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or, Yohanan, 『To Right a Wrong』
Manor, Yohanan. 1996. To Right a Wrong: The Revocation of the 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3379 Defaming Zionism. New York: Shengold.
『To Right A Wrong』 은 1975년 유엔 총회가 시온주의를 인종차별로 규정한 결의안의 탄생과 폐기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책으로, 1960년대 유엔이 반유대주의를 인종차별로 규탄하기를 거부한 데서 비롯된 반시온주의의 확산을 배경으로 한다. 이 결의안은 이스라엘과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뒤집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약 9년에 걸쳐 이어졌다. 미국 내 유대인과 비유대인 인사들의 지속적인 압력, 그리고 호주 정부의 결의안 채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결국 1991년 결의안이 철회되면서 이스라엘의 국제적 고립이 해소되고 유엔이 반유대주의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유대인은 종교적·민족적 범주를 의미하는 반면, 시오니즘은 유대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이며, 이스라엘은 그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나 오늘날엔 다양한 세속·종교·아랍계 집단이 공존하는 복합적 국가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이 시오니스트인 것은 아니며, 특히 일부 정통 유대교도는 “메시아가 오기 전 인간이 국가를 세우는 것은 신의 뜻에 대한 불경”이라며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반면 다른 유대교 세력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신의 섭리로 해석하거나 현실적 정치 질서로 수용한다
서문 및 도입부
CHAPTER I — FROM OPPOSITION TO VILIFICATION
(제1장: 반대에서 비방으로)
19세기 말 근대 정치적 시온주의가 등장한 이후, 유대 사회 내부의 반대는 점차 줄어든 반면 비유대인 사회의 반대는 오히려 커지며 시온주의를 ‘세계적 악’으로 악마화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계몽주의와 산업화로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할지 근본적인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때 유대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네 가지였다. 첫째, 전통적 신앙과 율법 중심의 공동체 질서를 고수하는 정통파 유대교적 삶을 유지하는 길. 둘째, 시민적 평등을 누리며 주류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유대 민족성과 종교적 색채를 희석하는 길. 셋째, 민족적 구분 자체를 초월해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를 통해 보편적 인류 공동체를 지향하는 길. 그리고 넷째, 유대 민족으로서의 연대와 정체성을 유지하며 역사적 고향인 팔레스타인에 영토적 기반을 두려는 길, 즉 시온주의였다. 그러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를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세속적 이단으로 여겼고, 이미 서구 사회에 통합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민권과 사회적 지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며 반대했다.
이후 사회주의나 국제주의를 지지한 유대인들도 시온주의를 퇴행적 민족주의로 비판했지만, 스탈린 체제의 반유대주의가 폭로되고 공산주의 제국이 붕괴하면서 이런 사조는 거의 사라졌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1967년 6일전쟁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강한 자부심과 연대감을 되찾게 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많은 유대인이 시온주의를 단순한 민족운동이 아니라 생존과 존엄을 위한 역사적 당위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 신좌파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나 국제주의는 더 이상 유대 사회 내에서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 The Decline in Jewish Opposition to Zionism (유대인 사회 내 반(反)시온주의의 쇠퇴)
1. 19세기 말~1940년대 초: 시온주의의 등장과 내부 논쟁
19세기 말 근대 정치적 시온주의가 등장하자 유대 사회 내부에서는 여러 갈래의 반응이 나타났다. 정통파 유대교는 시온주의를 “신의 섭리를 인간이 대신하려는 이단적 시도”로 간주하며 반대했고, 동화된 유대인들은 시온주의가 자신들의 시민권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 두려워했다.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의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를 “퇴행적 민족주의”로 비판하며 국제주의와 인류 보편주의를 강조했다. 이와 같은 내부 논쟁 속에서도 시온주의 운동은 점차 세속적 민족운동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2. 1910~1930년대: 아랍 민족주의와의 충돌
시온주의 운동은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내 아랍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으나, 1920년대 이후 이를 인식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1919년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은 유대 국가 설립에 대한 아랍의 지지를 얻기 위한 첫 시도였다. 1921년 시온주의 회의에서는 팔레스타인을 “공동의 조국”으로 표현하며 화해적 태도를 보였으나, 1929년 아랍 폭동과 영국의 유대인 이주 제한 정책 이후 갈등은 심화되었다.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 다수 지배를 포기하고 양민족 공존국가를 제안했으나, 1937년 필 위원회 분할안과 1939년 영국 백서 모두 아랍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로 인해 시온주의 운동은 자유 이주를 보장하는 독립 유대 국가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다(1942년 빌트모어 회의).
3. 1940~1960년대: 공산권의 반시온주의와 유대 사회의 전환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온주의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공산권에서는 시온주의를 “제국주의 음모”로 규정하며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1951~52년 체코의 슬란스키 재판, 1953년 소련의 의사 음모 사건, 1968년 폴란드와 체코의 반시온주의 캠페인 등을 통해 시온주의를 “국제 음모의 주체”로 몰았다. 이는 내부 위기를 전가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이었고, 공식적으로 금지된 반유대주의를 대체하는 합법적 적대 프레임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서구 사회에서는 홀로코스트의 충격과 이스라엘의 생존이 유대인의 정체성 인식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은 “이중 소속감(concurrent loyalties)”을 받아들이며, 시온주의를 민족적 자존과 생존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반면, 아랍 세계는 1948년 패배 이후 시온주의를 “아랍 단결을 파괴하는 제국주의적 음모”로 규정하며 국제 여론전으로 전환했다.
4. 1960~1970년대: 새로운 시온주의의 정립과 반시온주의의 국제화
1960년대 초반, 소련 및 뉴욕에서의 청소년들의 유대인 혐오에 따라 미국은 대권을 위해 반유대주의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1964년 팔레스타인 민족헌장은 처음으로 시온주의를 “인종차별적·파시스트적”이라고 명시하며, 반시온주의를 국제 반인종차별 담론(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과 연결시켰다. 1967년 6일전쟁 이후 시온주의는 전 세계 유대인 정체성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1968년 예루살렘 프로그램(Jerusalem Program) 은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연대를 공식화했다. 1970년 유대인청(Jewish Agency) 재편은 이러한 협력 구조를 제도적으로 완성했다.
5. 1965~1994년: 바티칸의 점진적 변화
수세기 동안 바티칸은 “교회는 유대인의 귀환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지할 수도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유대인의 예수 처형 책임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바티칸 정의평화위원회가 「교회와 인종차별(The Church and Racism)」을 발표해 인종차별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고, 마침내 1994년 이스라엘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시온주의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전환했다.
- The Refusal to Condemn Anti-Semitism (반유대주의 규탄 거부)
1960년대 중반 유엔 인권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 협약’을 준비하며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규탄할지를 논의했다. 미국 대표 마리에트 트리는 유엔 회원국이 반유대주의를 근절할 의무를 지도록 하는 조항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즉시 “그럴 경우 시온주의와 나치즘도 함께 규탄하겠다”고 경고했다. 프랑스와 영국도 서독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부정적이었다. 미국의 제안은 사실상 대선을 앞둔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유대인 표를 의식해 추진한 국내 정치용 행동이었다. 1965년 총회에서는 미국과 브라질이 반유대주의 규탄안을 공동 발의했지만, 소련은 ‘반유대주의·시온주의·나치즘·식민주의’를 한꺼번에 규탄하는 역제안을 내며 논의를 교란했다. 결국 그리스·헝가리의 수정안으로 ‘특정 차별 언급을 모두 삭제’하는 결정이 다수 찬성으로 통과되었고, 미국은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요구로 토론은 이어졌지만, 최종 표결에서 82대12로 부결되었다.
