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총회의 정치적 영향력과 절차 권력
Keohane, Robert O. 1967. “The Study of Political Influence in General Assembly.” International Organization 21(2):221-237.
유엔 총회를 연구할 때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 총회의 결과(결의안)에 초점을 두는 전통적 접근, 둘째, 투표 패턴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접근, 셋째, 이러한 결과와 패턴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과정 자체를 분석하는 접근이다. 그는 기존 연구들이 주로 첫째와 둘째 방법, 특히 투표 분석에 지나치게 집중해 왔다고 지적한다. 투표 데이터를 이용한 정교한 통계 분석은 국가 간의 연합 구도나 잠재적 협상 구조를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지만, 실제로 누가, 어떻게, 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투표 행태 연구는 결국 “새로운 형식주의”에 그칠 위험이 있다.
POLITICAL PROCESS AND POLITICAL INFLUENCE
정치적 과정과 정치적 영향력
유엔 총회(UNGA)의 ‘정치적 과정은 각국 대표단과 사무국 간의 상호작용, 즉 총회 결정을 만들어내는 실제 정치 행위로 정의한다. 그는 이를 본질적으로 “영향력을 둘러싼 경쟁(struggle for influence)”으로 보며, 여기서 영향력은 특정 국가를 통제하는 능력(control)이 아니라 결과(outcomes)에 미치는 효과(effect)로 측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누가 더 많은 위성국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누가 실제 결정을 형성하느냐”가 중요한 분석 대상이다.
그는 한 국가의 영향력을 측정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① 총회의 결정이 그 국가의 의도와 얼마나 일치하는가?
② 그 국가는 어떤 방식과 결과를 통해 그러한 결정을 변화시켰는가?
또한 이 질문에 따라 세 가지 형태의 영향력을 구분한다.
첫째, 회원국의 정책을 변화시켜 결과를 바꾸는 직접적 영향력이다. 이는 양자 혹은 다자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상호적 협상(compromise), 사안 간 교환(logrolling), 장기적 협력 패턴(mutual understanding)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만약 일방향적이라면 설득(persuasion), 약속(promises), 압박이나 위협(pressure, threats) 등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미국은 UNRWA 결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노골적인 위협 없이도 자국의 반대 입장을 밝힘으로써 아랍국들의 행동을 변화시켰다. 이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재정 기여, ‘blocking third’)이 결의안 형성 과정에 작용한 사례다.
둘째, 총회가 선택하게 될 ‘상황과 의제’를 변화시키는 간접적 영향력이다. 국가는 다른 회원국의 정책을 바꾸지 않더라도, 특정 의제를 제안하거나 절차적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모든 국가가 고정된 입장을 갖고 있더라도,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나 순서에 따라 최종 결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제를 주도하거나 타협안을 제시하고, 절차적 논점을 제기하는 대표단은 그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정책보다 정책이 적용되는 맥락(context)을 바꾸는 힘이다.
셋째, 총회의 제도적 구조(formal procedure)에서 비롯되는 형식적 영향력이다. 각 국가는 1/n의 표를 가지지만, 정치적 연합이 형성되면 ‘피벗(pivotal)’ 위치에 선 국가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보다 강력하지 않지만, 그 표가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에 양측으로부터 구애받으며, “중도적·유보적 태도” 자체가 협상 자산이 된다.
