주의와 달리, 무정부적 국제체제 속에서도 국가 간 협력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며 국제 사회(international society)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러한 협력은 단순히 전략적 계산이나 기능주의적 효용(utility)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유된 가치(shared values)와 신념(shared beliefs)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도널드 푸찰라(Donald Puchala)와 레이몬드 홉킨스(Raymond Hopkins)는 레짐이 “모든 국제관계 영역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강대국 경쟁처럼 전통적으로 무정부 상태로 인식된 영역에서도 국가 지도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원칙, 규범, 규칙에 의해 제약받는다고 인식한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현실주의가 권력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현대 국제체제를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단선적이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제도주의자들에게 레짐은 단지 일부 영역에 한정된 예외적 구조가 아니라, “행동의 일관성과 규칙성이 존재하는 모든 이슈 영역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상호의존적 세계에서 국가 엘리트들이 반복적으로 상호작용하게 되면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s)과 행동 패턴(regularized behavior)이 형성되고, 이러한 패턴이 지속될수록 점차 규범적 권위(normative force)를 얻게 된다. 그 결과 제도는 단순한 협력 장치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선택을 제약하는 사회적 규범체계로 작동한다. 오란 영(Oran Young)은 이를 “강대국의 공격조차 쉽게 흔들 수 없는 구조적 지속성(structural persistence)”으로 묘사하며, 제도는 한 번 형성되면 의도적으로 폐기하거나 수정하기 어려운 자기강화적 구조가 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수정된 구조적 현실주의(Modified Structural Realism) 는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로버트 코헤인(Robert Keohane)을 중심으로 제도주의의 경험적 통찰을 현실주의의 분석 틀 속에 통합하려는 절충적 접근이다. 이 이론은 국가를 여전히 이기적이고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행위자(rational, egoistic, utility-maximizing actor)로 보지만, 협력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본다. 즉, 비협력적 상태에서는 모든 국가가 손해를 보는 비효율적 균형(suboptimal outcomes)이 발생하기 때문에, 효용 극대화를 위해서는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일단 협력의 제도적 틀이 형성되면, 그것은 국가 간 행동 조정(coordination)을 가능케 하고, 그 기능적 유용성 덕분에 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제도가 형성될 때에는 특정 권력구조(예: 패권)가 작용할 수 있지만, 제도가 지속되는 논리(logic of persistence)는 그와 별개라는 점이다. 즉,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율적 힘(autonomous force)을 얻고, 오히려 권력의 구성(configuration of power)을 제약하기 시작한다. 크래스너(Stephen Krasner)가 지적했듯이, “레짐은 단순한 결과변수가 아니라 intervening variable로 기능할 수 있으며, 그들은 자신을 만든 원인으로부터 독립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이런 관점에서 제도주의자와 수정된 현실주의자들은 모두, 상호의존성이 높은 세계에서는 국가 간 협력이 불가피하며, 제로섬적 안보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슈영역에서 국제 레짐은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일단 형성되면 지속성과 자율성을 지닌다고 본다. 다만, 이 가설이 레짐 개념을 무한히 확장시키지 않기 위해, 학자들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레짐은 단기적 이익 계산을 넘어선 상호의존적 규범(interdependence norms)에 기반해야 하며, (2) 그러한 규범이 국가의 자기이익적 행동을 실질적으로 제약해야 하고, (3) 그 지속성은 권력균형이나 주요 국가의 국익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항공 분야에서는 여러 차례 국제 레짐(regime) 구축 시도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각국의 이해관계와 역량(capabilities) 이 달라 실패로 이어졌다. 논의의 축은 시장(market) 대 국가(state), 즉 자유경쟁(open skies)과 주권적 통제(sovereign control) 사이의 대립이었다. 자유주의적 입장은 시장이 효율적으로 노선을 결정해야 한다는 “개방 하늘(open skies)” 모델을, 반면 현실주의적·중상주의적 입장은 하늘을 자국 주권 하에 두고 정부가 이용을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일반적으로 항공산업이 강한 국가는 자유화에, 약한 국가는 보호주의에 기울었지만, 실제 협력은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익의 분배(distribution)가 걸린 사안에서는 협력이 어렵고, 기술적 문제처럼 정치성이 낮은 영역에서만 협력이 가능했다.
