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ntralization from Siam
Paik and Vechbanyongratana. 2019. “Path to Centralization and Development: Evidence from Siam.” World Politics 71/2: 289-331.
서론: 식민지적 압박과 국가 중앙집권화
1. 외부 위협과 국가 변천의 관계
식민지 건설의 직접적인 위협 아래 놓인 국가들에게 가해진 식민지적 압박은 어떤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설령 노골적인 식민지화와 식민지 제도 시행이 없었더라도, 외부 제국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국가의 내부 정치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외부 위협, 중앙집권화 과정, 그리고 그에 따른 경제 발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 및 지역 수준에서의 다양한 사례 연구가 필요하며, 특히 이 주제의 맥락 의존적(context-specific)이고 경로 의존적(path-dependent)인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티모시 베슬리(Timothy Besley)와 토르스텐 퍼슨(Torsten Persson), 그리고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선구적인 연구들은 유럽의 현대 국가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 공통의 이익과 외부 위협 모두에 의해 촉진된 국가 역량 구축(state capacity-building)을 논한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니콜라 젠나이올리(Nicola Gennaioli)와 일리아 라이너(Ilia Rainer), 그리고 스텔리오스 미칼로풀로스(Stelios Michalopoulos)와 엘리아스 파파이오아누(Elias Papaioannou)가 아프리카의 중앙집권 정부 부재가 대륙의 식민화 결과에 미친 영향을 논의한다. 노엘 존슨(Noel Johnson)과 마크 코야마(Mark Koyama)는 유럽과 아시아를 비교하며 국가 구축과 경제 발전의 과정을 점진적이고 경로 의존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반면, 코야마, 치아키 모리구치(Chiaki Moriguchi), 투안-휘 응(Tuan-Hwee Sng)은 서구 식민 세력의 위협 아래 전개된 서로 다른 중앙집권화 노력이 중국과 일본의 발전 경로 차이를 가져왔음을 논한다.
2. 시암(Siam)의 사례와 만다라 체제로부터의 탈피
19세기 당시 시암으로 알려졌던 태국은, 완전한 정복을 당하지 않고 식민지 위협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이룬 동남아시아의 귀중한 사례를 제공한다. 오늘날의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지역 내 다른 국가들과 달리, 시암은 식민지 확장기 동안 독립을 유지했다. 이러한 독립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국(buffer state) 지위를 유지하고, 서구적 관례에 따라 지리적 행정 경계를 설정하며, 고도로 분권화되었던 통치 시스템을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시킴으로써 달성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침탈은 주변부 인구 중심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 서구적 의미에서의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정치적 대응을 촉발했다.
시암의 중앙집권화 노력은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으로부터의 중요한 구조적 단절을 의미한다. 전통적 통치는 주로 '만다라 국가(mandala state)'라 불리는 조공 체제로 특징지어진다. 이 체제는 중심 국가가 중심지로부터 뻗어 나가는 영향력의 동심원상 위치에 따라 주변부와 느슨한 조공 관계를 유지하는 구조였다. 이는 지도상에 표시된 영토나 경계보다 사람에 대한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영토 국가 시스템과 구별된다. 중앙집권화 이전 시암의 영토들은 현지의 세습 지도자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관리되었으며, 이들은 대개 조공 관계에 있었을 뿐 방콕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3. 테사피반(Thesapiban) 체제의 도입과 투자
19세기 말, 시암의 출라롱콘 국왕은 주변부에 방콕 정부의 상주 대표를 파견하고, 지역 관료제를 발전시키며, 방콕의 정책을 전파하기 위해 테사피반(Thesapiban) 체제하에 '몬톤(monthon)'이라 불리는 2단계 행정 단위를 창설했다. 이는 결국 방콕 이외의 모든 주로 확대되었다. 이 체제의 시행은 1893년부터 1915년까지 총 23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림 1 참조)
중앙집권화 과정이 전개됨에 따라 중앙 정부는 새로 편입된 지역의 공공재와 인프라에 투자했다. 그러나 독립 유지를 위한 외교적 양보들로 인해 정부의 세수 확보 능력이 점차 제한되었고, 그 결과 초기에 중앙집권화된 지역에는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진 반면, 후반부에 통합된 지역에는 투자가 제한되었다. 이는 태국 전역의 주들 사이에 불균형한 장기적 발전 결과를 초래했다.