1967년에도 유엔은 종교에 기반한 차별 철폐 선언을 논의하며 반유대주의를 포함시키려 했으나, 이번에는 87대2로 더 큰 표차로 부결됐다. 소련은 이번엔 직접적으로 시온주의를 공격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자는 식으로 의제를 희석시켰다. 이렇게 두 차례나 반유대주의 규탄이 좌절된 이유는,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으로 반대했고, 사회주의권은 소련 내 유대인 차별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으며, 아시아·아프리카 블록은 아파르트헤이트 문제에 초점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유엔은 2차대전 이후 유지되던 ‘반유대주의는 절대 악’이라는 암묵적 합의를 무너뜨렸고, 소련과 아랍국가에게 “아프로·아시아 블록의 지지만 확보하면 시온주의를 공식적으로 규탄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 사건은 ‘시온주의=인종차별’ 결의로 이어지는 외교적·사상적 출발점이었다.
- The Vilification of Zionism (시온주의 비방)
1975년 들어 아랍권의 반시온주의 공세는 국제무대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7월 제다 이슬람회의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추방 결의는 내부 이견으로 흔들렸다. 같은 해 9월 1일 이집트의 반대로 PLO의 강경안은 “유엔과 산하 기구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필요할 경우 회원 자격 박탈을 검토한다”는 수준으로 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중동 관련 결의에서는 시온주의를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며 더욱 강력히 비난했고, 아랍국가들은 “시온주의 세력의 인종차별적이고 공격적인 본성을 폭로하기 위한 정보 캠페인”을 조직하기로 했다.
며칠 뒤, 1975년 8월 25일부터 30일까지 페루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국 정상회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재연되었다. 시리아와 PLO는 이스라엘의 유엔 추방 또는 자격 정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아프리카 국가들이 강력히 반대했다. 치열한 비공식 논쟁 끝에, 회의는 결국 이스라엘 추방 요구를 제외하고 시온주의를 ‘세계 평화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규탄하는 결의안만 채택했다. 이처럼 국제사회 전반에 걸쳐 시온주의를 향한 광범위하고 단호한 저항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곧 이어질 유엔의 시온주의=인종차별 결의(3379호) 는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 되었다.
CHAPTER II — UN RESOLUTION 3379 AGAINST ZIONISM
(제2장: 시온주의를 규탄한 유엔 결의 3379호)
6일전쟁 이후 아랍과 소련의 반시온주의 공세는 국제 무대에서 한층 강화되었다. 이집트가 1972년 소련 군사고문단을 추방하고 미국과 관계를 복원하자, 소련은 중동 내 영향력 약화를 막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반이스라엘 노선을 취했다. 동시에 아랍 국가들은 시온주의를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apartheid)과 결부시켜 비난하며, 이스라엘을 유엔에서 제명하거나 자격을 정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1975년 유럽공동체와 미국이 이스라엘의 유엔 지위 박탈에 강력히 반대했다. 대신 아랍과 소련은 시온주의 자체를 국제적으로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로 낙인찍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75년 9월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 문제를 논의하던 중, 아랍·소련·비동맹 국가들은 시온주의를 “인종적 우월성에 근거한 차별적 사상”으로 규정하며 남아공 인종주의와 동일시했다. 우크라이나와 PLO 대표는 “시온주의는 곧 인종주의”라 단언했고, 특히 PLO 대표 압둘 라흐만은 시온주의를 “타 민족을 몰아내고 대체하는 형태의 인종주의”라 규정했다. 그는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인을 말살하려 한다며 나치즘과 동일시했고, 유대인을 사회로부터 분리하려 한다는 점에서 반유대주의와 닮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10월 1일, 우간다의 이디 아민 다다가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스라엘의 소멸”과 “미국 내 시온주의 청산”을 요구했고, 이에 미 유엔대사 대니얼 모이니핸은 공개 연설로 “독재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며 강력히 반박했다.
- Taken Aback (예기치 못한 결의안의 채택)
1975년, 소말리아가 유엔 제3위원회에서 ‘인종차별 철폐 10년 계획’ 논의 중 돌연 시온주의를 인종차별로 규정하는 수정안을 제출하면서, 이는 이스라엘의 유엔 제명 실패 이후 아랍·소련 진영이 선택한 새로운 전략이었다. 이 수정안은 시온주의의 식민주의적 기원을 조사하고 피해자에게 지원을 제공하라는 내용을 담으며, 사실상 시온주의의 도덕적 불법화를 시도했다. 모이니핸 미 유엔대사는 이를 “이스라엘을 백인 식민주의로 낙인찍는 담론전쟁”으로 간파했다. 그는 유럽공동체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설득하며 ‘논리의 싸움에서 이기기’ 전략을 폈고, 미국과 EEC 대표단은 시온주의를 인종차별로 규정하는 것은 인권의 언어를 정치적 무기로 왜곡하는 행위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소말리아는 수정안을 철회하는 대신 독립 결의안으로 제출 및 채택되었으며,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고립국(pariah state)’으로 전락했다.
- Losing the Votes (정치적 고립과 외교전의 실패)
10월 16일 소말리아가 초안을 제출한 뒤, 미국과 유럽공동체는 이를 “인종차별 철폐 10년 계획”의 취지를 왜곡하는 정치적 공격이라 규탄했으나, 제3위원회는 10월 17일 찬성 70, 반대 29, 기권 27(결석 16) 으로 초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11월 10일 총회 본회의에서 벨기에가 “다음 회기로 표결을 연기하자”는 제안을 냈지만 찬성 55, 반대 67, 기권 15 로 부결되었고, 곧바로 결의안 본표결이 실시되어 찬성 72, 반대 35, 기권 32, 결석 3 으로 최종 채택되었다. 미국 대사 다니엘 모이니핸에 대해 일부 서방 외교관들은 그의 거친 발언이 오히려 중립국 표를 잃게 했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아프리카 37개국 중 17개국이 반대·기권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브라질을 포함한 5개국이 찬성했다. 일본은 석유 의존을 이유로, 이란은 “아랍 형제들과의 연대”를 이유로 찬성표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이 결의는 냉전기 유엔의 수적 다수와 정치·경제적 압력이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방 언론의 비판과 달리,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대 공동체는 거의 침묵했다. 이에 하임 헤르조그 이스라엘 유엔대사는 10월 24일 유대 단체 지도자들에게 “이 결의는 현대판 반유대주의이며, 유엔은 이스라엘의 생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전장”이라 경고했지만, 무반응에 가까운 태도에 실망을 표했다.
