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민족형성과 언어적 동질성
Darden and Mylonas. 2015. “Threats to Territorial Integrity, National Mass Schooling, Linguistic Commonality.” CPS 49/11: 1446-79.
왜 어떤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언어적으로 더 동질적일까? 본 연구는 국가가 발전하는 국제적 환경이 그 국가의 언어적 공통성과 국민적 결속의 정도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고 가정한다.
구체적으로, 영토 정복이나 외부의 지원을 받는 분리 독립과 같은 대외적 위협의 존재는 통치 엘리트가 국민적 결속을 창출하기 위해 민족 형성(nation-building) 전략을 추진하도록 하는 강력한 유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전략은 흔히 대중 교육을 통한 공통 국어의 함양으로 이어진다.
초기의 언어적 이질성, 국가 역량, 발전 수준은 유사하지만 국제적 환경이 상이했던 사례들을 비교한 결과, 영토 보전에 대한 대외적 위협에 직면하지 않은 국가들은 교육을 비롯한 정체성 구축 도구를 선교사나 여타 집단에 위탁(outsourcing)하거나 동화 정책에 전혀 투자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높은 민족적 이질성으로 귀결되었다. 반면, 고위협 환경에서 발전한 국가들은 인구를 동질화하기 위한 민족 형성 전략에 투자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1300년경까지만 해도 전 세계 모든 지역의 언어적·민족적 이질성은 매우 높았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상당수 국가보다 더 동질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을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그동안 논의된 적이 거의 없다. 기존의 국가 간 비교 연구에서는 언어적 이질성(보통 민족적 이질성을 측정하는 핵심 지표)을 공공재 공급, 경제 발전, 내전 발생 가능성 등 다양한 사회 현상의 원인으로만 다루어 왔다. 즉, 한 국가의 언어적 이질성은 이미 주어진 고정된 외생 변수(exogenous variable)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다양성 자체가 왜 발생하는지, 혹은 언어적 다양성을 초래한 근본적인 배경이 다양성의 결과로 지목되는 여러 현상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밝히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여러 선행 연구(Hintze, 1975; Tilly, 1990; Herbst, 1990; Posen, 1993 등)를 바탕으로, 본 연구는 국가 간 경쟁, 특히 영토 보전에 대한 대외적 위협이 민족 형성을 자극하여 언어적 공통성을 높인다고 가정한다. 군사적 정복이나 외부 세력의 민족 분열 조장(제5열 활동)으로 영토를 위협받을 때, 지배 엘리트는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고 분리주의 선동을 차단하며 경쟁국의 개입과 영토 침탈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 형성을 강력히 추진하게 된다.
피지배층 사이에 공통의 민족 정체성을 만드는 민족 형성 방식은 다양하지만, 본 연구는 단일 표준어를 바탕으로 국가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공교육(mass schooling)에 주목한다. 공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은 교육받지 못한 민중에게 통일된 민족 정체성을 심어주고, 기존의 민족·가족·친족적 유대를 뛰어넘는 지속적인 국가 충성심을 확립한다. 이를 통해 외부의 선동을 차단하고 외세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영토 위협에 직면한 국가일수록 이러한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공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못한 국가는 소멸하거나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이 과정이 성공하면 국민적 결속력이 강화될 뿐만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 단일 언어를 사용하므로 언어적 동질성도 급격히 높아진다. 따라서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 대외적 영토 위협을 경험한 국가일수록 더 강한 결속력과 높은 언어적 동질성을 나타내게 된다.
국제 규범과 합의의 결과이든, 혹은 지역 패권국(hegemon)에 의해 국경이 고정되고 강제된 결과이든 간에, 국가 간 경쟁이 부재한 환경에서 성장한 국가들은 인구 동질화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국가적 정체성을 담은 공교육에 대규모로 투자할 유인도 줄어들게 된다. 이들 국가가 경제 발전이나 종교 개종의 수단으로 교육을 추진하더라도, 대개 외국 기관이나 선교 단체가 제공하는 사립 교육 서비스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신도를 모으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경우가 많은 이러한 민간 집단들은 단일하고 일관된 민족 정체성을 제공하거나, 교육과정에서 공통의 교수 언어(instruction language)를 사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역사적 사례들을 보면, 이들은 지역적·민족적·종파적 정체성을 공고히 만듦으로써, 향후 효과적인 국가 기구를 구축하거나 공통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조건 역시 언어적 공통성의 수준을 낮추는 원인이 된다.