4. 전략적 근접성과 발전 격차
본 논문은 먼저 시암의 내부 중앙집권화 과정이 주로 외부의 식민지 압박과 기존의 만다라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한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지리적으로 시암은 완충국이라는 이점과 함께, 주변국보다 10~20년 늦게 제국주의의 표적이 된 덕분에 중앙집권화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잠재적인 경제적 요인을 통제했을 때, 영국·프랑스의 영토 주장 지역과의 근접성과 전통 체제 내에서의 위치가 각 주의 중앙집권화 시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방콕과 가까운 핵심 내부 주는 평균 5년, 외부 주는 19년, 조공국은 21년이 걸렸다. 특히 외부 주들 중 식민지 접경지는 다른 지역보다 평균 9년 일찍 중앙집권화되었다. 이는 중앙집권화 지역의 선택이 경제적 목적이 아닌 전략적 안보 때문이었음을 입증한다.
둘째, 더 일찍 중앙집권화된 주들이 수십 년 후 더 나은 발전 성과를 누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1970년 기준, 10년 늦게 중앙집권화된 주는 전력화율(-6%p), 수돗물 보급률(-4%p), 초등교육 수료율(-2%p)에서 유의미하게 낮은 수치를 보였다. 1973년 실질 1인당 총생산(GPP) 역시 32% 낮게 나타났다. 셋째, 이러한 관계는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시암의 초기 정치 개혁이 남긴 장기적인 유산을 시사한다.
역사적 배경
1. 공간 개념의 충돌: 만다라와 서구적 경계
19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위협이 어떻게 시암으로 하여금 행정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게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암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와 행정 경계 개념이 서구 시스템과 어떻게 달랐는지 파악해야 한다. 시암의 권위 아래 있는 주변 지역을 보호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시암과 서구의 공간 개념 불일치였다. 19세기 대부분 동안 시암의 경계는 서구의 지리학이나 경계 개념이 아니라 만다라(mandala) 사회 계층 및 조공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만다라 계층 구조에서 주변부는 핵심 왕국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는 위성 국가(토후국)들로 구성된다. 이 정치 구조는 핵심부가 '영토'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를 통제하는 것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중요한 점은 지리적 경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권위의 영향력이 중심부에서 동심원 모양으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테이 분낙(Tej Bunnag)은 1892년이라는 늦은 시기까지도 시암 내무부 관리들이 자신들이 다스리는 마을을 지도상에서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위치란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관료적 위계 질서 내에서의 배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2. 전통적 주(Province)의 분류와 통치 구조
1782년 아유타야 함락 이후 시암의 수도로 건설된 방콕은 인접한 주들(핵심 내부 주)에 대해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했으며, 15세기 이후 시암의 핵심을 형성했던 나머지 내부 주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내부 주와 라오스 조공국 사이에는 주변 마을들을 거느린 주요 도시인 '므앙(mueang)'이 있었으며, 이들은 외부 주(external provinces)로 지정되었다. 므앙은 지도자 선출, 조세 징수, 사법권 측면에서 방콕으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19세기 중반 시암의 조공국에는 북동쪽의 루앙프라방 왕국, 북쪽의 치앙마이·람팡·람푼·프래·난, 동쪽의 캄보디아 왕국, 남쪽의 파타니·트렝가누·켈란탄·케다 술탄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방콕과는 독립적으로 기능하며 자체적인 왕실, 정부, 법률을 보유했으나,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치고 의례적으로 방콕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1909년 무렵, 파타니와 치앙마이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공국은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그림 2는 1892년 테사피반 체제 도입 직전의 주 분류를 보여준다.)
3. 보링 조약과 재정적 제약
중앙집권화 과정이 시작되기 40년 전인 1855년, 영국과 시암 사이에 체결된 보링 조약(Bowring Treaty)은 시암의 독립 유지 투쟁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조약과 이후 다른 서구 열강과 체결된 유사한 조약들은 정부가 독점하던 무역에 외국인의 자유로운 참여를 허용했고, 저율의 고정 관세를 도입했으며,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이는 시암 대외 무역에 대한 왕실의 독점권을 사실상 종결시켰고, 정부의 세입 확보 능력을 현격히 감소시켰다. 분권화된 통치 구조상 이러한 세입 손실을 다른 형태의 조세로 대체하기는 쉽지 않았다.