따라서 국제항공의 제도적 틀은 독립적인 ‘국제 레짐’이라기보다, 당시 권력구조와 국가이익의 반영물이었다.
현대 국제항공체제의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일방적 선언과 1911년 「항공항행법」 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은 자국 영공을 절대적 주권 영역으로 선포하며 외국 항공기의 이용을 통제했고, 이 원칙은 1919년 파리항공협약(Paris Convention)을 통해 국제적으로 확립되었다. 결과적으로 항공 운항권은 양자 협상(bilateral negotiations)을 통해 교환되었고, 교환 비율은 국가의 힘과 지리적 이점에 좌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겉으로는 “개방 하늘”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보호주의적 정책(air mercantilism)을 택했다. 미국은 극소수 국가에만 착륙권을 부여하고, 우편계약과 보조금으로 자국 항공사를 키웠으며, 영국도 “제국 내 항공 독점(Imperial cabotage)” 정책으로 식민지 항공을 통제했다. 1930년대 후반 일시적으로 개방적 논의가 등장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 전쟁 전까지 미국은 이미 기술·산업력에서 영국을 앞서 있었고, 이러한 항공력 격차(air power disparity)가 이후 전후 국제항공체제의 주도권을 둘러싼 영국-미국 간 대립의 토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새로운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했고, 전쟁으로 약화된 영국은 여전히 제국의 잔존 자원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강대국 지위를 유지했다. 전후 국제 민간항공체제(IAS)의 재편은 사실상 이 두 나라의 손에 달려 있었지만, 양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품고 있었다. 미국은 전시 분업에서 수송기 개발을 맡으며 장거리 대형 민항기 분야에서 압도적 기술 우위를 확보했고, 거대한 국내 시장과 전쟁을 통해 구축한 글로벌 항공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세계 상공을 상업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이러한 경제적·기술적 우위를 활용하기 위해 미국은 ‘자유경쟁적 개방 하늘(open skies)’ 체제를 주장했는데, 이는 이념적 자유시장 신념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계산된 전략이었다.
특히 미국은 영국이 영연방 공항 접근을 제한할 것을 우려해, 영국이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있던 시점에 각국과 양자협정을 체결하며 선제적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반면 영국은 미국의 이런 일방적 행보를 ‘항공 독점(American aviation monopoly)’으로 간주하며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응해 영국은 일부 주권을 양보하더라도 강력한 국제 항공 규제기구(air authority)를 다자적 협정을 통해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한 영국 관리의 말처럼, “세계는 Americanization과 Internationalization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영국의 이익은 후자에서 더 잘 보장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전후 항공체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국은 자유경쟁을 통한 상업적 헤게모니를, 영국은 다자 규범을 통한 세력균형을 추구하며 현실주의적 갈등 구도를 형성했다.
영국은 전후 항공 질서를 다자적으로 규제할 국제기구를 원했으나, 미국은 기술 규제에는 찬성하면서도 상업 규제에는 반대했다. 미국이 시간을 끌자 영국은 런던 회의 개최를 위협했고, 이에 미국은 1944년 시카고 회의를 소집했다. 기술력은 부족했지만, 영국은 제국의 광범위한 항로와 환승지 통제권 덕분에 여전히 강력한 협상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This leverage was territory-based and issued out of Britain's strategic location along the transatlantic routes and, more important, its control of transit points along these and other trunk routes in a far-flung empire)
1944년 시카고 회의는 전후 국제항공체제(IAS)를 설계하기 위한 최대 규모의 다자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두 항공 강국의 대립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표면적으로는 52개국이 참여했지만 소국들의 제안은 무시되었고,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을, 영연방은 영국을 지지하며 회의는 양극화되었다. 미국은 당시 압도적인 항공 기술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늘의 자유(freedom in the air)”를 주장하며 규제 없는 시장 경쟁을 내세웠지만, 이는 공공선 추구가 아니라 자국의 항공 우위를 독점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반면 영국은 “하늘의 질서(order in the air)”를 내세우며 운임·노선·운항 빈도를 공정하게 조정할 국제 항공기구의 설립을 요구했다. 미국은 이를 자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위험한 시도로 보고 거부했다. 흥미롭게도 이는 해운 분야에서의 입장과 정반대였는데, 해운에서는 미국이 보호주의를, 영국이 자유무역을 주장했었다. 결국 시카고 회의는 다자 협력보다는 강대국의 이익이 앞서는 중상주의적 현실주의 질서의 재확인으로 귀결되었다.