- Gaining the Argument (논리— 도덕적·사상적 대응의 시작)
| 주요 내용 | 대표 인물/국가 |
| 쿠웨이트 대표 압달라 알사이그가 인종차별철폐협약(ICERD) 제1조를 인용하며 “시온주의는 인종차별”이라 주장 | 쿠웨이트(팔레스타인계) |
| 협약은 racial discrimination만 정의했을 뿐 racism을 정의하지 않으며, 두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 | 미국 대표 다니엘 모이니핸 |
| 1) 시온주의는 종교를 민족으로 둔갑시킨 허구적 민족주의 2) 유대인 선민사상은 인종적 우월의식 3) 귀환법은 제도적 인종차별 4) 팔레스타인 추방은 식민지적 행위 | 사우디(Baroody), 이집트, 쿠웨이트, 요르단, 다호메이 등 |
| 1)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혼동한 오류 2) 역사적 왜곡이며 반유대주의의 재현 3) 인종차별 철폐 10년 프로그램의 취지 왜곡 4) 유엔의 도덕적 권위 붕괴 | 미국(모이니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코스타리카, 오스트리아, 잠비아, 피지 등 |
- Restating the Truth (시온주의 재정의)
바베이도스, 코스타리카,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등은 시온주의를 유대교와 불가분의 신앙·문화적 전통으로 설명하고, 헤르조그는 시온을 예루살렘과 동일시한 성경적 근거를 들어 “시온주의는 유대교 신앙의 일부이자 4천 년간 지속된 귀환의 염원”이라 설파했다. 라이베리아와 코스타리카 대표들은 시온주의가 반유대주의와 박해 속에서 태어난 정당한 민족해방운동이자, 인류의 보편적 구원을 향한 ‘민족적 구원(national redemption)’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시온주의가 단지 유대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도덕적·정신적 의미를 지니는 보편적 가치라고 강조했다. 아프리카의 ‘흑인 시온주의(Black Zionism)’처럼, 시온주의는 자유와 귀환의 상징으로 이해되었으며, 유대인의 독립은 자결과 평등의 원리를 증명한 역사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 구분 | 찬성 진영(반시온주의) | 반대 진영(친시온주의) |
| 핵심 정의 | 인종적·종교적 배타주의, 식민주의 | 신앙과 정체성의 민족해방운동 |
| 대표 논거 | “선택된 민족” 사상 = 인종우월주의 | “믿음의 공동체” = 보편적 귀환 운동 |
| 정치적 프레임 | 반식민·반아파르트헤이트 | 민족자결·해방·인권 |
| 대표국가 | 쿠웨이트, 사우디,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브라질, 쿠바 | 미국, 이스라엘, 라이베리아, 코스타리카, 시에라리온, 바베이도스, 피지 |
| 핵심 인물 | 알사이예그, 바로디, 바다위, 샤라프 | 모이니핸, 헤르조그, 누녜스, 윌슨, 카마라케 |
| 결론적 입장 | “시온주의 = 인종주의” | “시온주의 = 신앙·역사·해방의 결합체” |
CHAPTER III — A VERY DAMAGING RESOLUTION
(제3장: 매우 해로운 결의안)
일부 이스라엘·미국 인사들은 결의안을 단순한 정치 쇼로 치부했고 그 결과 장기적 대응이 미흡했다. 반면 사하로프나 폴 존슨 같은 인사들은 이 결의가 반유대주의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실제 정책으로 굳어질 위험을 경고했다. 라빈 총리는 이를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정치공세로 인식했으며, PLO는 이를 계기로 ‘비시온화’와 ‘탈유대화’를 추진했다. 대부분의 서방과 이스라엘은 결의가 곧 잊힐 것으로 여겼지만, 이후 결의 3379는 지속적으로 인용되며 시온주의를 ‘악의 은유’로 고착시켰고, 오히려 유엔 내 반이스라엘 담론을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A Persistent Valification (끈질긴 비방)
결의안은 채택 후에도 매년 유엔과 국제기구에서 반복·재확인되며 사라지지 않았다. 1979년에는 찬성국이 111개국으로 늘고, 1982년에는 145개국이 동의하며 유럽 국가들도 반대 대신 기권하거나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후 반시온주의는 단순한 수사적 비난을 넘어 유엔 여성회의 등 공식 행동계획에도 포함되며 제도화되었다. 일부는 아프리카그룹의 전략으로 직접 언급이 줄었다고 해석했지만, 모이니핸은 이를 ‘전이(metastasis)’ 라 부르며, 반시온주의 담론이 국제정치의 언어와 여론 속에 스며든 결과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는 사회의 상식적 인식(conventional wisdom)으로 자리 잡게 된다.
- As Metaphor for Universal Evil (‘보편적 악’의 은유로서의 결의안)
1979년 아바나 비동맹회의에서는 시온주의를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신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를 요구하는 선언문에서 개발도상국의 불평등과 경제적 불의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인종주의, 특히 시온주의’를 명시했다. 이후 시온주의는 국제 담론 속에서 세계 문제의 상징적 원인으로 악마화되었고, 영국·미국·캐나다·호주 등에서는 대학과 언론, 지식계, 노동조합이 시온주의를 인종주의·나치즘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유엔과 국제기구의 결의, 제3세계와 산유국의 정치적 연대, 서방의 유화적 태도가 맞물리면서 시온주의는 악의 은유가 되었다.
- The Delegitimization of Israel (이스라엘의 정통성 약화)
1970~80년대 유엔 결의안의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을 비난했고, ILO·WHO·UNESCO·인권위원회 등은 이스라엘을 노동·보건·문화·인권의 “적”으로 규정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비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국제법적·도덕적으로 불법화하는 체계적 ‘비인간화’ 과정이었다. 진 커크패트릭과 앨런 키스가 지적했듯, 유엔 내에서 이스라엘은 형식상 회원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배제되었고, 반면 PLO는 정당한 해방세력으로 인정받았다. 스프린작이 분석한 바처럼, 시온주의는 더 이상 정책이 아니라 ‘악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로 간주되어, 이스라엘의 모든 자위행위가 ‘침략’으로, 존재 자체가 ‘국제법적 범죄’로 규정되는 완전한 정통성 상실(delegitimization)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 Providing a New Rationale for Anti-Semitism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근거 제공)
- 이전까지는 홀로코스트의 충격으로 반유대주의가 사회적으로 금지된 상태였으나, 이 결의 이후 유대인을 비난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포장되었다. 그 결과 반유대적 발언과 행동이 전 세계에서 다시 공공연히 등장했고, 유엔 내부에서도 유대인 관련 발언이 묵인되거나 공식 기록에 남는 일이 빈번해졌다. 학자들은 이 결의가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반유대주의를 국제적으로 재활성화시킨 이데올로기적 면허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소련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국가 주도의 반시온주의·반유대주의 선전 캠페인을 펼쳤고, 영국과 캐나다 등 서방의 대학과 학생회에서도 “시온주의는 인종차별”이라는 명분으로 유대인 단체의 활동을 제한했다. 이러한 흐름은 종교적·인종적 반유대주의를 정치적 형태로 바꾸며, 유대 민족이 아니라 유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비난하는 “정치적 반유대주의(political antisemitism)”로 발전했다. 결국 결의 3379호는 유대인을 향한 직접적 증오 대신 이스라엘의 ‘정당성 부정’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재정당화한 것이다.