4. 식민지 침탈과 시암의 취약성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내부적으로는 비즈니스 이권과 치외법권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인접 영토를 잠식하며 시암을 압박했다. 프랑스는 동쪽(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지역)에서, 영국은 서쪽과 남쪽(현재의 미얀마,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영토를 차지해 나갔다. (그림 3은 1867년에서 1909년 사이 영·프의 영토 획득 양상을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19세기 후반 시암은 분권화된 통치 체제, 보링 조약으로 인한 재정 감소, 불분명한 국경선 등으로 인해 영토 침탈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또한 상비군이 없어 지방 유력자를 통해 징집된 평민들에게 의존해야 했고, 교통 및 통신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첩보 수집이나 군대 및 물자의 신속한 파견도 불가능했다.
5. 출라롱콘 국왕의 개혁과 중앙집권화
- 비용이 많이 드는 중앙 행정, 신설 관료제, 인프라 사업을 위한 조세 수입 증대
- 지방 행정에 방콕 대표(관료) 배치
- 시암 전역에 방콕의 정책 시행
- 국방을 위한 인적 자원의 직접 통제권 확보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출라롱콘 국왕은 1892년 식민지 침탈로부터 시암을 방어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부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국왕은 시암의 영향권 아래 남은 지역들을 직접 방문하여 충성을 요구하고 지지를 결집했다. 1893년에서 1915년 사이의 중앙집권화는 식민지 위협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으며, 이를 통해 시암은 조세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다. 확충된 재원은 다시 지방으로의 중앙 행정 확대와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인프라 개발의 자금이 되었다. 이 과정은 재정 역량, 공공재 투자, 경제 성장 사이의 연결 고리를 밝히는 이론적 연구들의 단계와 일치한다.
시암(Siam) 대 일본(Japan)
1. 보호 구역(Protected Zone) 내의 유사성
빅터 리버먼(Victor Lieberman)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비교적 안전했던 '보호 구역' 내 국가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논한다. 동남아시아 대륙부와 일본을 포함하는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고 토착 엘리트가 지배했으며, 인근 주요 문명(특히 인도와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면서 1830년 이전에 꾸준히 영토 통합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세기 이전까지 시암과 일본은 보호 구역 내 국가로서 국가 형성 과정에서 광범위한 유사성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훨씬 더 고립되어 있었고 영토 경계가 명확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서구의 식민지 위협에 대응한 두 나라의 19세기 중앙집권화 노력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2.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경제 성장
19세기 중반, 일본 역시 시암처럼 서구 열강의 식민지 위협에 직면했다. 1858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당시 일본은 재정적·군사적으로 분열된 자치 번(domains)들의 집합체였다. 식민지 침탈의 위협은 인구를 통합 정부 아래 조직하고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자원을 모으는 동력이 되었다. 일본의 비교적 콤팩트한 영토, 자연적으로 정의된 경계, 그리고 대부분의 영토를 잇는 기존 도로망은 중앙집권화 노력을 뒷받침했다.
일본의 중앙집권화는 재정 혁신과 역량 강화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행정 혁신과 생산적 정부 투자(서구식 현대군 창설, 공교육, 은행 시스템, 수입 대체 산업화 등)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인프라 및 공공재 투자는 20세기 일본의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3. 시암의 중앙집권화 시도와 성과
시암 또한 19세기 중반 반자치적 정치체들의 집합체였으며, 서구 열강의 위협에 대응해 행정 중앙집권화를 시작했다. 1892년 시작된 시암의 프로그램은 재정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전에는 각 지역 귀족이 세금을 징수하고 그 일부만을 방콕에 보냈으나, 방콕 정부가 지방의 조세권을 장악하면서 정부 세입은 1892년 약 1,537만 바트에서 1898년 약 2,849만 바트로 6년 만에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증대된 세입은 영토 보전에 필수적인 교통 및 통신 인프라 투자로 이어졌다. 전신이 없던 1890년에는 방콕에서 치앙마이(700km)까지 가는 데 42일이 걸렸으나, 정부는 국경 지역을 향하는 철도를 건설하고 우편 및 전신망을 구축했다. 또한 서구식 교육 도입, 현대적 무기 구입, 징병제 실시, 법률 시스템 및 토지법 개정 등을 통해 영토의 완전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4. 시암과 일본의 발전 경로가 갈라진 이유
유사한 중앙집권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암의 경제 성장은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았으며 지역적으로도 매우 불균형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재정 확보의 한계: 시암은 내부 조세권은 강화했으나, 대외 무역과 차관을 통한 재원 확보에 실패했다. 보링 조약 등 서구와 맺은 조약들로 인해 관세율이 낮게 묶였고 무역 독점권도 사라졌다.