협상이 교착되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직접 개입해 처칠에게 “영국의 태도는 공중무역을 질식시킨다”며 경고하고, 심지어 무기대여법(Lend-Lease) 지원과 연계하겠다는 압박까지 가했지만 영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 무기대여법(Lend-Lease Act, 1941)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과 연합국에 군수품·식량·연료 등을 빌려주는 지원 제도. (전쟁 막바지인 1944년에도 영국은 여전히 미국의 물자 지원에 경제적으로 의존)
양국의 핵심 쟁점은 항공 자유권(freedoms of the air) 중에서도 경제적 이익이 걸린 ‘교통권(traffic rights)’이었다. 단순히 영공을 통과하거나 기술적 목적(급유·수리 등)으로 착륙하는 ‘통과권(transit rights)’ (제1·2의 자유)에는 쉽게 합의했지만, 여객·화물을 상대국으로 실어나르는 제3·4의 자유, 그리고 타국 영토에서 제3국으로 여객·화물을 실어나르는 제5의 자유(fifth freedom)에서는 이해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미국은 자국 장거리 노선의 상업적 수익성을 위해 제5의 자유를 필수로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미국 항공사의 시장 독점 시도로 보고 거부했다. 미국은 운항 횟수의 초기 균등 분배와 함께, 탑승률이 일정 수준(3분의 2) 이상이면 운항을 늘릴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조항’을 제안하여 3,4 자유에 대해서는 합의했지만 5 자유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않았다. 이에 전전(戰前)처럼 양자협정 중심의 항공 질서(bilateralism)가 유지되었다. 다만 시카고 회의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를 창설하여 안전·기술 분야의 국제 표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제한적 성과를 남겼다.
번호 | 명칭 | 설명 | 예시 |
제1의 자유 (First Freedom) | 통과의 자유 | 타국의 영공을 착륙 없이 통과할 권리 | 대한항공이 미국행 비행 시 러시아 상공을 통과 |
제2의 자유 (Second Freedom) | 기술착륙의 자유 | 상업 목적이 아닌 급유·정비 등 기술적 착륙 권리 | 대한항공이 유럽행 비행에서 두바이에 잠시 착륙 |
제3의 자유 (Third Freedom) | 수출의 자유 | 자국에서 타국으로 승객/화물 운송 | 인천 → 런던 노선 |
제4의 자유 (Fourth Freedom) | 수입의 자유 | 타국에서 자국으로 승객/화물 운송 | 런던 → 인천 노선 |
제5의 자유 (Fifth Freedom) | 연장 운항의 자유 | 타국 간(제3국 포함)의 상업적 운항 권리, 즉 한 나라의 항공사가 다른 나라를 경유해 제3국으로 승객·화물을 실어나를 수 있는 권리 | 예: 싱가포르항공이 싱가포르 → 인천 → 로스앤젤레스 구간에서, 인천↔LA 구간의 승객도 탑승시킬 수 있음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항공의 노선, 운항량, 운임 등을 전 세계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강력한 국제기구를 만들자고 주장했지만, 이는 결국 제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현실적 계산이었다. 미국 또한 표면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다자주의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자국의 힘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존 러기(John Ruggie)는 이런 전후 국제질서를 “다자주의(multilateralism)”와 “embedded liberalism”로 설명했는데, 다자주의는 단순히 여러 국가의 협력이 아니라 일정한 보편적 규범에 따라 국가 간 관계를 질서화하는 체계이며, embedded liberalism는 자유무역을 기본으로 하되 국내 복지나 고용이 위협받을 경우 강대국이 그 조정비용을 약소국에 떠넘길 수 있는 조건부 자유주의를 뜻한다. 