- Restoring Jewish Anxiety toward Zionism (시온주의에 대한 유대인의 불안 재점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 사회에서 시오니즘에 대한 반대는 점차 줄었지만, 197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시오니즘이 ‘인종주의’로 매도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시오니즘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꺼리는 분위기가 생겼다. 예전에는 민족 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시오니즘이 “더러운 단어”로 바뀌며, 대학이나 지식인 사회, 진보 진영에서 시오니즘을 밝히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히브리대의 에후드 스프린작(Ehud Sprinzak)은 “진보적 지식인이나 학생들 사이에서 시오니즘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점점 불편한 일이 되었다”고 지적했고, 캐나다의 루스 위스(Ruth Wisse)는 유대인들 사이에 “시온주의의 비극”이라는 체념적 인식과 디아스포라로의 회귀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현상을 우려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불안과 수치심이 단지 국제사회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정책 때문이라고 보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배럿 리트비노프(Barrett Litvinoff)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시오니즘을 이용하면서, 시오니즘의 이미지는 오히려 더러워졌다”고 썼다. 실제로 당시 국제사회 다수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지지했고, 같은 날 유엔은 팔레스타인인 권리위원회 설치(결의 3376)와 PLO를 평화협상 당사자로 인정하는 결의(결의 3375)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이런 흐름을 무시하고 ‘시오니즘=반유대주의 공격’이라는 틀로만 대응해 오히려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저자는 결국 이러한 선택이 결의 3379의 채택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후 그 결의의 폐지를 추진하는 데에도 큰 제약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CHAPTER IV — SPINNING WHEELS
유엔의 ‘시오니즘=인종주의’ 결의(3379호)가 채택된 뒤 9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대 사회는 철회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유엔 내 세력 구도로 인해 철회가 불가능하고, 결의안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했지만, 실제로는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결의안에 대한 초기 대응이 감정적·방어적이어서 국제적 외교전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했고, 둘째, 결의 철회가 팔레스타인 정치적 권리 문제와 연결될 것을 우려해 이스라엘 정부가 사실상 손을 뗐으며, 셋째, 세계시온주의기구(WZO)와 세계유대인회의(WJC) 등 유대 단체 간의 내분이 전략적 공조를 무너뜨렸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무대에서 반시오니즘 공세를 방관하며 스스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 Initial Emotional Reactions (초기 감정적 반응)
이스라엘 정부는 시온주의 교육을 강화해 이념적 기반을 재정립하겠다고 선언했다. 골다 메이어와 모셰 다얀 같은 원로 지도자들은 “유엔 결의안은 종이조각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며, 내부 결속과 이민 확대를 강조했다. 그러나 공식 대응은 대체로 대외 반격보다는 시온주의 재교육과 내부 단결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후 세계시온주의기구(WZO)와 이스라엘 정부는 공동으로 시온주의 홍보 캠페인을 조직하고 ‘시오니즘 정보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실제로는 부처 간 조정 부재와 관료적 분산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1975~76년 사이 외무부와 WZO가 대량의 홍보 자료를 제작했지만, 소련-아랍권이 주도한 ‘시오니즘=인종차별’ 프레임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유엔 내 자동 다수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결의안 철회 추진을 포기했으며, 대신 시간이 지나면 결의안의 영향력이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실질적 외교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팔레스타인 문제를 건드려야하므로), 결의안의 정치적 상징성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 Paralysis of Will (의지의 마비)
1973년 욤키푸르전쟁의 충격 이후, 이스라엘 사회는 6일전쟁의 승리로 형성된 자신감이 무너지고 불안·무력감·정신적 혼란에 빠졌다. 학자 아모스 샤피라는 이를 “욕망과 현실의 간극이 만든 정신적 마비”라 규정하며, 이스라엘이 스스로 사고하고 문제를 직시할 능력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요르단과의 협상 틀” 속에 가두려 했고, 이를 비판한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요르단 뒤에 숨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라빈 정부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가능성을 완강히 부정하며 결단을 미루는 정치적 마비 상태(‘Paralysis of Will)에 빠졌다.
이 시기 일부 현실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세력과의 조건부 대화를 제안했으나, 이스라엘의 정책은 1977년까지 변하지 않았다. 이후 이집트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1977) 과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 으로 국제문서에서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권리”가 명문화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한 국가가 아닌 제한적 자치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의지의 마비”란, 이스라엘이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외교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 Gropings (방향 탐색)
1979년 4월 WZO ‘시오니즘 선언(Statement on Zionism)
시오니즘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유대 민족의 고향 회귀의 열망과 희망의 민족적 표현이다. 시오니즘은 박해의 역사, 특히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대한 유대 민족의 응답이다. 유대인은 오랜 세월 인종차별과 박해의 희생자였으며, 그 본질상 시오니즘은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시오니즘은 유대 민족의 자기결정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 국가의 도덕적 기반이며, 민족 평등의 원칙을 구현한다. 시오니즘은 타 민족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평화적 수단을 통해 그 목표를 추구한다.
1978년 이후 아리 덜진과 언론인 엘리 에얄이 주도한 논의는 “결의안 철회”라는 비현실적 목표 대신, 시온주의를 평화·자기결정·보편적 가치의 언어로 재정의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에얄은 세계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서명을 받아 ‘시오니즘 선언문’을 발표하려 했지만, 내부 이견과 외교적 부담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당시 유럽 좌파 진영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감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온주의를 인류 보편의 가치로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평화는 시온주의의 길(Peace is the Zionist Way)” 같은 홍보 캠페인도 진행됐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WZO는 전략을 바꾸어 “반(反)시오니즘은 곧 반(反)유대주의(Anti-Zionism = Anti-Semitism)”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내세웠다. 1980년 말에는 세계 유대 공동체의 대응을 조율하기 위한 ‘반시오니즘·반유대주의 대응 태스크포스’를 제안했지만, 이미 유사한 활동을 해온 다른 단체들과의 권한 중복과 주도권 갈등으로 제대로 출범하지 못했다. 이처럼 “Gropings(모색)”은 이스라엘이 국제 여론 속에서 주도적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내부의 조직 갈등과 외부의 무관심 사이에서 방향을 잃은 시기를 보여준다.
- Serious and Petty Bones of Contention (중대하고 사소한 논쟁점들)
핵심 쟁점은 “무엇이 더 근본적인 위협인가?”였다. 세계유대인회의(WJC)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중심 문제로 보고, 반시온주의는 그 중 일부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세계시온주의기구(WZO)는 진짜 위험은 이스라엘 국가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반시온주의(anti-Zionism)라고 보았다. 엘리 에얄(Eli Eyal)과 정보국장 요하난 마노르는 “반시온주의는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체계적 정치전”이라 강조하며, WZO 주도의 ‘반시온주의 대응 태스크포스’를 추진했다. 그러나 WJC는 이를 자신들의 반유대주의 캠페인과 중복된다고 반대했고, 두 조직은 명분보다 지도권·영향력 경쟁으로 치달았다.
결국 1982년 파리에서 열 예정이던 국제회의 “반시온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Anti-Zionism: A Threat to Democracy)” 도 정치적 압박과 내부 반대로 무산되었다. 에얄이 주도하던 회의는 프랑스의 친팔레스타인 분위기, 레바논 전쟁 이후의 국제 여론, 그리고 WJC의 조직적 견제 속에 취소되었고, 대신 형식적인 ‘반유대주의 심포지엄’으로 대체되었다. 이 회의에서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반유대주의가 이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통해 새로운 얼굴을 썼다”고 분석했지만, 시온주의 방어 전략 논의는 사라졌다. 결국,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불신과 정치적 계산이 더 큰 장애물이 되었다.
CHAPTER V — THE CAMPAIGN TO RESCIND RESOLUTION 3379
(제5장: 결의 3379 철회를 위한 캠페인)
예비역 장군 우지 나르키스는 6일 전쟁 당시 예루살렘을 탈환한 지휘관으로, 군과 정치 양쪽에서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세계시온주의기구(WZO) 홍보국의 수장으로 부임했지만, 반시온주의 문제를 단순한 반유대주의의 연장으로 보며 시온주의 운동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983년 7월, 그는 기존 실무 책임자 요하난 마노르를 교체하고 자신이 신뢰하던 모리스 질카를 새 국장으로 임명했다. 다만 마노르가 “반시온주의 문제만큼은 계속 맡고 싶다”고 요청하자, 나르키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가 해당 업무만 계속하도록 허락했다.
