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OECD ‘유해한 조세 경쟁(Harmful Tax Competition)’ 프로젝트와 구성주의

Webb, Michael C. 2004. “Defining the Boundaries of Legitimate State Practice: Norms, Transnational Actors and the OECD's Project on Harmful Tax Competition.”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11(4):787-827.
Oct 21, 2025
OECD ‘유해한 조세 경쟁(Harmful Tax Competition)’ 프로젝트와 구성주의

“정당성은 누가 만든 규범인가?”Webb은 조세피난처와 다국적 기업이 OECD를 움직였다고 하지만, 그 설득력 자체가 결국 경제적 영향력과 지식 권력 덕분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담론 권력”이 실제로 물질적 기반을 가진 권력의 한 형태로 보이는 것 아닌가? “구성주의는 경제 현실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논문은 다국적 기업의 세계화가 국가의 조세 주권과 정책 역량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분석하며, OECD의 ‘유해한 조세 경쟁(Harmful Tax Competition, HTC)’ 프로젝트를 사례로 삼아, 국제 협력이 정말로 국가의 역량을 강화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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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국제정치경제 이론은, 국가들이 협력하면 공통의 규칙을 통해 다국적 기업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고, 그 결과 국가의 조세 권한이 강화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기능주의적 낙관론이 실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조세는 국가 주권의 핵심 영역이지만, 자본 이동성이 높아지고 조세피난처와 역외 금융센터가 확산되면서, 각국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세율을 낮추는 조세 경쟁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은 단순히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지 못한 결과’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각국은 세금을 얼마나 걷을지, 자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얼마나 장려할지 등 서로 다른 정책 선호를 가지고 있으며, 다국적 기업의 구조적 힘 (즉, 이익을 찾아 언제든지 자본을 이동시킬 수 있는 능력) 이 국가의 자율성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OECD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8년 「Harmful Tax Competition: An Emerging Global Issue」 보고서를 발간하고 조세피난처 규제를 추진했으나, 협의 과정에서 다국적 기업과 세무서비스 산업 같은 초국적 행위자들이 적극 개입했다. 이들은 “세율 인하는 시장경쟁의 일부”라거나 “합법적인 절세는 범죄가 아니다”라는 자유주의 경제 규범을 내세워 OECD의 규제 강도를 약화시켰고, 결국 OECD는 조세정책 자체를 다루기보다 세무당국 간 정보교환 같은 기술적 협력에 머물렀다.

따라서 저자는 국제 협력이 항상 국가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협상 테이블에 앉고 어떤 규범이 작동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국가의 조세 주권을 약화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즉, 국제 제도는 단순한 국가 간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규범(예: 자유시장 원칙)과 초국적 행위자의 담론적 영향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정치적 산물이며, 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국제 협력의 효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 주장이다.

1. 국제 협상에서의 규범과 초국적 행위자

규범과 국제 협력의 관계: ‘무엇이 옳은가’를 둘러싼 정치

이 부분의 출발점은 사회구성주의적 시각이다. 전통적 국제정치 이론은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합리적 행위자라고 전제하지만, 사회구성주의는 “국가가 무엇을 ‘이익’으로 보는가” 자체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규범과 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즉, 정책은 단순히 힘이나 이익의 산물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appropriateness)”에 대한 논쟁의 결과다. OECD의 ‘유해한 조세 경쟁(HTC)’ 논의도 이런 규범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OECD 회원국들은 세수 확보, 투자 유치, 행정 효율성, 자국 기업 보호라는 상충된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고, 이때 “시장 친화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책이 현대적이고 올바르다”는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했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논증의 논리(logic of arguing)’는 바로 이런 점을 설명한다 ( 정책 결정은 단순한 힘의 대결이 아니라, 누가 더 설득력 있는 규범적 주장을 펼치는가에 의해 결정되며, 때로는 약한 행위자도 널리 공유된 규범의 언어를 활용해 강한 국가의 입장을 흔들 수 있다.)