요약하자면, 민족 형성을 추진하려는 유인은 국가가 처한 국제적 환경 (대개의 경우 지역적 맥락) 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 간 경쟁의 정도와 영토 보전에 대한 대외적 위협은 엘리트들이 교육 부문에서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드는 유인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궁극적으로 국민적 결속과 언어적 공통성의 수준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가 간 경쟁 수준이 높을수록 일관된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 투자가 활발해지며, 대다수 사례처럼 언어가 민족 정체성의 정의와 결부될 때 이는 더 높은 언어적 공통성으로 이어진다. 즉, 언어적 이질성은 고정되어 있거나 국제 정치와 무관한 외생적 변수가 아니다. 국제 환경은 국가가 언어적 공통성을 낳는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할지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본 논문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에서는 대외적 영토 위협과 높은 언어적 동질성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거시적·지역 간 실증 패턴을 개관하고, 국가의 언어적 동질성 수준을 설명하는 대안적 이론들을 검토한다. 아울러 국제적 유인이 민족 형성 정책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높은 언어적 동질성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논리를 제시한다. 제2장에서는 통일된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이 어떻게 높은 수준의 언어적 동질성으로 귀결되는지 분석한다. 제3장에서는 외부 환경, 지배 엘리트의 유인, 그리고 언어적 동질성을 낳는 교육 정책의 선택 간의 연결 고리를 구체화하기 위해 실증 사례들을 다룬다. 특히 초기 국가 역량이 낮고 이질성이 높으며 식민 지배를 경험했다는 조건을 통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와 콩고(자이르)를 집중적으로 비교 분석한다. 두 국가는 모두 초기 국가 역량이 낮고 다양성이 매우 높은 포스트콜로니얼(탈식민) 국가이지만, 영토에 대한 대외적 위협의 수준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과거 식민 지배국뿐만 아니라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집단들로부터 즉각적인 위협에 직면했던 인도네시아는 동화 전략으로서 통일된 공교육을 선택했고,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언어적 동질성을 달성했다. 반면, 탈식민 시기의 콩고(자이르)는 대외적인 영토 위협이 제한적이거나 거의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통일된 공교육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언어적 동질성 수준도 낮게 유지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본 연구가 규명한 구조적 유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 사례들, 즉 대외적 위협에 직면했음에도 민족 형성을 추진하지 않아 결국 영토의 보전성을 상실한 사례들을 살펴본다. 이와 함께 대외적 유인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민족 형성을 추진했던 예외적인 사례(탄자니아) 역시 함께 분석한다.
대외적 위협과 언어적 공통성의 지역 간 편차 (External Threats and Cross-Regional Variation in
Linguistic Commonality)
인구가 단일 언어로 얼마나 동화되었는지, 즉 '언어적 공통성(linguistic commonality)'을 측정하기 위해, 본 연구는 제1언어(모국어) 또는 제2언어로 가장 대중적인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의 비율을 지표화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이 지표는 언어적 다양성의 수준을 측정하는 역할을 하며, 기존의 '민족언어학적 파편화 지수(ELF, Ethnolinguistic Fractionalization index)'나 여타 다양성 지표들과도 밀접하게 궤를 같이한다.
저자들은 단순히 "이 나라에 부족 언어가 몇 개나 살아남았는가?"를 세지 않는다. 대신 "제1언어든 제2언어든 상관없이, 전 국민 중 '국어(National Language)'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나 되는가?"를 측정한다.
- 인간이 서로를 '다르다'고 선긋는 민족적 차별성(Markers)은 옷차림, 풍습 등 마음만 먹으면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차이점의 유무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 중요한 건 정부가 동화 정책(공교육)을 펼쳐서 "서로 소통 가능한 공통의 도구(언어)를 얼마나 넓게 보급하는 데 성공했는가(성취)"이다. 집에서는 부족 언어를 쓰더라도, 학교나 군대에서 국어로 소통할 수 있다면(양층언어/다중언어 상태), 그 국가는 민족 형성에 성공한 것이다.
다만, 본 연구의 측정 방식은 양층언어현상(diglossia,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현상)이나 다중언어주의(multilingualism)까지 포괄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핵심적인 개념적 지향점과도 연결된다. 본 연구의 관심은—바르트(Barth, 1998 [1969])가 제안했듯 잠재적으로 무한히 존재하는—민족적 차별성의 지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성의 성취'에 있기 때문이다.
양층언어 및 다중언어주의
1. 양층언어현상 (Diglossia)을 포괄한다는 것의 의미
양층언어현상이란 한 사회 안에서 공적인 상황(학교, 관공서, 뉴스)에 쓰는 높은 수준의 고위 언어(High)와, 사적인 상황(가족, 친구, 일상)에 쓰는 저위 언어(Low)가 명확히 나뉘어 공존하는 현상을 말한다.
- 기존 방식의 한계: 기존의 '민족언어학적 파편화 지수(ELF)'로 측정하면, 집에서 부족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무조건 '분열된 인구'로 집계된다.
- 이 논문의 방식 (장점): 저자들은 집에서 무슨 언어를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학교나 군대에서 배운 '공통 국어(High)'를 제2언어로서 구사할 수만 있다면, 국가가 동화 정책(공교육)을 통해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본다.