- Que Faire?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1983년 말부터 요하난 마노르는 유엔의 ‘시온주의=인종차별(Resolution 3379)’을 철회시키기 위한 구체적 행동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외교부 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며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위상이 점차 회복되고 있으며,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시온주의=인종차별” 담론에 피로감이 쌓이고 있다고 보고, 이 기회를 활용해 장기적인 철회 캠페인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84년 2월, 외교부와 세계시온주의기구(WZO)가 공동으로 회의를 열었고, 참가자들은 반시온주의가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결의안을 실제로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다만 “세대가 걸리더라도 시온주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장기 캠페인”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회의에서는 세 가지 전략이 제시됐다. (1)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대상으로 시온주의의 의미를 교육하고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장기 교육 캠페인, (2) 유엔의 신뢰성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그 개혁 또는 대체를 추진하는 정치적 대응 전략, (3) 직접적으로 3379호 결의 철회를 장기 목표로 삼아 각국 의회나 정부로부터 입장 변화를 이끌어내는 외교적 전략이었다. 논의는 결론 없이 끝났지만, 우지 나르키스는 실무적으로 외교부·학계·WZO 인사를 포함한 소규모 공동 실무팀을 꾸려 캠페인 설계를 맡기로 했다. 외교부는 외교적 조치에 한해 주도권을 갖되, 전체 운동의 중심은 WZO가 맡기로 하며, 1984년 3월 나르키스는 사실상 ‘시온주의 명예 회복 운동’의 총책임자로 공식 임명되었다.
- Establishing a Process (조직적 절차 수립)
1984년 실무 그룹은 먼저 결의안의 정치적·법적 근거를 반박하고, 그것이 이스라엘과 유대인 사회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명시적으로 “결의안 철회”라는 표현은 피했지만, 사실상 이를 목표로 삼고 각국 정부·의회·국제기구·저명 인사들을 설득해 여론을 전환시키는 장기 캠페인을 추진하기로 했다. 계획에는 5차례 국제회의 개최가 포함되었으며, 그 시작은 1984년 11월 예루살렘에서 헤르조그 대통령의 후원으로 열리는 회의였다. 그러나 외교부가 전 세계 대사관에 보낸 설문과 요청에 대한 반응은 미미했고, 일부 서유럽 국가(스웨덴, 뉴질랜드, 이탈리아)는 기존의 반대 입장에서 “기권”으로 입장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국제적 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설문을 통해 확인된 결과, 많은 외교관과 유대인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미 지나간 논쟁”으로 간주하며 적극적 행동을 꺼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에블린 귀펭(Evelyne Guffens)은 결의안이 “시온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 의미로 바꾸고, 유엔·언론·대학 담론 전반에 반유대적 언어 구조를 확산시켰다고 경고했다. 이에 WZO는 1984년 6월 히브리대에서 학자와 외교관, 정치인들이 참여한 세미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정치학자 에후드 스프린작(Ehud Sprinzak)은 “시온주의=인종차별” 공식이 단순한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 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경고는 이후 결의안 철회를 목표로 한 시온주의 명예 회복 캠페인의 사상적 기초(정신적 선언문)로 자리 잡았다.
- First Success (첫 성과)
1984년 제네바 국제의회연맹(IPU) 회의에서 쿠웨이트가 유엔 결의안 3379호(‘시오니즘=인종차별’)을 재확인하려 하자, 이스라엘 외교부와 세계 유대인 단체들이 긴급히 연합해 외교전을 펼쳤다. 이스라엘 노동당은 유럽 사민당들과 협력해 쿠웨이트안을 저지하기로 약속받았고, 여러 유대 공동체와 심하 디니츠 의원이 이끄는 대표단의 외교적 조율이 결합되면서 결의안 초안의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라는 문구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는 1975년 이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서 시온주의를 인종차별과 동일시하는 공식 언급을 제거한 첫 외교적 승리(first success) 로 평가되었다.
- Official Kick-Off (공식 출범)
이스라엘과 세계시온주의기구(WZO)는 결의안 3379호 철폐 캠페인을 본격화했다. 그해 11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시오니즘-인종차별 등식 반박’ 회의에는 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 200여 명이 참석해 결의안의 기원과 영향, 그리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외무장관 샤미르와 미 상원의원 모이니핸, 대통령 헤르조그 등은 이 결의가 단순한 정치 문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 정당성을 훼손하는 이념적 공격이라고 규정하며, 철회를 위한 조직적 대응과 언론·학계를 통한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회의는 “시오니즘은 유대 민족의 해방운동이며 인류의 자유와 자결권의 일부”라는 선언문을 채택하며, 국제사회의 도덕적 각성을 요구했다.
이어 12월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시오니즘-인종차별 등식: 인권에 대한 공격’ 세미나를 통해 캠페인은 해외로 확산되었다. 세계유대인회의(WJC), 브나이 브리스, 시온주의기구가 공동 주최한 이 회의에서 진 커크패트릭 유엔대사는 “이 등식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불법국가로 만들려는 정치 프로그램”이라 경고했다. 참석자들은 유엔 내부의 구조적 반유대주의와 ‘도덕적 이중잣대’를 비판하며, 지속적이고 다층적인 공공외교 캠페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CHAPTER VI — STILL SHORT OF THE MARK
(제6장: 아직 목표에 미치지 못하다)
결의안 3379호 철폐를 위한 국제 캠페인은 예루살렘과 워싱턴 회의를 출발점으로 본격화되었으며, 그 목표는 결의안의 해로운 영향을 알리고 그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세계유대인회의(WJC)와 브나이브리스(BBI)를 중심으로 북미·유럽 유대 단체들이 교육·정치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브라질 등 일부 국가는 입장 변경을 약속했다. 또한 미국의 비유대 단체들도 캠퍼스 세미나를 계획하며 참여 범위를 넓혔다. 초기에는 회의 개최를 주저하던 유럽 유대 단체들도 점차 협조적으로 변했고, 이후 회의들은 비유대인 인사의 참여와 언론 보도가 크게 증가하면서 캠페인이 국제적 공감대를 얻는 전환점이 되었다.
- Raising Awareness and Enlisting Support (인식 제고와 지지 확보)
1985년 국제 캠페인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카라카스,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 런던, 뉴욕 등에서 연속 회의가 열렸다. 파리 회의에서는 프랑스 정치인·지식인들이 시오니즘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재정의하며 유엔의 결의안을 비판했고, 이는 반이스라엘적이던 프랑스 여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 사무차장 제임스 조나는 결의안의 재확인을 막는 것이 철회의 실질적 방법이라고 제안했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에 동의하며 유엔 내 온건연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남미와 영국에서도 대규모 학술행사와 의회 결의가 이어졌고, 미국에서는 하다사 벤 이토와 버니스 태넨바움이 주도한 법조·정치 로비가 가시적 성과를 거뒀다.
- Nairobi, a Pyrrhic Victory? (나이로비: 피로스의 승리인가?)