OECD의 제도적 특성과 규범 확산 방식

OECD는 국제 조세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정부 간 기구이지만, WTO처럼 강제력이 있는 제도는 아니다. 대신 “선진적이고 효율적인 국가라면 이런 정책을 써야 한다”는 식으로, 회원국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규범을 만들어내는 기관이다. OECD의 사무국(특히 조세위원회, CFA)은 경제학자와 세무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원국을 상호평가(peer review)와 사회화(socialization)를 통해 일정한 규범적 틀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구조 속에서 OECD는 “시장 효율성”과 “세제 경쟁의 정당성”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경제 담론을 확산시켰고, 한 연구자는 이를 “자유화의 가치를 전파하는 선교사”라고 표현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규범이 ‘국제표준’으로 받아들여지면 강제력은 없어도 사실상 정책의 방향을 구속하는 힘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조차도 OECD의 이전가격(transfer pricing) 지침을 자국 세제에 반영했다. 따라서 OECD의 영향력은 법적 구속력이 아니라 규범적 권위에 기반하며, “무엇이 적절한 국가행동인가”를 정의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초국적 행위자의 권력, 불균형한 참여, 그리고 조세 담론의 편향

하지만 이런 ‘규범 형성 과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국제 조세 논의에는 다국적 기업(TNCs), 회계·법률회사, 국제상공회의소(ICC), 경제산업자문위원회(BIAC) 등 초국적 민간 행위자(TNAs)들이 깊숙이 관여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OECD 회의와 국제 포럼에 상시 참여하며, “세율 인하는 합법적 경쟁” “절세는 효율적 경영”이라는 담론을 주도했다. BIAC은 각국 기업협회의 의견을 모아 OECD에 전달하며, 국제 조세 경쟁 규제에 반대하는 통일된 기업 입장을 만들어냈다. 반면, 조세피난처나 탈세를 비판하는 진보적 NGO들은 OECD 협의에서 거의 배제되었고, 전문 용어나 제도 논리에 접근하기 어려워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OECD의 논의장은 기업 이해관계가 반영된 ‘규범적 합의의 장’이 되었고, 국가와 민간의 구분조차 모호해졌다. 이러한 불균형은 자유시장 규범을 더욱 강화시켜, ‘세금을 줄이는 행위’가 비판받기보다는 오히려 합리적이고 정당한 선택으로 정착되는 결과를 낳았다.

2. OECD ‘유해한 조세 경쟁(Harmful Tax Competition)’ 프로젝트의 기원

OECD의 ‘유해한 조세 경쟁(Harmful Tax Competition, HTC)’ 프로젝트는 세수 감소라는 현실적 위기보다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예견한 ‘미래의 위협’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었다. 1980~90년대 OECD 국가들의 세수는 실제로 감소하지 않았지만, 경제학자들은 자본 이동성이 높아진 세계에서 높은 세율은 자본의 탈출을 부를 것이라 경고했고, OECD는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 자본 과세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아일랜드가 10% 법인세로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유럽 각국이 다국적 기업 본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특별세제를 도입하자, 고세율 국가들은 기업이 세금이 낮은 나라로 이전해 세 부담이 노동자에게 전가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각국의 세제 규제는 복잡하고 예외가 많아 실질적 회피를 막지 못했고, “우리만 규제하면 기업이 다른 나라로 간다”는 집합행동 문제로 인해 강력한 조치가 불가능했다. 더구나 다국적 기업과 세무서비스 산업의 로비는 “규제가 경쟁력을 해친다”는 논리를 확산시켜 정부의 손발을 묶었고, ‘세금은 주권의 상징’이라는 오랜 규범도 강대국이 조세피난처의 세제에 개입하는 것을 제약했다. 미국과 영국은 오히려 역외금융센터가 자본 자유화와 금융 중심지로서의 이익을 강화한다고 보았고, 영국은 해외 영토의 조세피난처 육성을 통해 런던 금융시장의 위상을 유지하려 했다.