- 예시: 아랍 세계에서는 각 지역 방언(Low)이 완전히 달라서 서로 말이 안 통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표준 아랍어(Modern Standard Arabic, High)로 모두가 소통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바로 이 '표준 아랍어 구사율'을 측정함으로써 중동의 높은 결속력을 포착해 낸다.
2. 다중언어주의 (Multilingualism)를 포괄한다는 것의 의미
한 사람이 모국어 외에 여러 개의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상태를 뜻한다.
- 기존 방식의 한계: "너는 A 부족이니까 A 언어 사용자야"라며 사람을 하나의 언어 상자에만 가둔다.
- 이 논문의 방식 (장점):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많은 이들은 다중언어 능력자이다. 태어난 고향의 부족어(제1언어)도 쓰지만, 학교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배운 국가 공용어(제2, 제3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한다. 저자들은 '제2언어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까지 모두 통계에 포함시켰다.
- 예시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인들은 일상에서 자바어, 수단어 같은 자기 부족 말을 쓰지만(Multilingualism), 학교에서 배운 '인도네시아어'를 모두가 제2언어로 완벽하게 구사한다. 기존 지수로 보면 인도네시아는 수백 개 언어로 쪼개진 '초고위험 분열 국가'여야 하지만, 저자들의 방식으로 보면 '공통 국어 구사율이 매우 높은 결속력 있는 국가'로 올바르게 측정된다.
다중언어주의는 한 사람이 단순히 '여러 개(개수)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고, 양층언어현상은 그 여러 언어들이 사회적으로 '높고 낮은 계급(공적/사적 역할)'으로 명확히 나뉘어 쓰이는 현상을 뜻한다.
즉, 본 연구는 잠재적으로 두드러질 수 있는 모든 언어적 차이가 완전히 박멸되었는지를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통 언어가 얼마나 널리 확산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공통 언어가 공유되는 정도는 초기에 이질적이었던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추진된 동화주의적 민족 형성 정책의 성공 여부를 보여주는 훌륭한 대리 변수(proxy)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보유한 대규모 인구와 넓은 영토 내에서 '초기에는 다양성이 높았을 것(즉, 언어적 공통성이 낮았을 것)'이라는 본 연구의 가정은 역사언어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역사언어학에서는 시공간의 확장에 따라 언어적 다양성이 엔트로피적으로 증가하며,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언어와 방언이 발전하게 된다고 분석한다. 정복, 무역, 이주 등을 통해 언어가 공간적으로 처음 확산된 이후에는, 집단 간의 대면 접촉이 감소하고 자연스럽게 언어적 변화가 축적된다. 이에 따라 공통의 언어는 방언으로 파편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별개의 언어로 갈라지게 된다. 라틴어, 슬라브어, 게르만어, 멜라네시아어, 반투어 등 초기 언어 확산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언어적 다양성은 더욱 커지며, 특히 지형이나 여타 조건으로 인해 대면 접촉이 제한되는 환경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언어가 근대 국가 체제가 형성되기 전 수천 년에 걸쳐 확산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 연구는 인구조사나 설문조사를 통해 다양성을 실증적으로 측정하기 이전의 상태, 즉 대부분의 현대 국가 영토 위에는 원래 매우 높은 수준의 초기 다양성이 존재했다고 가정한다.
| 지역 (Region) | 평균 인구 비율 (%)(지배적 공통어 구사) | 표준편차 (SD) | 국가 수 (N) |
| 중동 및 북아프리카 (Middle East, North Africa) | 94 | 8 | 19 |
| 유럽 (Europe) | 93 | 5 | 20 |
| 발칸 반도 (Balkans) | 93 | 11 | 8 |
| 동아시아 (East Asia) | 91 | 11 | 4 |
| 남미 (South America) | 89 | 9 | 9 |
| 구소련 지역 (Former Soviet Union) | 86 | 11 | 16 |
| 중북미 및 카리브해 (Central/North America and Caribbean) | 86 | 12 | 14 |
| 동남아시아 (Southeast Asia) | 74 | 20 | 10 |
| 남아시아 (South Asia) | 50 | 26 | 7 |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Sub-Saharan Africa) | 45 | 26 | 44 |
Table 1. Average Share of a Country’s Population Able to Speak the Dominant Common Language
1. 변수명의 정확한 의미
- Average Share (평균 비율): 해당 지역에 속한 국가들의 평균값이다.
- Dominant Common Language (지배적 공통 언어): 각 국가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국어나 공용어(예: 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어, 탄자니아의 스와힐리어)를 의미한다.
- 즉, "그 지역 국가들의 국민 중, 제1언어든 제2언어든 간에 '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평균적으로 몇 %나 되는가?"를 나타낸 지표이다.
2. 데이터가 보여주는 3가지 핵심 해설
① 최상위권: 유럽, 중동, 발칸 반도 (93% ~ 94%)
- 특징: 전 국민의 90% 이상이 하나의 공통 언어로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는 '초고동질성' 지역들이다.