- 외채에 대한 공포: 시암은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돈을 빌릴 경우 부채를 빌미로 식민지화될 것을 우려했다. 이로 인해 1950년대까지 균형 예산 정책을 고수했고, 이는 정부의 투자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반면 일본은 이러한 제약 없이 대외 무역 수익과 적자 재정을 활용해 생산적 투자를 감행할 수 있었다.
5. 불균형 발전의 장기적 유산
재정적 제약으로 인해 시암의 방콕 외 지역 인프라 확장은 1920년대 이후 급격히 둔화되었다. 초기 중앙집권화 단계에서 제외된 지역들은 기본적인 인프라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고, 1960~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투자가 시작되었다.
결국 초기 중앙집권화의 혜택을 입지 못한 지역은 공교육, 전기, 수도 공급의 전제 조건인 행정 역량 확충에서 밀려났고, 이러한 중앙집권화 과정의 불균형한 경로가 오늘날 태국 주들 사이의 지속적인 발전 격차를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실증적 분석 결과
1. 분석의 목적과 단위
본 절에서는 19세기 시암의 외부 위협과 기존 정치 구조가 중앙집권화의 경로를 결정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중앙집권화 노력이 태국의 주(province) 단위 사회경제적 성과와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증명한다.
분석 단위로 **'주(province, 창왓)'**를 선택한 이유는 1933년 이후 공공재 공급과 공공 자금 배분에 관한 결정이 이 수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앙 행정의 2단계 단위였던 '몬톤(Monthon)'은 짧은 기간만 유지되다가 1933년 지방행정법(Provincial Administration Act)에 의해 폐지되었으며, 이후 행정 권한이 주 단위로 이양되었다.
2. 분석 대상 및 제외 지역
모든 회귀 분석에서 **방콕과 그 주변 지역(몬톤 끄룽텝)**은 제외한다. 여기에는 현재의 방콕, 논타부리, 빠툼타니, 사뭇쁘라깐 주가 포함된다. 이 지역들은 언제나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었으며, 1892년 내무부 산하에 도입된 테사피반(Thesapiban) 지방 행정 체제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Thailand political map divide by state colorful outline simplicity style.
3. 데이터 및 요약 통계
표 1은 데이터 세트에 포함된 72개 주의 요약 통계와 자료 출처를 보여준다. 1893년부터 1915년까지 23년간 진행된 중앙집권화 기간 중, 몬톤이 설립된 평균 연도는 1901년이다. 이는 통합 과정이 초기 단계에 약간 치우쳐(skewed) 진행되었음을 나타낸다.
중앙집권화가 시작된 1893년 당시, 시암의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 있었다.
- 핵심 내부 주(Core Inner Provinces): 11개
- 내부 주(Inner Provinces): 19개
- 외부 주(External Provinces): 33개
- 조공국(Tributary States): 9개
(주: 1970년에서 2010년 사이 일부 주가 분할되었으나, 본 분석은 2010년 기준 72개 주를 바탕으로 한다. 분할된 주의 경우 공공재 수준과 1인당 총생산(GPP)이 분할 전과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분석 결과 및 결정 요인
1. 시암의 초기 발전 수준과 변화
시암의 초기 발전 수준은 가구당 전력화, 상수도 보급, 초등 교육 이수율 등 주요 지표에서 매우 낮았다. 1970년대 기준, 주 단위 평균 가구 전력화율은 22%, 상수도 보급률은 14%, 초등 교육 이수율은 평균 7%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0년에 이르러 상수도 보급률은 52%, 초등 교육 이수율은 50% 이상으로 크게 증가했다. 실질 1인당 총생산(GPP) 역시 1973년 36,814바트에서 2010년 119,136바트로 약 40년 동안 세 배 이상 성장했다.