항공 분야에서 미국은 이러한 자유주의를 ‘오픈 스카이(Open Skies)’ 정책으로 구체화하여 운항 횟수·운임·용량 등에 제한이 없는 완전 자유경쟁을 주장했으나, 노선 결정권만큼은 다자협정이 아니라 양자협상으로 남겨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는 방대한 시장 규모와 협상력을 지닌 미국이 개별국가와의 교섭에서 더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자유주의는 형식적으로는 다자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다자주의와 양자주의를 병행하는 ‘이중 전략(two-pronged strategy)’이었고, 자유주의의 원칙조차 자국의 경제력과 항공우위에 맞춘 맞춤형 체제였다. 결국 미국은 다자적 항공자유권 제도를 관철하지 못했지만, 압도적인 전후 권력 구조 속에서 양자협정을 통해 같은 실질적 결과를 얻었고, 영국은 그 현실을 곧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은 전략을 바꿔 아일랜드, 덴마크, 스웨덴 등 영국 주변국들과 양자협정(을 체결하며 영국을 경제·지리적으로 포위(encirclement)했다. 이 과정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의 항의(샤넌공항 협정 취소 요청)를 거절하며 “이는 전후 질서의 문제(postwar matter)”라고 못 박아, 전쟁 동맹 논리가 아닌 미국 중심의 새로운 상업 질서로 규정했다. 결국 전후 재정 위기에 몰린 영국은 미국의 경제적 압박(차관 연계 외교)에 굴복해 1946년 버뮤다 협정에서 ‘제5자유권’을 수용하며 후퇴했다. 버뮤다 협정은 형식상 양자주의의 승리였지만, 실제 내용은 미국식 자유주의 원칙이 제도화된 전환점으로, 시카고의 대립을 ‘협력’으로 포장한 패권적 자유주의(hegemonic liberalism)의 완성 단계였다.
버뮤다 협정은 겉보기에는 자유경쟁적 요소를 담았지만, 실제로는 주권을 기반으로 한 양자주의(bilateralism)를 확립하며 항공 질서가 국제체제의 현실주의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약 4,000건의 양자 항공협정이 존재하며, 그 내용은 각국의 협상력에 따라 달라지고, 강대국은 약소국에 압력을 가해 양보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협정들은 지속성이 낮아 수개월의 통보로 파기될 수 있었고, 실제로 1980~1993년 사이 19건이 해지되었다. 비록 ICAO나 IATA 같은 국제기구가 항공 분야의 협력 기반처럼 보이지만, ICAO는 항법·안전·표준화 등 기술적 사안에 한정된 자문기구에 불과하며, 강제력이나 규제 권한이 전혀 없다. IATA 또한 1970년대 이전까진 요금결정 기능을 맡았으나, 회원의 절반 이상이 국영 항공사였고 만장일치제 구조로 인해 국가가 실질적 통제권을 유지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은 IATA의 역할을 약화시켜 단순한 무역협회 수준으로 만들었고, 결국 국가 주권과 권력 구조가 모든 결정을 좌우하는 체제가 유지되었다. ICAO 이사회에서는 경제적·정치적으로 강한 국가들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IATA 역시 세계 주요 항공사들이 주도했으며, “항공 강국이 곧 권력의 중개자(power broker)”라는 현실이 항공 질서의 본질로 자리 잡았다.
- ICAO(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국제민간항공기구)는 1944년 시카고협약에 따라 설립된 유엔(UN) 산하 자문기구로, 항행·안전·표준화 등 기술적 사안만 다루며 법적 구속력은 없다.