1985년 유엔 여성 10년의 마지막 회의인 나이로비 회의는 ‘시오니즘=인종차별’ 논리를 둘러싼 치열한 외교전의 무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시오니즘 비난 조항의 재등장을 막기 위해 합의 절차 유지를 추진하고, 유대인 단체와 여성 활동가들을 대거 동원했지만, 회의 초반에는 아랍·소련 진영의 공격과 반이스라엘 구호로 긴장이 고조됐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의 강경한 태도와 이집트·케냐의 중재로 결국 “시오니즘과 인종차별”이라는 표현이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로 대체되는 절충안이 채택되어, 시오니즘 비난이 공식 문서에서 제외되었다.
- Saving the UN from Itself (유엔을 스스로로부터 구하기)
1984년 이후 국제 캠페인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유엔의 도덕적 권위 자체를 문제 삼는 전략으로 전개되었다. 법학자 요람 딘슈타인(Yoram Dinstein) 은 “유엔 스스로를 구하자(Saving the U.N. from Itself)”는 구상을 내세워, 유엔의 타락을 폭로하고 내부 개혁을 촉구함으로써 결의 철회의 여론을 조성하려 했다. 이에 따라 1985년에는 각국 전·현직 지도자, 노벨상 수상자, 예술인 등 800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사무총장 페레스 데 쿠에야르에게 전달되었고, 뉴욕 유엔 본부에서는 “이스라엘, 시오니즘, 그리고 유엔” 회의가 열려 레이건 대통령, 모이니한, 커크패트릭 등이 유엔의 반이스라엘적 편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네타냐후는 결의 3379호를 “국제적으로 승인된 반유대주의의 허위이자 살해 면허”라고 규정했다. 이어 1986년 뉴욕대 로스쿨에서 열린 국제법학자회의는 유엔 문서에 드러난 반유대주의적 표현을 조사해, 결의 3379호가 유엔 헌장과 인권 규범에 위배된다고 결론지었다.
- Undermining the Validity of 3379 (결의안의 정당성 약화시키기)
1985년 이스라엘은 유엔 결의안 3379호를 즉각 철회시키는 대신, 그 정당성과 정치적 효력을 약화시키는 전략을 본격 추진했다. 우지 나르키스(Uzi Narkiss)는 외교부와 함께 결의안 찬성 또는 기권국들(라틴아메리카(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아프리카(자이르 등), 아시아(싱가포르, 필리핀 등)) 을 상대로 ‘공식 입장 철회’ 또는 ‘시오니즘 옹호 발언’을 이끌어내려 했다. 각국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와 대사관이 동원되어 로비를 벌였으나, 실제로는 단 한 나라에서도 공개적인 입장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몬 페레스 총리는 1985년 제40차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자기결정권과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라며 간접적으로 반박했지만, 외교적 성과는 미미했다. 이에 나르키스는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 정치·사회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시오니즘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인식 제고에 나섰다.
CHAPTER VII — INVIGORATING THE CAMPAIGN
(제7장: 운동의 재활성화)
미국 의회가 공식적으로 결의안을 거부하며 다른 민주국가들에 동참을 요청했지만, 실제로 응답한 나라는 호주 한 곳뿐이었다. 이에 우지 나르키스(WZO)는 대응 전략을 재정립해, 반시오니즘에 대한 투쟁을 단순한 유대인 명예 회복이 아닌 인종차별의 참된 의미와 인권, 그리고 유엔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국제적 가치투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경우 정치적 타격이 따를 수 있음을 인식시키고, 대중적 압력 형성을 강조했으며, 예루살렘과 뉴욕에 상설위원회를 설치해 장기적 대응 체계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세계유대인회의(WJC)는 이러한 방향에 공감하며 반유대주의·반시오니즘에 대한 국제 협력 강화를 결의했지만, 상설기구 설치는 채택되지 않은 채 캠페인의 동력 강화를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 Project CASAZ (CASAZ 프로젝트)
1986년 출범한 프로젝트 카사즈(Project CASAZ(Campaign Against Anti-Semitism and Anti-Zionism)) 이스라엘과 국제 유대인 단체들이 조직한 체계적 캠페인으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모델을 참고해 국가·지역별 위원회와 중앙 데이터베이스를 갖춘 네트워크로 구상되었다. 실행을 맡은 국제유대법률가협회(IAJJL)와 미국 변호사 프랜시스 번스타인은 이를 지역 중심의 풀뿌리 운동으로 발전시켜, 각 회당과 유대인 단체에 반시오니즘 대응 지침을 제공하고, 1987년에는 ‘반시오니즘 주간’을 통해 전국적인 설교·엽서 캠페인을 전개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판사 하다사 벤 이토의 주도로 법조인 중심의 위원회가 결성되어 국제적 연대가 강화되었고, CASAZ는 미국 내 여론을 ‘결의 철회’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CASAZ의 적극적인 행동은 이스라엘 외교부의 신중론과 종종 충돌했다. 커크패트릭과 일부 단체들이 매년 결의 철회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외교부는 실패 시 역효과를 우려했다. 또 CASAZ가 일본·멕시코·나이지리아 등 8개국 UN대표부에 대량 서한을 보내자 “시기상조이자 외교적 부담”이라는 이유로 제동이 걸렸다. 이에 네타냐후 대사는 “우선 우호적인 민주국가 중심으로 압박해야 한다”며 조율에 나섰다. 한편 벤 이토는 반시오니즘을 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연극 〈Perdition〉의 명예훼손 논란에서 소송을 제기해 일부 내용을 삭제시키는 등 상징적 성과를 거두었다.
- The Israel–Europe Socialist Dialogue (이스라엘–유럽 사회주의자 대화)
이스라엘-유럽 사회주의 대화(Israel-Europe Socialist Dialogue) 는 1985년 예히엘 레켓(Yehiel Leket)이 제안한 구상으로, 유럽의 젊은 사회주의 정치인들에게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재조명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그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의장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와 이스라엘 전 외무장관 아바 에반(Abba Eban)의 후원을 받아 1986년 9월 파리에서 첫 회의를 개최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본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을 주제로 열린 이 회의에는 12개국 60여 명의 사회당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참가자의 40%는 30~40대의 신세대 정치인들이었다. 레켓은 많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식민 점령국으로 오해하거나, UN의 ‘시오니즘=인종차별’ 결의안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 대화가 그러한 왜곡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브란트는 기조연설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후,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을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전환한 개인적 경험을 회고하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원칙 — 이스라엘의 존재권 보장과 팔레스타인인의 자결권 간의 균형 — 을 강조했다. 에반은 시오니즘이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민족적 자유·민주주의·합리주의·사회주의의 결합체임을 설명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를 위협하는 종교근본주의와 극단주의의 대두를 경계했다. 토론은 매우 치열했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이스라엘 노동당의 ‘요르단-팔레스타인 연합국가안’에 공감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1987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도 사회당 대표들이 적극 참여했고, 브란트는 반유대주의에 맞선 연대와 중동 평화 노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속된 대화는 결국 유럽의회가 3379호 결의안을 비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 A Masterpiece from Australia (호주의 기여)
1985년, 호주 시온주의 연맹(ZFA) 의장 마크 리블러는 유엔 결의안 철회를 위한 전 세계적 캠페인에 호주가 적극 동참하도록 추진했다. 그는 단순한 청원서 서명에 그치지 않고, 총리·야당대표·전 총리·종교 및 학계 지도자들에게 지지 서한을 보내 호주 사회 전반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친팔레스타인 성향으로 알려졌던 외무장관 빌 헤이든이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 아니다”라며 협력을 약속한 것은 전환점이 되었다. 리블러는 미국 의회의 사례를 참고해 호주 의회가 공동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설득했고, 헤이든은 실무 지원과 정치적 조율을 주도했다.