2. 중앙집권화 시기의 결정 요인: 식민지 위협
본 연구는 특정 주가 테사피반 체제에 일찍 혹은 늦게 편입된 결정적 요인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 침탈 위협(지정학적 위치)과 방콕과의 사전 정치적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 식민지 위협: 1892~1893년 프랑스와의 교전(파크남 사건)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넓은 영토를 잃은 후, 방콕 정부는 프랑스 및 영국 접경 지역(Frontier)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확보해야 할 시급한 필요성을 느꼈다.
- 정치적 위계(Class): 중앙집권화 이전의 주 등급(핵심 내부 주, 내부 주, 외부 주, 조공국)은 통합의 용이성을 결정했다. 예를 들어, 방콕과 가까운 '핵심 내부 주'는 통합이 가장 쉬웠던 반면, 치앙마이와 같은 '조공국'은 경제적 중요성(티크 나무 무역 등)과 접경지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통제가 어려워 가장 늦게(1915년) 통합되었다.
3. 통계적 분석 (OLS 회귀 분석)
식민지 위협이 몬톤(Monthon) 설립 시기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최소자승법(OLS) 회귀 분석을 실시했다
- MonthonYr: 해당 주가 테사피반 체제에 완전히 통합된 연도
- Frontier: 1893년 당시 프랑스나 영국의 영토 주장 지역에 인접한 경우 1, 아니면 0인 더미 변수.
- Class: 중앙집권화 이전의 주 등급.
- X: 경제적 잠재력(농업 적합 토지, 인구 밀도, 방콕과의 거리, 고도, 해안선 길이 등)을 통제하기 위한 변수들.
4. 주요 분석 결과 (표 2 참조)
회귀 분석 결과(표 2, 컬럼 8), 경제적 변수들을 통제한 후에도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 위계에 따른 지연: 방콕이 직접 통제하던 '핵심 내부 주'에 비해 조공국은 21년, 외부 주는 19년, 내부 주는 5년 정도 중앙집권화가 늦어졌다.
- 접경지 효과: 동일한 '외부 주' 집단 내에서도 식민지 영토 주장 지역에 인접한 접경 지역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평균 9년 일찍 중앙집권화되었다.
- 경제적 요인의 무관성: 방콕과의 거리를 제외하고는 인구 밀도나 농업 적합성 등의 경제적 변수들은 중앙집권화 시기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중앙집권화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전략적 안보를 위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 역사적 내러티브의 뒷받침
역사적 기록 또한 이러한 통계적 발견을 지지한다. 분낙(Bunnag)은 몬톤의 설립 순서가 동쪽과 북동쪽의 프랑스, 북쪽과 남쪽의 영국의 진출에 대비한 전략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식민 열강의 초기 목표는 시암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중요한 중앙 쌀 경작 지대보다는, 자신들의 기존 영유권과 맞닿아 있는 접경 지역이었다. (그림 3 참조)
결론적으로, 시암의 중앙집권화 경로는 경제적 수익성을 따진 결과가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지정학적 우선순위에 따라 형성되었다.
역사적 증거와 장기적 영향 분석
1.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른 몬톤(Monthon) 설립
파크남 사건(Paknam Incident)으로 인해 오늘날의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를 대거 상실한 직후, 방콕 정부는 프랑스 영유권과 접한 지역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 1893년: 동쪽 접경지의 군사적 요충지인 나콘랏차시마와 쁘라찐부리가 최초의 두 몬톤으로 설립되었다.
- 1894년: 북쪽 접경지의 핏사눌록이 세 번째로 설립되었다. 이는 치앙마이와 우돈 사이의 전략적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었다.
- 1895년: 영국령 버마와의 서쪽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나콘사완과 랏차부리가 설립되었다.