- IATA (International Air Transport Association, 국제항공운송협회) 는 1945년 설립된 항공사들의 무역협회로, 1970년대 중반까지 항공운임(fare)을 결정하고 이행을 관리했으나, 미국의 자유화 압력 이후 단순한 협의체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1946년 버뮤다 협정(Bermuda Agreement) 이후 약 30년 동안 미국과 영국은 자유경쟁적 항공체제를 유지하며 항공산업의 황금기를 누렸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점보 제트기의 과잉 공급, 오일쇼크, 경기침체, 신흥국 항공사와 전세기 경쟁 등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과 영국 모두 시장 점유율이 급감했고, 특히 미국은 자국이 전 세계 항공 수요의 절반 이상을 창출하면서도 실제 운항 비중은 50% 미만이라는 점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버뮤다 체제의 실효성이 흔들리자 영국은 1976년 협정을 폐기하고 버뮤다 II 협정(1977) 통해 운항규제 강화와 미국의 제5의 자유 제한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오히려 더 근본적인 자유화 개혁 요구가 커졌고, 포드 행정부 시기의 국내 항공 자유화(deregulation) 정책으로 등장한 ‘허브 앤 스포크(Hub-and-Spoke)’ 기반 대형 항공사(Megacarrier)들이 세계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보잉(Boeing)과 맥도넬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 등 강력한 항공기 산업의 뒷받침 속에, 미국은 1944년 시카고 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오픈 스카이(Open Skies) 구상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를 “자유주의적 개방”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자국 항공산업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embedded liberalism의 형태였다. 미국은 양자협정(bilateralism)을 통한 분할 압박(divide and conquer) 전략과 IATA(국제항공운송협회)의 요금결정권 약화라는 이중 전술을 병행했다. 1978년에는 “Show Cause Order”를 발동해 IATA의 반독점법(antitrust) 면제 특권을 철회하겠다고 경고, 사실상 요금결정 권한을 박탈했다. 이로 인해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와 각국이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했으나, 결과적으로 IATA는 운임결정 참여를 선택사항으로 바꾸며 단순한 협회로 전락했다. 이후 미국은 양자 및 지역협정을 통해 점진적 자유화를 확산시켰고, 1990년대에는 유럽연합(EU)과의 ‘오픈 스카이 협정’ 을 제안하며 새로운 자유주의 질서 구축을 시도했다. 1990년까지 미국은 전 세계 양자 항공시장 점유율 53%를 기록하며, 항공 분야에서의 패권을 다시 확립했다.
“왜 이런 조치를 내리지 말아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show cause)”는 행정명령. 즉, 정부가 제재나 철회를 예고하면서 상대방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는 절차적 명령임. 이 논문의 경우, 미국 교통부(DOT)와 민간항공위원회(CAB, Civil Aeronautics Board)가 IATA에 법적 특권을 박탈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
2️⃣ IATA의 “반독점법 면제(exemption from antitrust laws)”란?
미국의 반독점법(Antitrust Law) 은 기업 간의 가격 담합(price-fixing), 시장분할, 경쟁제한 협정 등을 금지함. 하지만 항공사들은 국제노선 운임을 조정하려면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1940년대부터 IATA에게 ‘예외적 면제(exemption)’를 부여했음. 즉, IATA가 국제 항공요금을 공동으로 결정하더라도 법 위반이 아니게 해준 것.
미국이 주도한 국제항공체제(IAS)의 자유화(liberalization) 추진은 유럽 내부에서도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전후에는 미국의 자유화 정책에 맞서 보호주의를 대표했던 영국이, 1987년 브리티시 에어웨이즈(British Airways) 민영화 이후 유럽 항공 시장의 지배적 위치를 확보하면서 오히려 자유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소규모이지만 효율적인 항공사를 가진 국가들도 자유화를 지지했으며, 이는 이들 국가가 내수시장보다 제3국 환승 수요(Third-State Traffic)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등은 부분적 국유체제와 낮은 효율성 때문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유럽 외부에서는 자유화가 ‘영미(Anglo-American) 중심의 세계 항공 지배 전략’으로 인식되어 반발을 샀다. 1992년 ICAO 회의에서 일본항공(JAL) 회장 야마지 스스무는 이를 “강대국의 세계 지배 수단”이라 비판했고, 인도항공 대표 마스카레나스는 “자유주의 원칙이 제3세계에는 선택적으로만 적용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싱가포르항공(Singapore Airlines)처럼 효율적인 항공사를 보유한 국가는 개방을 지지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1980년대 이후 항공산업은 세계화와 대형화(megacarrier concentration)라는 구조적 변화를 맞이했다. 