- 해설: 이 지역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영토 전쟁, 정복, 분리 독립의 위협(고위협 환경)을 겪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배 엘리트들은 군대를 징집하고 애국심을 고취해야 했고, 이를 위해 강력한 공교육을 도입하여 국가 표준어를 전 국민에게 강제로 주입(동질화)한 결과이다.
② 최하위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45% ~ 50%)
- 특징: 국민의 절반 정도(45~50%)만이 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각자의 부족 언어만 써서 소통이 안 되는 '초고이질성' 지역들이다.
- 해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이 지역들은 서구 열강이 대충 그어놓은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국제적 합의(국제 규범 및 패권국에 의한 국경 고정) 덕분에, 대외적인 영토 정복 위협을 거의 겪지 않았다(저위협 환경). 국가가 소멸할 위기감이 없다 보니, 막대한 돈을 들여 전 국민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공교육(민족 형성)에 투자하지 않았고, 그 결과 원래 존재하던 부족 간의 언어적 분열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③ 표준편차(Standard Deviation)의 숨은 의미
- 유럽의 표준편차는 5로 매우 낮다. 이는 유럽에 속한 모든 나라가 골고루 90% 이상의 높은 동질성을 보인다는 뜻이다.
- 반면, 동남아시아는 평균이 74%이지만 표준편차는 20으로 매우 크다. 이는 같은 지역 안에서도 대외 위협에 시달려 언어 통합에 성공한 나라(인도네시아)와 그렇지 못해 여전히 분열된 나라가 극단적으로 섞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 편차 때문에 저자들이 2장에서 인도네시아와 콩고를 콕 집어 정밀 비교하게 된 것이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언어적 분화와 다양성이 발생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극적으로 억제되었다. 공통 언어의 창출을 통해 이러한 초기 다양성이 축적·감소한 정도는 국가마다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표 1]에서 나타나듯, 이러한 국가 간 차이는 지역별로 무리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유럽, 동아시아,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언어적 공통성을 성취했다. 민족언어학적 파편화 지수(ELF)를 사용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지역적 패턴이 확인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ELF 점수는 0.65인 반면, 서유럽과 일본의 평균 점수는 0.22에 불과했다(Atlas Narodov Mira, 1964; Fearon, 2003).
이러한 국가 및 지역 간의 편차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대외적 환경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규명하기에 앞서, 본 연구는 현대의 언어적 동질성 편차를 설명하는 세 가지 대안적 설명, 즉 초기 다양성(initial diversity), 초기 국가 역량(initial state capacity), 그리고 시간 혹은 통치 기간(duration of rule)의 타당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일부 지역의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언어적 동질성을 보이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기후, 지형, 영토의 크기, 혹은 역사적인 이주 및 정착 패턴으로 인해 해당 국가들이 단순히 '자연적으로' 다른 국가들보다 더 다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Jahan, 1972; Wallerstein, 1960). 현재 836개의 언어가 활발히 사용되고 있으며 전 국민의 절반을 간신히 넘는 수준(53%)인 인구만이 지배적 국어(톡 피신어, Tok Pisin)를 구사하는 파푸아뉴기니의 극단적인 언어 다양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파푸아뉴기니는 울창한 정글의 밀도와 그로 인한 커뮤니티 간의 고립 때문에, 대중 교육이나 여타 동화 정책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프랑스의 초기 언어 다양성보다 그 수준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레이틴, 무르트가트, 로빈슨(Laitin, Moortgat, & Robinson, 2012)은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1997)의 『총, 균, 쇠』를 바탕으로 국가의 지형적 형태가 다양성의 정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들은 "동서 방향보다 남북 방향으로 길게 뻗은 지리적 영역일수록 언어적 다양성이 더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위아래로 긴' 국가는 여러 기후대를 관통하기 때문에 인구의 이동과 기술 혁신의 전파를 방해하는 반면, '좌우로 넓은' 국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Laitin et al., 2012, p. 10263).
지배 엘리트의 개입이나 공통 언어를 육성하려는 근대 국가의 의도적인 정책이 시행되기 전부터,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아랍어권 국가들이 높은 수준의 초기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지역으로 아랍어가 확산된 시기는 상대적으로 최근(주로 서기 6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이며, 이 지역 인구는 무역과 이주를 통해 높은 수준의 상호 작용을 유지해 왔다. 또한 종교적 의례와 성지순례에서 아랍어가 갖는 핵심적 지위는 통상적인 언어적 엔트로피(파편화) 현상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대중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문어체로서의 현대 표준 아랍어(Modern Standard Arabic)가 이 지역에 확산되기 전에도, 다양한 아랍어 방언들은 상호 간에 대체로 소통이 가능한 상태였다(Owens, 2001). 이는 한 국가 내에서는 물론, 국가 간에도 대개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표 1]에 나타난 아랍어권 국가들의 높은 동질성은 높은 '초기' 또는 '자연적' 동질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 의도적인 민족 형성 정책의 결과가 아니다.