2. 통합의 난이도와 속도 조절
접경지라 할지라도 기존 지방 정부의 독립성이 강한 경우 통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 치앙마이: 북서쪽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콕은 즉각적인 통합을 피했다. 강력한 자치 정부를 자극해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농카이 및 우본랏차타니: 세습 귀족들의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 기존 정부 조직을 방콕의 새로운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결국, 몬톤 설립 순서는 '전략적 위치의 시급성'과 '기존 체제 통합의 용이성' 사이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었다.
3. 중앙집권화 시기와 초기 인프라의 상관관계
연구팀은 1915년 중앙집권화 완료 직후의 데이터를 통해 '조기 통합 지역'이 혜택을 입었는지 분석했다. 평균 통합 연도인 1901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 교육: 1917년 기준, 일찍 통합된 몬톤일수록 중앙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학교와 교사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지방의 세속/종교 교육보다 공교육 체계가 먼저 자리 잡음)
- 철도: 1916년 이전에 철도가 개통될 확률 역시 조기 통합 지역에서 훨씬 높게 나타났다.
이는 중앙집권 체제에 일찍 편입된 지역이 정부의 초기 공공재 지출과 인프라 투자를 선점했음을 보여준다.
4. 100년의 유산: 1970년대~2010년대의 결과
본 연구의 핵심 가설은 '초기 중앙집권화와 그에 따른 투자가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경제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지표를 분석했다.
- 기준점으로서의 1970년대: 1970년대 이전까지 태국의 경제 개발은 방콕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농촌과 지방 도시 개발을 본격화한 것은 제4차(1977-1981) 및 제5차(1982-1986) 경제사회개발계획부터였다.
- 분석 지표: 가구 전력화, 상수도 보급, 초등 교육 이수율, 그리고 1인당 총생산(GPP).
통계 분석 결과, 1920~30년대생 세대부터 이미 조기 통합 지역의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이러한 격차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전력, 수도 등 현대적 인프라 보급률의 차이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실증 분석: 중앙집권화 시기와 공공재 보급의 상관관계
1. 시대적 배경의 변화
태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방콕 중심의 개발에서 벗어나 소외된 지역을 겨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제4차(1977~1981) 및 제5차(1982~1986) 경제사회개발계획이 그 기점이다. 태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전통적인 농업 국가에서 수출 주도형 성장 국가로 전환했으며, 이는 방콕 외곽 지역의 공업 단지 조성과 제조업의 급격한 발전을 가져왔다.
본 연구는 1977년 이전의 발전 성과는 1893~1915년 사이에 구축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테사피반 체제의 직접적인 결과인 반면, 그 이후의 성과는 방콕 외 지역을 겨냥한 최근의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2. 회귀 분석 모델 (식 2)
중앙집권화 시기가 최근의 공공재 보급에 미치는 영향을 테스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회귀 분석을 실시했다.
- PublicGood: 1970년 기준 주 단위 인프라 및 인적 자본 개발 측정치(전력화율, 상수도 보급률, 14세 이상 초등교육 이수율).
- MonthonYr: 해당 주가 몬톤에 편입된 연도(핵심 변수).
- Class: 중앙집권화 이전의 정치 체제 유형(과거 조공국이나 외부 주였던 지역의 심리적 저항 가능성 등을 통제).
- Location: 접경지 여부, 방콕과의 거리, 몬톤 행정 중심지 여부 등.
- Z: 경제적 잠재력을 나타내는 지리적 통제 변수(1915년 인구 밀도, 경작 가능 지수, 면적, 평균 고도, 해안선 길이 등).
3. 왜 '겨우 23년'의 차이가 장기적 격차를 만드는가?
중앙집권화가 진행된 전체 기간은 23년(1893~1915)에 불과하지만, 장기적 발전을 결정짓는 것은 짧은 시간 폭보다 '중앙집권화의 순서'이다. 서구의 식민지 위협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중앙집권화를 끝내야 했던 시암은 재정적 제약이 컸다. 따라서 정부는 통합이 쉽거나 직접 통치가 가장 시급한 지역부터 우선순위를 정해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초기 투자의 우선순위가 이후 100년의 격차를 만든 것이다.