미국의 소수 대형 항공사들은 허브 앤 스포크(hub-and-spoke) 시스템, 규모의 경제, 전산 예약, 마일리지 제도 등을 통해 전 세계 항공사들에게 경쟁 압력을 가했고, 이에 대응해 북대서양 항로를 중심으로 합병, 제휴, 국경 간 투자가 활발해졌다. 이 결과, 유럽·미국·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초국적 항공사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반면, 제3세계 항공사들은 주변화(marginalization) 혹은 인수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세계화의 흐름은 기존의 양자협정 체제를 흔들며, 서방 국가들은 시장 자율에 맡기려는 경향을 강화하고, 반대로 약소국들은 국가항공사와 안보를 연계하며 보호주의적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향후 국제항공질서는 시장 중심의 자유화 모델과 정부 규제형 체제가 공존하는 다층적 혼합체제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항공체제(IAS)는 현실주의가 가장 높은 설명력을 보였다.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와 IATA(국제항공운송협회)가 존재하지만, ICAO는 기술·안전 문제에 국한된 자문·조정기구, IATA는 오늘날 회원 간 정산을 처리하는 금융결제기구(clearinghouse)에 불과하며 요금은 시장(market forces)에 의해 결정된다. 항공 노선, 운항량, 요금 등 상업적 사안은 약 4,000개의 양자협정으로 운영되며, 이는 국가 간 협상력과 세력균형 변화에 따라 쉽게 수정·폐기되는 임시적 합의 구조다. 강대국들은 자유주의를, 약소국들은 보호주의를 택하며, 레짐은 공동 규범이 아니라 권력과 이익의 산물로 나타났다. 특히 미국은 1970년대 이후 자국의 항공 우위를 활용해 자유화 체제 전환을 주도했지만, 여전히 단일한 항공레짐은 존재하지 않으며, 국제항공질서는 권력 구조에 따라 재조정되는 무정부적 협상 체제로 남아 있다.
예컨대, “모든 나라가 영공주권을 인정하고, 항공 협정을 양자적으로 체결한다”는 일련의 행태 패턴 자체가 ‘항공레짐’의 핵심.
하지만 현실주의 시각에서 보면, ICAO나 IATA가 아무리 존재해도, 항공 운항·요금·노선 결정은 결국 국가의 협상력에 따라 변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레짐’이라 보긴 어렵다고 논문은 주장하는 것임.
버뮤다 협정(Bermuda Agreement)**은 영미 간 이해충돌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전 세계 양자항공협정의 모델이 되었음. 그럼에도 수십 년간 유지된 이유는, 서로 이익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작동할 수 있는 공통 규칙(common rule) 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용법 | 핵심 의미 | 대표 연구자 |
① Regime Complex | 하나의 분야에 여러 중첩된 제도·조약이 공존 (예: 기후, 무역, 사이버) | Raustiala & Victor (2004), Alter & Meunier (2009) |
② Issue-specific Regime | 특정 분야의 협력 규범군 (예: Paris Climate Regime, Aviation Regime) | Keohane & Victor (2011) |
③ Normative Regime / Epistemic Regime | 규범, 전문가 네트워크, 담론이 주도하는 비정부적 협력체 | Finnemore & Sikkink (1998), Haas (1992) |
시대 | 국제정치 패러다임 | 레짐 개념의 위상 |
1980s | 신자유제도주의 (Neoliberal Institutionalism) | 협력의 핵심 설명도구 |
1990s–2000s | 복합제도주의 (Regime Complex / Governance) | 확장·희석·통합 |
2010s–2020s | 다중행위자 거버넌스 (Polycentric / Transnational Governance) | 하위개념으로 유지 |
레짐은 권력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권력을 재조직하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WTO, ICAO, IMF 같은 제도는 미국이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서 중국·EU가 룰을 재해석하거나 뒤집기도 함. Mearsheimer식 현실주의는 “미국이 탈퇴하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공급망, 통상 규범, 금융 질서, 항공·해운 표준 등에서 제도 밖으로 나가면 오히려 미국 기업·시장에 불이익이 커짐. 예를 들어 WTO를 약화시키면서 미국은 대안적 제도들(USMCA, IPEF, AUKUS, G7+ 기후금융) 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건 제도를 떠나는 게 아니라, 제도의 ‘형태를 재조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론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