현재는 전 국민의 평균 93%가 공통 언어를 구사하여 비교적 동질적인 구조를 지닌 유럽 국가들조차도, 불과 1~2세기 전만 하더라도 언어적으로 매우 이질적이었다. 일례로 과거 독일 영토 내에는 슬라브어를 구사하는 대규모 인구 집단(벤트족, 폴란드족, 루사티아 소르브족 등)이 존재했다. 심지어 독일어 구사자들 사이에서조차 방언의 차이가 너무 극심하여, 향후 독일이라는 국가가 되는 영토 내의 서로 다른 지역 간에 구어체 독일어로 상호 소통이 가능해진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되기 시작했다(Wells, 1985). 프랑스의 경우에도 19세기 말까지 영토의 대부분에 프랑스어를 쓰지 않는 인구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프로방스어, 카탈루냐어, 브레통어, 바스크어, 코르시카어, 오크어(랑그도크), 독일어 등 명확히 구분되는 지역 언어들이 공존했다(Grillo, 1989). 오젠 웨버(Eugen Weber, 1976)가 지적했듯, "제3공화국이 마주한 프랑스는 시민의 절반에게 프랑스어가 외국어나 다름없는 나라였다" (p. 70). 이는 당시 이미 반세기 동안 진행된 중앙집권적 공교육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3년이라는 늦은 시기까지도 프랑스의 37,510개 코뮌(communes, 행정단위) 중 8,381개 코뮌, 즉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프랑스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Weber, 1976). 또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나머지 인구의 상당수도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사투리(patois)를 사용했는데, 이 사투리 간의 격차는 오늘날 콩고의 수많은 반투(Bantu) 계열 언어들 간의 차이만큼이나 극심했다. 서유럽, 혹은 아래에서 논의할 인도네시아와 탄자니아의 사례 모두 극도로 높았던 초기 이질성 수준을 단일한 공통 국어로 축소해 낸 케이스들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한 국가가 보여주는 동질성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그 국가의 과거 혹은 '초기' 동질성 여부가 아니다. 핵심은 초기의 언어적 다양성이 어떤 케이스에서는 축소되었고, 왜 다른 케이스에서는 축소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는가이다
언어적 다양성의 편차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그럴듯한 요인은 특정 영토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지배를 받은 '시간의 양(통치 기간)'일 것이다. 만약 동화가 점진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통치 기간이 길어질수록 언어적 동질화가 더 많이 이루어지거나 지배 집단의 언어를 채택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장기 집권을 예상하는 통치자라면 피지배 인구의 문화적 특성에 투자할 유인이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지배 기간이 극도로 길었음에도 실질적인 언어적 효과가 전혀 없었던 사례는 허다하며, 반대로 학교를 통해 추진될 경우 언어적 동질화는 상당히 단기간에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410년 동안 지배했으나 일상생활은 광둥어가 지배했고, 교육 언어로는 영어가 사용되었다. 스페인은 1565년부터 1898년까지 필리핀을 지배했으나, 1870년 필리핀 인구조사에서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단 2.5%에 불과했다. 이는 유럽의 핵심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왕실은 현대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5세기 동안 지배했으나, 19세기 초까지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인구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이 역시 소수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따라서 통치 기간은 관찰된 동질성의 편차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아주 최근의 사례들을 보면 언어적 동질화가 급속한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1882년 이전까지 히브리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일상적인 구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1913년, 다양한 유대인 인구 사이의 민족적 단결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내 모든 단계의 유대인 교육에 히브리어가 채택되었다(Hofman & Fisherman, 1971).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히브리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인구가 대거 유입되어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는 지배적인 구어가 되었다. 이디시어, 아랍어, 프랑스어, 라디노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인구는 학교와 엄격한 국어 정책을 통해 빠르게 동화되었다. 1998년까지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인구의 81%가 사용하는 모국어(L1)가 되었으며, 현재는 거의 모든 이스라엘 시민이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히브리어를 구사한다. 마찬가지로 탄자니아에서도 스와힐리어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소수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인구의 90% 이상이 구사하는 지배적인 다수 언어로 자리 잡았다(Young, 1976).