. 그 이유는 다국적 기업과 세무서비스 산업의 강력한 로비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국제적 절세(세금 설계) 자유를 침해하는 규제에 반대했고, 특히 OECD 각국 재무부나 재정당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세금이 국가 주권의 핵심이라는 전통적 규범도, 다른 나라의 세제에 간섭하는 것을 “주권 침해”로 간주하게 만들어 조세피난처 규제에 소극적인 분위기를 낳았다. 이 틈을 이용해 조세피난처들은 주권의 상업화(commercialization of sovereignty)’, 즉 세법 제정권 자체를 국제적 상품처럼 팔아 기업을 유치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편 OECD 내부에서도 조세피난처뿐 아니라 회원국 간의 세율 경쟁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OECD 재정위원회(CFA)는 “개방경제에서 자본 과세는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하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논리에 영향을 받아, 시장의 자율에 맡기면 세율 인하 경쟁이 심화되어 결국 모든 나라의 세수가 줄 것이라 경고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1990년대 초 보고서 「Taxing Profits in a Global Economy」에서 구체화되었고, 세율 차이 자체가 자본의 효율적 이동을 방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1996년 OECD 각료회의와 G7 리옹 정상회의에서*“유해한 조세 경쟁을 억제할 대책 마련”이 공식 의제로 채택되었으며, 이에 따라 약 10개국의 재무부 및 국세청 고위 관료들이 참여하는 ‘유해한 조세 경쟁 특별세션’(Special Sessions)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정한 경쟁과 유해한 경쟁을 구분하는 기준’, 그리고 ‘국가별·공동 대응 방안’ 마련을 목표로 논의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이 이후 OECD 조세정책의 핵심 전환점이 되었다.

3. 규범적 합의 형성: 1998년 보고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복지 재정이 줄고 불평등이 커질 것을 우려해 세율을 일정하게 조화시키자고 주장했고(세율 조화(harmonization)), 반대로 미국과 영국은 세율 인하는 시장 경쟁의 일부라고 보며 조세피난처의 불투명성만 규제하자는 입장이었다. 1998년 OECD 보고서는 이런 충돌 속에서 “무엇이 유해한 경쟁인가”라는 규범적 기준부터 세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보고서는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영향 아래, 세금을 낮추는 경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세율 경쟁은 “세제를 단순화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평가했다. 대신 “유해한 조세 경쟁”으로 규정된 것은 세금 자체가 아니라 특정 기업이나 산업만을 위한 특혜 세제, 세법의 불투명성, 국가 간 세무 정보 교환의 부재 등이었다. OECD는 이런 기준을 ‘유해한 특혜 세제 제도(HPTR)’로 정의하며, 일반적인 세율 인하는 “합법적 경쟁”으로 인정했다. 예컨대 아일랜드가 제조업에만 적용하던 10% 세율을 전체 산업에 12.5%로 확대하자, 오히려 더 강한 세금 경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OECD는 이를 “비유해적 경쟁”으로 분류했다.