그 결과 1986년 4월, 총리 밥 호크와 헤이든의 주도로 “유엔 결의안 3379호는 사실을 왜곡하고 평화를 저해하는 문서”라는 내용의 결의안이 호주 의회의 양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호크는 시오니즘을 인종차별과 동일시하는 것은 “진실과 관용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는 단순히 유대인의 문제가 아니라 유엔의 도덕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국제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호주의 이 결의안은 ‘모범적 사례(modele du genre)’로 평가되었고, 리블러와 헤이든은 시오니즘 옹호와 반유대주의 대응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 Europe Disappoints (유럽의 실망스러운 대응)
유럽에서는 미국 의회(1985년 7월)나 호주 의회의 사례를 본떠, 유엔 결의안 3379호(“시오니즘=인종차별”)을 비판하거나 철회를 촉구하는 의회 결의안을 추진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무산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84년 제네바 IPU 회의에서의 반시오니즘 결의에 대응하려는 사회당 의원들의 제안으로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부흥운동”이라는 취지의 결의안이 작성되었으나, 결국 표결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재시도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미온적 태도와 정치적 부담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의회 규정상 미국식 선언적 결의가 불가능했고, 단지 의원 개인의 서명운동에 그쳤다. 영국에서는 1985년 대처 수상의 호의적 답신과 초당적 지지 약속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 결의가 아닌 하원의 ‘조기동의안(EDM)’ 수준의 상징적 제안에 머물렀다. 그마저도 실질적 영향력이 없어, 의원들 사이에서도 의미 없는 절차로 여겨졌다.
프랑스에서도 여러 회의와 토론회에서 반시오니즘 비판 여론이 조성되었지만, 정부는 “결의안 3379호는 이미 실효적 영향이 없으며, 재논의는 오히려 갈등을 재점화할 위험이 있다”며 새로운 조치를 거부했다. 프랑스 사회당 정부와 의회 지도자들이 몇 차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개선과 연계해 ‘적절한 시기’에 재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실질적 행동은 없었다.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등도 유사한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결국 유럽 전체에서 공식적으로 결의안을 채택한 사례는 거의 없었고, 1987년 9월 유럽의회가 채택한 결의안만이 상징적 조치로 남았다. 그러나 이 결의안도 반유대주의나 결의안 철회 요구를 명시하지 않은 채, 단지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 아니며, 중동의 평화를 위해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유럽의 대응은 호주나 미국의 명확한 철회 촉구 결의안에 비해 미약하고 모호했다.
- Hope from Latin America (라틴아메리카의 희망)
1980년대 중후반 라틴아메리카는 철회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민주화와 인권 담론이 확산되던 시기에, 우루과이·페루·베네수엘라·에콰도르·아르헨티나 등은 결의안을 규탄하거나 철회를 공식 요구하는 의회 결의안을 잇달아 채택했다. 특히 우루과이의 라카예 상원의원과 페루의 로카 의원 등은 결의안이 유엔 창립 정신과 국제인권규범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는 냉전 후반기 반제국주의·친아랍 노선이 약화되고, 민주주의와 국제규범 복원을 외교적 정체성으로 내세우려는 지역 정치 흐름과 맞물려 있었다. 여기에 세계유대인회의(WJC)와 라틴아메리카 시온주의협의회(COSLA) 등 유대인 공동체의 활발한 외교·로비 활동이 더해지며,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민족자결의 표현”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었다
CHAPTER VIII — THE U.S. LEADERSHIP
(제8장: 미국의 지도적 역할)
미국에서는 1984년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이 고조되었고, 의회와 행정부가 입장을 분명히 하게 되었지만 실제 행동에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1986년 12월 미(美) 유엔대사 버논 월터스가 3379호의 부당성을 강하게 규정한 서한을 총회 문서로 회람시키며 미국의 공식 입장을 재천명했으나, 구체적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무시·절차적 봉쇄·정당성 약화 노력·전면적 폐기 등). 그런 가운데 198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학술·정책 콘퍼런스에서 라빈은 유엔 자체에 대한 회의적 비판을 통해 ‘UN에 기대기보다 자유민주국들이 자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우지 나르키스와 베냐민 네타냐후는 결의 철회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미국 내 여론 형성과 고위급 토론은 결의의 도덕적·정치적 문제를 분명히 드러냈으나, 실질적 폐기(annulment)는 합의·타이밍·전략의 문제로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었다.
- Remaining Low on Israel’s Agenda (낮은 우선순위)
1987년 1월, 예루살렘 외무부는 법률 자문관과 당시 유엔주재 대사였던 베냐민 네타냐후의 논의를 거쳐 철회 가능성을 검토했다. 법률 자문관실의 리디아 추크룬은 유엔총회가 형식적으로 결의안을 “폐기”할 절차는 없지만, 새로운 결의가 기존 결의를 사실상 무효화할 수 있다고 분석하며, 1950년 프랑코 체제의 스페인을 재가입시킨 전례(“스페인 선례”)를 사례로 들었다. 그녀는 시오니즘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를 규탄하는 내용으로 우회 폐기안을 제시했으나, 실질적 효력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철회 결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보고서는 “총회 결의는 철회 불가능하다”는 유럽 국가들의 반론을 무너뜨리며 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케임브리지대 국제법 학자 엘리후 라우터팍트도 “문제는 법이 아니라 산술”이라며, 필요한 다수표를 확보할 수 있다면 철회는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외무부 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기드온 라파엘은 결의 3379호를 명시하지 않은 완곡한 대체안을 제안했지만,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실의 국장 우리 사비르(Uri Savir)는 “다수 지지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를 다시 들추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며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페레스는 당시 미·소 공동후원 중동평화회의 구상에 집중하고 있었고, 3379호 철회 추진이 아랍국과의 협상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둘째, 평화협상 진전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높여 결의안을 실질적으로 무력화(caduc)시킬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 Higher on U.S. Agenda (미국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
1980년대 후반, 이 문제는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미국의 정책 아젠다에서 더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 유대계 단체들의 지속적인 압력과 의회의 관심 덕분이었다. 백악관은 “결의안의 악영향을 줄이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철회 의지를 표명했고, 국무부 인권차관 리처드 시프터는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의 표만 바꾸면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특히 상원의원 다니엘 모이니핸은 호주 의회의 결의안을 본떠 1987년 미국 의회 결의를 추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각국 민주국가 의회들도 같은 결의를 채택해 유엔에 압력을 가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이 호응하지 않아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결의 철회를 유엔의 도덕성과 신뢰 회복의 문제로 인식했다. 리처드 윌리엄슨 차관보는 아프리카 비중동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외교 전략을 제시하며, 부시 대통령의 직접 개입과 의회의 초당적 지지를 강조했다. 1989년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도 아랍 국가들에게 “결의 3379호에서 후퇴하라”고 요구했으나, 당시 미국은 중동 평화협상 진전을 더 중요한 외교 목표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철회 추진은 미뤘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결의 철회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평화 프로세스와의 균형을 이유로 실제 행동에는 나서지 않은 것이다.