마지막으로 고려할 가능성은 동질성의 차이가 '초기 국가 역량'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국가 역량을 갖춘 국가들이 인구를 동질화하기 위한 공교육이나 여타 민족 형성 정책을 더 잘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조세 징수와 같은 다른 영역에서의 초기 국가 역량은 공교육이나 동질화의 필수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아래 인도네시아와 탄자니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은 초기에는 매우 취약했던 국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즉, 국가 역량은 내생적(endogenously)으로 출현한 것이며, 이는 다름 아닌 민족 형성의 산물이었다(Hobsbawm, 1990). 더욱이 상대적으로 높은 역량을 갖춘 국가를 지배하는 엘리트라 할지라도, 모든 엘리트가 공통의 국어와 정체성을 구축하여 이질성을 감소시키려 하거나 국민 주권에 기반하여 통치하려 하지는 않는다(Gellner, 1983; Weber, 1976 등). 어떤 국가들은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나 파벌 간의 연합을 통해 통치되며, 또 어떤 국가들은 왕조의 잔재나 공산주의 같은 대안적인 권위 및 통치 모델에 집중해 왔다(Connor, 1984; Greenfeld, 1992). 많은 경우 엘리트들은 다민족·다언어 정치 체제를 제도화하고 육성했다. 핵심은 지배 엘리트가 인구를 동질화할 능력이 있었느냐가 아니라—가장 약한 국가조차도 동질화 교육 정책을 추진할 역량을 보여주었기 때문에—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는가 여부이다
초기 국가 역량?
1. 인과관계의 역전: "국가 역량은 민족 형성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보통은 '돈 많고 행정력이 좋은 정부(국가 역량)가 학교를 지어서 언어를 통일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 인도네시아나 탄자니아는 독립 직후 정부의 행정력이 무척 취약(Weak State)했다.
- 하지만 대외적 위기나 정치적 필요 때문에 무모할 정도로 공교육을 먼저 밀어붙였고, 그 공교육 시스템을 전국에 깔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정부의 행정력과 군사력(국가 역량)이 자라났다는 뜻이다.
- 즉, 국가 역량은 밖에서 미리 주어지는 게 아니라,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안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난 '내생적(endogenous) 산물'이다.
2. 능력이 있어도 안 하는 엘리트들: "다민족 분할 통치"
정부의 힘과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High-capacity) 국가라 할지라도, 지배 엘리트들이 '단일 민족, 단일 언어'를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 이유: 지배층이 소수 부족이거나 왕조 체제일 때, 오히려 피지배층이 하나로 똘똘 뭉치면(국민 주권) 자기들의 권력이 위험해진다.
- 따라서 이들은 일부러 다양한 부족 언어와 문화를 그대로 보존해주면서, 자기들끼리 연합하거나 파벌을 나누어 다스리는 '다민족·다언어 정치 체제'를 제도화하기도 한다. (능력이 있어도 동질화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3. 핵심 결론: 핵심은 Capability가 아니라 Choice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공교육은, 기술적으로 대단한 행정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거창한 작업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리 힘없는 막장 정부라도 마음만 먹으면 학교에서 특정 언어로만 수업하게 강제하는 '동질화 정책' 정도는 쉽게 해냈다.
대외적 위협과 민족 형성(External Threat and Nation-Building)
본 연구는 높은 수준의 언어적 공통성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인 민족 형성 정책의 산물이며, 이러한 민족 형성을 추진하겠다는 결정은 부분적으로 그 국가가 처한 국제 환경의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는 국가가 국가 형성 및 독립의 초기 단계에서 영토 보전에 대한 다음 두 가지 유형의 대외적 위협 중 하나에 직면할 때, 언어적 동질화를 추구할 유인을 갖게 된다고 제안한다. 첫째는 (a) 군사적 정복의 위협이며, 둘째는 (b) 외부 세력이 해당 국가 내의 비핵심 집단(소수 민족 등)을 이용해 분리 독립을 조장하거나 영토의 일부를 병합하려는 위협이다(제 5열 활동). 이러한 주장을 전개함에 있어, 본 연구는 민족주의와 민족국가 체제의 확산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으로서 경쟁적인 국제 환경, 전쟁 수행, 그리고 성공적인 군사 전술의 모방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선행 연구들(Posen, 1993; Tilly, 1990 등)을 바탕으로 한다. 아울러 지도자들이 민족 형성을 채택하게 되는 중요한 동기는 다른 강대국에 의해 자신들의 영토 보전이 위협받는 현실 혹은 그러한 위협에 대한 예상이라고 제안한다. 즉, 이러한 위협의 존재나 위협에 대한 인식이 지배 엘리트로 하여금 대중 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창출했으며, 이러한 정책들이 언어적 동질화에 부분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기여했다는) 것이 본 연구의 논지이다.
국가가 출현하고 발전한 환경 속에서 대외적 위협의 존재 여부는 지역별로, 그리고 시대별로 상이하게 나타나며, 이는 앞서 [표 1]에서 기술한 언어적 동질성 수준의 지역적 편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해 준다. 영토 정복과 관련된 실질적인 대외 환경은 흔히 '지역적 이웃(주변국 환경)'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적 동질성의 정도에서 지역별 평균치에 차이가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통계 결과는 우리의 예상과 일치한다.