OECD는 조세피난처를 “실질적 경제활동 없이 외국인의 세금 회피를 허용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이를 판별하는 세 가지 기준 (정보교환 부족, 불투명성, 실질 활동의 결여) 을 제시했다. 하지만 세율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정보 공개(투명성)”만 강조하는 접근은 실질적인 규제 효과가 약했다. 또한 제조업 투자 유치를 위한 세제 혜택처럼 정치적 반발이 큰 영역은 협력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1998년 보고서는 “세율 인하 경쟁을 막기보다는, 최소한 투명하게 하자”는 정도의 원칙만 남기게 되었다. 이는 다국적 기업이 세금 회피를 위해 가상의 주소지(fictional residence) 를 조세피난처에 두는 관행을 비판했지만, 그런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OECD의 ‘유해한 조세 경쟁’ 프로젝트는 시장 경쟁을 인정한 자유주의적 타협, 그리고 기업과 조세피난처 모두가 여전히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불완전한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OECD는 강제 규제나 제재 대신 ‘자발적 지침(voluntary guidelines)’을 만들고, 회원국들이 서로 압박을 주는 ‘동료 압력(peer pressure)’ 방식으로만 대응하기로 했다. 이를 담당할 새로운 조직으로 ‘유해한 조세관행 포럼(Forum on Harmful Tax Practices)’ 도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런 ‘권고 수준의 규범’은 실질적 강제력이 없었고, 국가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실행 효과는 크지 않았다. 미국은 본래 조세피난처를 상대로 ‘이름 공개하고 망신 주기(naming and shaming)’ 전략을 쓰려 했지만, 같은 OECD 회원국을 비판하는 건 “보기 좋지 않다(unseemly)”며 적용을 꺼렸다. 다른 나라들도 자기 나라의 특혜 세제를 없애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제재나 강제조항을 넣는 데 반대했다. 그래도 OECD는 ‘조세피난처 명단’을 만들겠다고 예고했다. 1999년까지 어떤 나라들이 유해한 조세피난처로 분류될지를 발표하고, 이를 근거로 회원국들이 공동 대응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한 것인데, 실제로는 이 리스트도 상징적 의미에 그쳤고, 구체적 조치가 따르진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기업과 조세서비스 산업 같은 초국적 행위자들(TNCs, accounting firms)은 전혀 공식 협의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부들이 “기업은 어차피 반대할 테니 부르지 말자”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해한 조세 경쟁’을 줄이자는 국제적 공감대 자체가 기업 사회에서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스위스와 룩셈부르크는 금융산업 중심의 규제가 자국에 불리하다며 반대표 대신 기권과 유보적 입장문을 냈고, “우리는 이 보고서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요컨대 이 보고서는 좌파가 기대했던 “국제 협력을 통한 법인세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적 논리에 기반한 ‘시장친화적 규범 형성’ 으로 결론 났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OECD의 협력은 세금을 올리는 협력이 아니라, 세금 경쟁을 ‘조금 더 공정하게’ 허용하는 협력이었다.

4. 1998–2000: 합의를 실질화하기? (Making the Consensus Concrete?)

2000년까지의 논의는 사실상 후퇴로 귀결되었다. 회원국들은 자국의 특혜 세제를 ‘유해하다’고 인정하기를 꺼렸고, 제조업과 지주회사 제도는 규제 대상에서 빠졌다. 반면 조세피난처에 대한 공조는 빠르게 추진되어 41개 지역이 지정되었지만, 피난처들은 “OECD가 조세주권을 침해한다” “스위스·룩셈부르크에는 관대하다”는 이중잣대(double standard) 논리로 반격했다. 이들은 “공정한 경쟁의 장(level playing field)”과 “경제발전권”을 내세워 자유주의 경제 담론을 역이용했고, 일부 OECD 외교부와 세무서비스 산업, 다국적 기업이 이에 공감했다. OECD는 강제 제재 대신 ‘자발적 약속서(Advance Commitment Letters)’를 도입해 협력적인 피난처를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원래 요구했던 “특혜 세제 폐지”를 “내·외국 기업 간 비차별 보장” 수준으로 완화했다. 이는 자유주의 경제의 비차별 원칙에 부합하면서도, 피난처의 규범적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한 정치적 후퇴였다.

이와 동시에 다국적 기업과 BIAC(기업산업자문위원회)는 OECD의 세제 개혁을 “시장 자유를 침해하는 담합”으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OECD는 제도의 비구속적 성격상 강력한 민간 반대에 취약했기 때문에, 기업들의 자유주의 논리를 수용하며 타협했다. 결국 2000년경 OECD는 ‘세금 경쟁을 억제’가 아니라 ‘세금 경쟁을 촉진(Promoting Tax Competition)’하는 방향으로 논조를 바꾸고, 불법 탈세만을 문제 삼으며 합법적 절세(tax planning)는 정당화했다. 이렇게 ‘유해한 조세 경쟁’ 프로젝트는 처음의 개혁적 목표(다국적 기업의 조세 회피와 조세피난처의 제도적 폐해를 바로잡겠다는 계획) 에서 멀어져, “투명성”과 “비차별”이라는 자유주의적 원칙만 남긴 온건한 합의로 수렴했다. 이는 국가의 조세 주권이 여전히 강력하지만, 동시에 초국적 행위자와 규범적 담론의 압력에 따라 그 한계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5. 부시 행정부의 ‘유해한 조세 경쟁’(HTC) 프로젝트에 대한 도전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으로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 내에서는 ‘자유와 번영을 위한 센터(CFP)’와 헤리티지재단 등 우파 단체들이 “세금 경쟁은 시장 효율성을 높이고 정부 낭비를 줄인다”며 프로젝트를 “세금 인상 카르텔”로 규정하고 강력히 반대했다. 재무장관 폴 오닐(Paul O’Neill)은 이들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해 “미국은 어떤 나라에도 세율이나 조세제도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OECD의 조세 조화를 주권 침해로 비판했다. 오닐은 오직 불법적 ‘탈세(criminal tax evasion)’에 한해서만 제한적 정보교환을 허용했으며, 개인의 금융 ‘프라이버시’ 보호를 강조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OECD의 제재·조화 노력을 철회시켰고, 다른 회원국들은 이를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로 비판했다.