- A Convenient Grievance (‘편리한 불만’으로서의 결의안)
1989년 중반까지 외무부는 소극적 태도를 유지하며 의회 결의 통과는 장려했지만, 실제 유엔총회에서 결의 철회를 추진할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1989년 8월, 외무부의 데이비드 사손(David Sasson)이 제출한 보고서 검토 이후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그는 “유엔총회에 직접 철회안을 제출하든, 아니면 이 사안을 꾸준히 제기하든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제시했는데, 보고서 내용과 해외공관들의 부정적 반응을 고려해 ‘철회 시도보다는 지속적 여론전’을 택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반면 예헤즈켈 바르네아(Yehezkel Barnea)는 “비록 통과 가능성은 낮지만, 이스라엘은 매년 결의 철회를 제기해 ‘진정한 우방’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무부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캐나다, 프랑스 등 10개국을 주요 대상국으로 선정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청원이나 언론 기고, 각국 외교장관의 유엔 발언 유도 등을 병행하기로 했다.
이후 베냐민 네타냐후가 이 사안을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아랍 국가들에 “시오니즘=인종차별 결의에서 후퇴하라”고 촉구한 것을 계기로, 이 결의를 평화협상에서 유엔 개입을 차단하고 ‘직접 협상’을 유도할 수 있는 정치적 카드로 보았다. 미 의회도 이에 동조해 1989년 「국무부 승인법안」(State Department Authorization Bill)에 “3379호는 유엔총회의 신뢰를 훼손했으며, 철회 전까지 유엔은 중동평화 회담의 적절한 포럼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우지 나르키스(Uzi Narkiss)는 이에 맞춰 “지금이 국제 여건상 철회를 추진할 적기”라며 외무부에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바티칸의 「인종주의와 교회」 문서나 소련 외교관의 온건 발언을 긍정적 신호로 언급했지만, 사손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외무부는 “3379호는 이스라엘이 평화협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편리한 불만(convenient grievance)’일 뿐”이라며 신중론을 폈고, 대신 세계시온주의기구(WZO)가 민간 차원에서 이 운동을 계속 전개하기로 했다.
- Active U.S. Involvement (미국의 적극적 개입)
1989년 말부터 미국은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평화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유도하고, 동시에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과거의 반이스라엘 정책을 진정으로 버렸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댄 퀘일 부통령은 1989년 12월 연설에서 이 결의를 “언어의 왜곡이자 유엔의 도덕적 권위를 훼손한 수치”라 비판하며, 소련과 함께 새 결의를 공동발의해 3379호를 무효화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즉각 거절했고, 서유럽 국가들 또한 “중동 평화 진전 없이는 철회 불가”라는 신중론을 폈다.
이후 미국은 단순 지지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강화했다. 모리스 에이브럼 대사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철회를 요구했고, 모이니핸·보슈위츠 의원이 주도한 상원 공동결의(S.J. Res. 246)는 1990년 6월 부시 대통령의 승인으로 이어졌다. 부시는 해당 결의를 “유엔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로 규정하면서도, 중동 평화를 위한 영토-평화 원칙(Res. 242·338)과 연결지어 언급해 양측의 상호 양보를 촉구했다. 미국의 이 적극적 개입은 유럽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쳐, EC 트로이카 대표단이 “시오니즘=인종차별 결의는 스캔들”이라 규정하고 공식 철회 지지를 표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 The Decision to Postpone (연기 결정)
1990년 중반, 부시 대통령이 유엔 결의 3379호(‘시오니즘=인종차별’) 철회를 공식 지지했지만, 그 직후 호주 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22개국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 결과는 냉담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1975년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고, 호주 외무장관 가레스 에번스는 “3379호 철회는 선의의 제스처가 될 수 있지만, 유엔 회원국들의 지지가 아직 미약하다”고 밝혔다. 동시에 엘리 비젤이 반유대주의 규탄 회의를 주도하면서 국제적 인사들의 공동성명을 통해 3379호 철회를 촉구하려 했으나, 이 구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부시 대통령의 지지 선언과 더불어 걸프전 발발(이라크 쿠웨이트 침공)이 유엔 내 역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평가했다. 존 볼턴 미 국무부 차관보는 당시 찬성 60개국, 반대 60개국, 기권 40개국 수준의 팽팽한 상황을 보고했지만, 이라크 제재를 위한 아랍권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결국 철회 추진을 연기했다. 이스라엘 대사 요하난 빈은 “이번 결정은 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판단”이라며, “지금은 결의안이 반아랍 행위로 오해받을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상원의원 다니엘 모이니핸은 “소련이 이미 입장을 바꾼 지금이야말로 결의 철회의 기회였다”며, 걸프위기를 이유로 원칙을 미루는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철회 연기는 반유대주의 확산을 우려하던 이들에게도 실망을 안겼다. 1975년 결의 당시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경고했던 대로, ‘시오니즘=인종차별’ 결의는 이후 반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로 작용했다. 미국유대인위원회(AJC)는 1990년 보고서에서 이 결의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반유대주의가 아닌 반시오니즘’으로 포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다시 사회적으로 수치스러운 행위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유엔 결의 3379호의 철회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 The Repeal (결의안 철회)
1991년 초, 걸프전 승리와 냉전 종식 이후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유엔총회에서 결의 3379호의 철회(repeal)를 추진하기로 했다. 유엔 사무총장 페레스 데 쿠에야르가 시오니즘을 “민족의 자기결정 운동”이라 언급하고,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이 반유대주의 발언을 공식 규탄하는 등 국제사회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소련 역시 반시오니즘 노선을 철회하고 이스라엘과 관계 복원을 모색하면서, 미‧소 공동 주도의 철회 추진 결의안까지 상정되었다.
그러나 영국·호주 등은 여전히 표결 실패를 우려하며 “성급한 시도는 역효과”라며 연기를 주장했고, 미국 내에서도 걸프전 이후 중동 평화회의 준비와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9월 23일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사상 처음으로 공식 철회를 촉구했다. 그의 발언은 미국 내 여론을 진정시키고 소련·유럽공동체·중국 등 다수국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아랍국가들은 여전히 “지금은 평화협상에 악영향을 줄 시기”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이집트는 아랍권 지도국으로서 반대 여론을 주도했다.
미국은 이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가하며 “철회 반대 시 미국과의 관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고, 그 결과 제3세계 국가 다수가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1991년 12월 16일, 유엔총회는 찬성 111대 반대 25, 기권 13으로 3379호를 공식 철회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진실이 거짓을 이긴 승리”로 평가했고, 미국은 “유엔이 냉전기의 도덕적 왜곡을 바로잡은 역사적 전환점”이라 선언했다. 저자는 이러한 성과가 국제 질서 변화뿐 아니라 미국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외교적 주도 덕분이라고 결론짓는다.
CONCLUSION
이 철회 사례는 형식적으로 보면 완전히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1950년 ‘스페인 선례(Spain precedent)’로 알려진 결의 368(V)가 1948년의 스페인 유엔 가입 관련 권고(결의 39(I))를 철회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의미 면에서 보면 이번 3379호 철회는 완전히 달랐다. 스페인 결의의 철회는 특정 국가의 가입 조건을 다룬 ‘행정적’ 조치였던 반면, 3379호는 한 민족운동과 그 사상 자체를 부정하는 ‘도덕적 낙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철회는 실질적으로 전례 없는 조치였다.
- 국제기구는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철회’할 권한을 어디까지 가져야 하는가? (institutional memory 문제)
- 결의 3379호 철회가 ‘보편적 정의의 회복’이었다면, 왜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유엔 내에서 해결되지 못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