국가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동질성을 보이는 지역 중 하나인 유럽의 경우, 영토에 대한 대외적 위협이 지속적으로 높았다. 근대 유럽 국가들이 발전한 수 세기 동안 국경은 끊임없이 변했고, 모든 국가는 영토 보전에 대한 대외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Spruyt, 1994; Tilly, 1975). 18세기와 19세기 북유럽과 중유럽에서의 영토를 둘러싼 군사적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이러한 경쟁은 19세기 중반과 20세기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오스만, 로마노프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남유럽과 동유럽으로 확산되었고,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은 경쟁 국가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자이크 같은 국경선을 남겼다. 이와 유사하게, 동아시아의 국경 역시 탈식민화 과정과 20세기 전반,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유동적이고 분쟁이 잦았으며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국경선이 고정된 시점(Timing of border fixity)"
다른 지역에서 이웃 국가나 과거 식민 지배국에 의한 영토 정복의 위협은 시기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으며, 경쟁국의 분리 독립을 조장하기 위한 외부 세력의 개입 위험 역시 모든 개발도상국에 일정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식민 열강들이 조약을 통해 이 지역 내 제국의 국경선을 대체로 고정해 두었으나, 탈식민화(독립) 과정은 지역 전반에 걸쳐 큰 편차를 낳았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와 같은 일부 국가들은 독립 전쟁과 영토 위협에 직면했던 반면, 라오스와 같은 다른 국가들은 대외적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다.
특정 역사적 시기에는 지역 내 국경선이 국제적 합의에 의해 고정되고, 강대국이나 지역 기구에 의해 안정적으로 강제되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19세기 말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 이후 강대국들이 국가 간 국경선을 사실상 '동결(freeze)'했으며, 그 결과 통치 엘리트와 경쟁 세력 모두 대외적 위협의 위험을 덜 겪게 되었다. 탈식민 시기 아프리카의 엘리트들 역시 1964년에 기존 국경선을 그대로 보전하기로 서로 담합(colluded)했다. 이에 따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대중 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은 흔치 않은 일이 되었으며, 이들은 평균적으로 낮은 수준의 언어적 공통성을 보인다.
그러나 국경선이 고정되는 타이밍(시기)이 매우 결정적이다. 만약 국가들이 이미 대외적 영토 위협에 직면하여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한 상태라면, 이후 수십 년 동안 국경이 안정되고 위협이 낮아진다고 해서 이미 형성된 동질성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먼로 독트린의 발표와 미국의 지역 패권은 미대륙의 국경선을 대체로 동결시켰으나, 이는 독립 직후의 초기 전쟁—특히 남미 지역—이 대외적 위협 조건하에서 민족 형성 노력으로 이어진 '이후'의 일이었다(Centeno, 2002). 마찬가지로 오늘날 유럽연합(EU)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국가 영토에 대한 대외적 위협이 거의 없지만, 그들의 인구는 이미 교육을 받았고 동질화가 '이미' 완료된 상태이다.
지금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해서, 과거에 했던 언어 통합(동질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의 핵심 주장은 대외 위협이 있어야 국가가 언어를 통합(공교육 투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지금 유럽이나 남미는 국경선도 딱 고정되어 있고 전쟁 위협도 없는데, 왜 여전히 언어가 90% 이상 통일되어 있냐?"
이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이 바로 이 문단이다. "그들이 지금 평화로운 건 맞지만, 그 평화가 찾아오기 '이전'에 이미 전쟁 위협을 겪으며 언어를 통일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번 학교를 세워 국어를 보급하고 온 국민의 언어를 통일해 두면, 나중에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갑자기 국어를 까먹고 옛날 부족 언어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2. 남미(South America)의 사례
- 과거 (독립 직후): 남미 국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자기들끼리 국경선을 두고 치열하게 땅 따먹기 전쟁(대외적 위협)을 벌였다. 이 위기 속에서 각국 정부는 살아남기 위해 공교육을 열고 국민들을 '칠레인', '아르헨티나인'으로 급격히 동질화시켰다.
- 이후 (평화의 시기): 그 이후에 미국이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고 남미에 패권을 행사하면서 "이제 더 이상 남미에서 전쟁은 없다. 국경선 고정해!"라며 국경을 동결(Freeze)시켰다.
- 결론: 미국 때문에 나중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국가들이 언어와 정체성 통합을 완료한 '이후'였기 때문에 남미는 지금도 높은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3. 유럽연합(EU)의 사례
- 오늘날 유럽연합 회원국들(프랑스, 독일 등)은 서로 군사적으로 침략할 일이 전혀 없다. 국경선은 완벽하게 안전하다.
- 하지만 그들은 이미 18~19세기에 피 터지는 영토 전쟁을 겪으며 전 국민에게 프랑스어, 독일어를 강제로 가르쳐서 동질화를 '이미' 끝내놓았다.