미국의 정책 전환은 OECD 프로젝트의 실질적 약화를 초래했다. 2001년 보고서에서 OECD는 더 이상 세율 조화나 특혜세제(HPTR) 폐지를 목표로 하지 않고, “세금 경쟁을 촉진하되, 불법 탈세만 막자”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회원국들은 스스로 유해 가능성이 있는 제도를 평가·수정하도록 했고, 2004년까지 47개 제도 중 18개 폐지, 14개 수정, 13개 ‘무해’ 판정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무해’ 판단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고, 실질적 세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OECD는 조세피난처에 대해서도 기존의 “사업 실체 없는 기업에 대한 세금 혜택 금지” 요구를 철회하고, 단순히 “요청 시 세금 정보 제공”만 요구했다. 대부분의 피난처들은 ‘비협력국’으로 낙인찍히는 평판 손상을 피하기 위해 협력 의사를 밝혔고, OECD는 이들을 더 이상 ‘조세피난처’가 아닌 ‘참여 파트너(participating partners)’라 불렀다. 그러나 스위스·룩셈부르크·오스트리아·벨기에는 여전히 은행비밀을 유지했고, OECD는 제재하지 못했다. 결국 부시 행정부의 ‘시장 자유’ 이념과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은 OECD의 조세 개혁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켜, 남은 것은 자발적 정보공유와 명목상 투명성뿐이었다.

결론

OECD의 ‘유해한 조세 경쟁(HTC)’ 논의는 조세피난처 확산과 법인세 수입 감소 우려에서 출발했지만, “어떤 조세정책이 정당한가”를 결정할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논의의 핵심은 ‘정당한 세금 경쟁’과 ‘유해한 세금 경쟁’의 경계 설정이었다. 1996~2000년 협상 과정에서 OECD는 자유주의적 경제 이념을 공통의 규범으로 삼아, 세율 인하 경쟁은 효율성을 높이는 ‘좋은 경쟁’으로, 특정 기업에만 혜택을 주는 불투명한 세제나 비밀 유지 제도는 ‘나쁜 경쟁’으로 규정했다. 반면 복지 재정 약화를 우려한 사회민주주의적 시각은 배제되었고, OECD 내부 세무관료들은 다국적 기업과 세무업계의 비판(“세금 인상 카르텔”)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논리를 강화했다. 그러나 조세는 국가 주권의 핵심이라는 ‘재정주권(fiscal sovereignty)’ 규범도 강하게 작용해, OECD 회원국들은 자율적 기준과 동료 압박(peer pressure)에 의존했다. 이러한 주권 규범은 스위스·룩셈부르크 같은 OECD 내부 조세피난처에는 느슨하게 적용되면서 ‘이중기준(double standard)’ 비판을 불러왔다.