4. 분석 결과 (표 4 참조)
표 4의 결과는 중앙집권화 시기(MonthonYr)와 1970년의 모든 발전 지표 사이에 강한 음(-)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즉, 중앙집권화가 늦어질수록 발전 수준이 낮았다.
- 통계적 수치: 다른 모든 경제적 지표를 통제했을 때, 다른 주보다 10년 늦게 중앙집권화된 주는 평균적으로 다음과 같은 열세를 보였다.
- 가구 전력화율: 6%포인트 낮음
- 상수도 보급률: 4%포인트 낮음
- 초등교육 이수율: 2%포인트 낮음
이 수치가 작아 보일 수 있으나, 1970년 당시 태국 전체의 평균 전력화율이 22%, 상수도 보급률이 14%, 초등교육 이수율이 7%였음을 감안하면, 평균 대비 매우 막대한 격차임을 알 수 있다.
분석의 확장 및 결론
1. 정부의 지방 개발 정책 이후의 변화 (1980~2000년)
1970년대 후반 이후 태국 정부는 '산업 단지(Industrial Estates)' 조성 등 특정 지역을 표적으로 한 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이 지역 격차를 해소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1980년, 1990년, 2000년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 공공재 보급의 수렴: 시간이 흐를수록 중앙집권화 시기가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계수 값)와 통계적 유의성은 점차 감소했다. 이는 정부의 표적 개발이 공공재 보급의 격차를 줄이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 지속되는 부정적 영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게 중앙집권화된 주들이 겪는 부정적인 영향은 대부분의 사례에서 여전히 유의미하게 남아 있다.
2. 장기적 경제 성과: 1인당 총생산(GPP) 분석
중앙집권화 시기가 주의 장기적 경제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1973년 실질 1인당 GPP를 종속 변수로 설정하여 회귀 분석을 실시했다.
- 1973년의 결과: 다른 모든 조건을 통제했을 때, 다른 주보다 10년 늦게 중앙집권화된 주는 1973년 기준 1인당 GPP가 평균 32%나 낮았다. 이는 초기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얻은 인프라와 근대 교육의 선점 효과가 수 세대 뒤의 경제적 성과로 직결되었음을 보여준다.
- 지속성(1975~2010년): 5년 간격으로 분석을 확장했을 때도 중앙집권화 시기($MonthonYr$)의 영향은 여전히 음(-)의 관계로 나타났다. 비록 그 영향력이 3.2%에서 1.2%로 점차 줄어들긴 했지만, 21세기까지도 그 유산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3. 결과에 대한 토론: 다른 요인들은 없는가?
본 연구의 결과에 대해 "중앙집권화가 아닌 다른 경로(식민지 경제로의 편입 등) 때문에 불평등이 생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 무역 구조의 영향: 쌀 무역은 주로 방콕과 중앙 평원에 집중되었으며(본 분석에서 제외됨), 티크나 주석 같은 자원 산업은 특정 구역에 한정되어 현지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다. 따라서 대외 무역은 방콕과 지방 사이의 격차는 설명할 수 있어도, 지방 주들 사이의 격차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 서구식 토지 제도의 도입: 1901년 토지권리증법(Land Title Deed Act) 등 서구식 제도의 불균등한 시행 역시 방콕과 그 외 지역의 차이를 만들었으나, 방콕 이외의 지방 주들 간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발전 차이는 여전히 중앙집권화의 시점 차이로 더 잘 설명된다.
4. 결론: 식민지 위협이 남긴 장기적 유산
19세기 후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위협은 출라롱콘 국왕으로 하여금 방어 전략으로서 테사피반(Thesapiban)이라 불리는 중앙집권 체제를 채택하게 했다. 재정적 한계로 인해 시암 정부는 '통합하기 쉽거나 안보상 급한 지역'을 우선적으로 중앙 체제에 편입시켰고, 이 지역들에 초기 인프라와 공공재 투자를 집중했다. 1930년대에 몬톤 체제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균등한 인프라 배분의 유산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전력, 교육, 소득 수준의 격차로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1970년대 이후의 집중적인 지방 개발 노력도 이 100년 된 격차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시암의 현대화 노력은 식민지화를 피하고 주권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내부적인 지역 불평등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남겼다. 본 연구는 동남아시아에서 '만다라 국가'가 '근대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이 장기적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드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