THE MEASUREMENT OF INFLUENCE
영향력의 측정
코헤인은 당시 유엔 총회 연구에서 국가의 영향력을 통계적으로 측정하려던 시도들, 예컨대 다수파와의 투표 일치율, ‘피벗 확률’(Shapley-Shubik 지수), 결의안 통과율(입법 효율성 지수) 등, 을 비판한다. 이런 방법들은 각국이 서로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투표한다고 가정하는 단순한 모형에 기초해 있어, 실제 정치적 상호작용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 결과 현실과 어긋난 왜곡된 평가, 즉 강대국이 영향력이 적게 나오고 중심적 위치의 소국들이 과도하게 영향력 있는 것으로 계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그는 유엔 총회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수치 분석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 과정 그 자체를 모델화하고 탐구하는 연구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THE INFLUENCE OF SMALL POWERS: CYPRUS
소국의 영향력: 키프로스 사례
코헤인은 유엔 총회의 정치가 단순히 안건의 주제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수준, 즉 초강대국 간, 대국과 소국 간, 혹은 소국들끼리의 관계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먼저 유엔헌장 제19조 위기 사례를 통해,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결정을 주도할 능력은 없지만 강대국의 계획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는 소극적 영향력(negative power)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강대국이 개입하지 않은 사안에서는 소국 간의 상호작용이 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고, 그 대표적 사례로 키프로스 문제를 분석한다.
1965년 제20차 총회에서 다뤄진 키프로스 사태는 그리스와 터키가 모두 나토 회원국이었기에 냉전 구도와 무관한 소국 간 외교전이었다. 키프로스와 그리스는 “완전한 독립과 외세 불간섭”을 강조한 결의안을 추진한 반면, 터키는 절차적이고 중립적인 결의안을 선호했다. 키프로스는 우선심의권 확보, 수정안 제출 등 복잡한 절차적 전략(procedural maneuvers)을 통해 터키 측 결의안을 무력화시키고, 제1위원회(47–6–51)에 이어 본회의(47–5–54)에서도 자국안의 채택에 성공했다.
ARGUMENTS AND POSITIONS OF STATES
국가들의 주장과 입장
코헤인은 키프로스가 자국의 좁은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이를 ‘보편적 가치’와 ‘이상주의적 언어’로 포장해 지지를 끌어낸 점에 주목한다. 키프로스는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을 설득하기 위해 ‘민족자결(self-determination)’ 원칙을 강조하며, 터키의 소수민족 정책을 비판할 때 남로디지아(백인 소수지배국) 사례와 연결시켰다. 즉 “키프로스에서 터키계 소수의 특권을 인정한다면,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지배도 정당화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보편 원칙을 자기 논리에 맞게 결합시킨 전략적 담론이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 비아랍국 17개국이 키프로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조했으며, 이처럼 키프로스는 현실적 국익을 ‘보편적 정의’의 언어로 포장함으로써 소국으로서도 광범위한 외교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터키는 국제법과 조약의 신성함을 내세워 서방국가들의 공감을 얻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평화유지군(UNFICYP) 참여국이었기에 ‘중립(neutrality)’을 이유로 기권을 선택했다. 이들의 소극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터키에 불리하게 작용해, 키프로스의 강경한 실질적 결의안이 통과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코헤인은 이를 통해 총회에서 “객관성”이나 “중립”을 표방하는 행위가 실제로는 기계적 태도에 불과하며 특정 진영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모든 국가가 원칙에 따라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중동 국가들은 지역적·종교적 연대에 따라 분열되었고,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경쟁심리로 키프로스를 지지했으며, 심지어 알바니아는 반미·반제국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그리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터키 편에 섰다. 즉, 유엔 총회의 표결은 이상주의적 원칙보다 지역적 이해, 역사적 감정, 정치적 계산이 얽혀 만들어진 결과였다.
TECHNIQUES OF INFLUENCE
영향력 행사 기법
코헤인은 키프로스 사례를 통해 유엔 총회에서 다수파를 형성하려는 국가는 무엇보다 비동맹 세력(nonaligned states)을 공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키프로스는 비동맹국으로서 정치적 중도 이미지와 표결 기록 덕분에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했으며, 비동맹국 지도자들을 ‘전면 리더’로 세워 지지를 확대했다. 양측은 단순한 설득을 넘어 보상과 압력을 병행해 외교전을 벌였는데, 특히 중국·소련·미국 같은 강대국들도 표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키프로스는 중국대표권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국민당 중국의 기권을 유도했고, 소련은 터키의 외교적 압력으로 중립으로 돌아섰다. 미국은 터키를 지지했지만, 그리스의 강한 항의를 받고 공개적 로비를 자제했다. 이 과정은 소국이 강대국보다도 때때로 외교적 지렛대(leverage)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강대국의 영향력조차 정치적 부채와 자원 제약 속에서 제한적임을 드러낸다.