비록 OECD가 비밀 유지·불투명성 같은 ‘비자유주의적 관행’에 대한 정당한 비판 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국적 기업과 조세피난처는 ‘공정성’과 ‘국가주권’을 내세워 일부 양보를 이끌어냈다. 특히 BIAC(산업자문위원회*와 글로벌 세무 서비스 산업 같은 초국적 행위자(TNAs)가 이 논의에 깊이 개입하며, ‘합법적 세금 절감’의 범위를 넓히고 일반적 세금 경쟁을 오히려 장려하는 방향으로 규범을 재정의했다. 여기에 미국의 압도적 물질적 권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부시 행정부는 “투명성과 정보교환”만을 남기고 OECD의 원래 목표(조세피난처 규제)를 사실상 철회시켰다. 동시에 WTO와 EU가 조세 인센티브를 ‘무역보조금’으로 규정하는 등 국제경제 규범이 세제 문제로 확장되면서, OECD의 자유주의적 합의는 다시 도전을 받고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국제협력이 세계화에 따른 조세도전을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주권과 기업 자유를 강화해 협력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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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기존(실증주의·기능주의) 접근에 대한 비판

전통적인 조세협력 이론, 특히 기능주의·국가중심주의 모델(state-centric, functionalist model) 은 이렇게 가정한다.

“국제 협력은 국가들이 ‘공통의 물질적 이익(세수 확보, 탈세 방지 등)’을 인식하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 결과이다.”

하지만 OECD의 조세 협력은 세수 감소라는 객관적 위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경제이론과 담론에 의해 촉발되었음. 즉,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식과 담론적 구성’이 협력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이건 구성주의의 핵심 주장 “정치 현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이 공유하는 의미와 규범’을 통해 구성된다.” 와 정확히 맞닿아 있음

② 규범(norms)과 정당성(legitimacy)의 역할

구성주의는 “국제정치의 핵심 변수는 규범(norms)과 정당성(legitimacy)”이라고 봄. OECD 협력의 초점은 ‘무엇이 정당한 세금 경쟁인가?’ 즉, 정당성의 경계 정의(boundary of legitimacy) 였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 경제이념(competition, transparency, non-discrimination)이 규범적 기준으로 작동했고, 사회민주주의적 ‘재분배 정의’는 주변화됨. 결과적으로 OECD의 정책결과는 ‘이익의 산물’이 아니라 규범적 담론의 산물이었다는 것.

③ 초국적 행위자(TNAs)의 규범적 영향

구성주의는 “국제정치는 국가만의 영역이 아니라, 다양한 비국가 행위자들이 규범을 형성한다”고 강조함. 이 논문은 그걸 실증적으로 보여줌. 다국적 기업(TNCs), 회계·세무 서비스 산업, BIAC 같은 transnational actorsOECD 내부 규범 형성 과정에 개입. 이들이 “세금 회피는 합법적 기업행위”라는 규범을 설득력 있게 확산시켜, OECD의 ‘유해한 조세 경쟁’ 정의를 완화시킴. 즉, 물질적 권력은 없지만 규범적 정당화 능력(discursive power) 을 통해 결과를 바꾼 사례.

④ 구성주의적 결론

“국제협력의 결과는 물질적 이익의 함수가 아니라, 규범·담론·정당성의 상호작용 결과이다.” “누가 더 강한가보다, 누가 더 설득력 있는 ‘정당성의 언어’를 구사했는가가 협력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래서 이 논문은 구성주의가 국제정치경제(IPE)에서도 실질적 설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응용 사례임. 국제 조세정책이라는 매우 기술적 분야에서도, ‘규범적 설득’과 ‘담론의 힘’이 국가행동을 구성한다는 점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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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성은 누가 만든 규범인가?”Webb은 조세피난처와 다국적 기업이 OECD를 움직였다고 하지만, 그 설득력 자체가 결국 경제적 영향력과 지식 권력 덕분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담론 권력”이 실제로 물질적 기반을 가진 권력의 한 형태로 보이는 것 아닌가? “구성주의는 경제 현실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Webb의 분석에 따르면 규범 재생산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자본or 기술 권력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여전히 ‘규범의 사회적 구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권력에 의해 구성된 규범(constructed legitimacy)’으로 봐야하나?

Webb의 사례는 규범이 단순히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서 ‘권력적으로 구성(power-constructed)’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규범의 ‘사회성(sociality)’이 중요한 것은 알겠으나… 그 사회적 공간 자체가 어떻게 권력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이론화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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