코헤인은 이러한 키프로스 사태가 유엔 총회의 정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시사한다고 본다. 120개가 넘는 회원국으로 구성된 국제체제에서는 지역적·비이념적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며, 국가들은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념과 국익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할 것이다. 그는 “서로의 거래(quid pro quo)는 늘 ‘추상적 원칙’이라는 쟁반 위에 올려진다”고 표현하며, 앞으로 총회가 이상주의적 담론보다 노골적인 국익 경쟁의 장으로 변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념의 힘이 약화되면, 과거처럼 진영이 고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교차하는 연대와 갈등(cross-cutting solidarities)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PARLIAMENTARY PROCEDURE AND THE GENERAL ASSEMBLY
코헤인은 유엔 총회가 단순히 결의안의 내용이나 표결 결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절차를 둘러싼 정치적 경쟁의 장이라고 본다. 회원국 간에 공통된 이해관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규칙을 이용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이용한다”는 원리가 작동하며, 실제로 절차적 표결은 실질적 사안보다 더 치열하게 다투어진다. 예컨대 키프로스 사안에서 일부 국가는 논쟁적인 문구를 전체 결의안에 묶어 표결하게 만들어 반대를 어렵게 했고, 미국은 중국 대표권 문제를 ‘중요문제(important question)’로 분류해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도록 만들어 자신에게 불리한 결의안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절차의 통제가 곧 정치적 영향력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코헤인은 특히 탈식민 문제에서 나타난 ‘기계적 다수주의(mechanical majority)’를 경고한다. 반식민 세력들은 압도적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헌장상 3분의 2 요건을 무시하고 단순 과반수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총회 스스로가 헌장을 느슨하게 해석하며 절차 규범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이를 “절차를 이용한 정치 권력의 남용”으로 보며, 총회 내 영향력의 핵심이 규범이나 법이 아니라 누가 절차를 장악하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CONCLUSION
코헤인은 유엔 총회에서 절차적 규칙이 국가들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 수단으로 자주 활용되지만, 그 남용에는 분명한 제도적·정치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먼저 모든 국가가 절차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하지만, 일부 대표들은 여전히 유엔 헌장의 신성성(sanctity of the Charter)과 국제 규범을 중시하기 때문에, 헌장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수준의 조작은 자제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절차의 남용은 단기적으로는 표결에서 승리를 안길 수 있으나, 패배한 국가들에게 “게임의 규칙이 조작되었다”는 불신을 심어 관계를 악화시키며 장기적으로 협력 기반을 약화시킨다. 예컨대, 20차 총회에서 식민주의 결의안 자체보다 그것을 단순 다수결로 처리한 절차 결정이 훨씬 큰 반감을 샀다. 마지막으로, 절차적 술수를 통해 채택된 결의는 실행 단계에서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키프로스 결의의 경우 서방 외교관들이 이를 “교묘하지만 하찮은 술수(smart small-time manipulating)”라 평하며 실질적으로 무시했다. 즉, 절차의 남용은 결국 정치적 역효과를 낳고, 이러한 현실적 제약이 절차 권력의 남용을 스스로 억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코헤인은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유엔 총회의 정치 과정을 경험적이고 세밀하게 분석하는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단순히 투표 통계로 국가 간 정렬을 파악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협상·영향력·절차 조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해야 총회의 정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총회를 국제 의회(international assembly)의 전형적 모델로 보며, 여기서 나타나는 권력·규범·절차의 상호작용이 다른 국제기구나 세계정치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런 미시적 정치 과정을 탐구하면 강대국과 소국 간의 역동, 국익과 이념의 결합 방식, 국제 규범이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