- 따라서 지금 대외 위협이 0%에 가깝다고 해서, 이미 통일된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해체되어 옛날 시골 사투리 분열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어적 공통성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서로 다른 국제 환경에 처한 국가들이 가졌던 유인의 근본적인 차이를 반영한다. 국경선의 고정을 보장하는 국제적 혹은 지역적 환경에 속했던 국가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 어떤 종류의 민족 형성 정책도 추진할 대외적 유인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언어적 공통성 달성 정책은 시행될 가능성이 낮아졌다. 더욱이 우리는 국경 고정의 확실성이 높다고 인식되는 지역일수록 외부 세력이 비핵심 집단(소수 민족)을 대외적으로 지원하는 현상도 덜 두드러질 것으로 예상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지원이 영토적 변화를 낳을 가능성이 낮아 외부 강대국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입'할 유인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는 대외적 유인이 없는 상황에서도 민족 형성을 추진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 유인이 정부의 선택을 구조화하는 한,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 국경선이 고정되고 대외적 위협이 적은 세계 여러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민족 형성 노력이 더 적게 나타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식민 열강에 맞선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경우, 국가 형성 이후 영토 보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도전에 직면한 경우, 민족주의와 국민 주권이 합법적 통치와 결부되던 시기에 군사적 경쟁을 겪은 경우, 혹은 외부 세력이 국경 내부에서 제5열(내통자)을 육성하려고 시도한 경우 등에는 국가가 민족 형성을 추진할 유인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군사적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충성심과 결속력을 다지고, 영토 내 인구가 분리주의와 '외세(alien)'의 지배 모두에 저항력을 갖추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군사적 경쟁이 치열하고 국경선이 유동적인 위협적인 대외 환경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 국가들은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더 높다. 만약 국가들이 이러한 구조적 유인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다면, 영토의 보전성을 상실하거나 국제 체제 자체에서 아예 '퇴출(소멸)'당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Nation-Building, Mass Schooling, and Linguistic Commonality
민족을 형성하는 데는 여러 잠재적 방법(대량 학살, 인구 교환, 이주 정착 정책 등)이 존재하지만, 본 연구는 가장 흔히 사용되는 동화주의 정책인 '통일된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을 통한 인구의 세뇌(indoctrination)'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국가적 교육 내용에는 공통의 '구성적 서사(constitutive story)'뿐만 아니라 공통의 국어 도입이 거의 항상 포함되기 때문에, 이 민족 형성 전략은 국민적 결속 및 충성심과 더불어 언어적 공통성을 한층 증진시킨다. 본 연구는 이 두 가지 결과물—공통 언어와 국민적 결속—을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나, 공교육 과정에서는 대개 이 둘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제공되었기 때문에 전자는 종종 후자를 보여주는 유용한 대리 변수(proxy)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논지는 지배 엘리트들이 충성심과 언어적 공통성을 함양하기 위해 통일된 국가 교육과정을 갖춘 공교육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교육과 민족 정체성 간의 연결 고리는 겔너(Gellner, 1983)에서 홉스봄(Hobsbawm, 1990)에 이르기까지 현대 학술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우리의 논지에서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공교육이 추진되던 19세기와 20세기 당시 정책 입안자들의 머릿속에서 교육 내용과 정치적 충성심 간의 연계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피히테(Fichte)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든, 학교 교과서인 『소련의 역사』에 관한 스탈린의 방대한 작업이든, 혹은 세르비아 교과서에 담길 수용 가능한 국가적 내용을 둘러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국제 협상이든 간에, 경쟁적인 지정학적 환경에 놓여 있던 유럽의 정책 입안자들이 충성심을 함양하고 인구를 동질화하는 데 있어 학교가 갖는 역할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실증적 증거는 차고 넘친다.
동화주의적 민족 형성 정책이 추진된 사례들을 보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표준화된 버전의 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문학, 역사, 지리, 음악 등 기본 교과목에 민족주의적 내용을 채워 넣어 보급했다. 이러한 국가적 교육 내용이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통해 국가 영토 전역에 단일하고 깊숙하게 퍼져나갔을 때, 이는 충성심이라는 공통의 유대를 형성했다. 그것은 개인을 가상의 친족 관계에 기반한 역사적 집단 속에 위치시켰고, 주권 국가와 동료 국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충성심과 의지를 길러냈다. 이것이 바로 새롭고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결속력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이러한 결속력을 창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국어의 진흥이었으며, 언어의 진흥과 정체성 형성은 대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공교육은 국어 진흥 정책과 결합될 때, 교육받지 못한 모든 인구 집단에 존재하던 언어적 다양성을 감소시켰다. 이러한 국가 정책은 데이비드 레이틴(David Laitin, 1998)이 『형성기 정체성(Identity in Formation)』에서 묘사한 '언어적 임계점 게임(linguistic tipping game)'에 영향을 미쳐 균형의 추가 공식적인 국가 언어 쪽으로 기울도록 만들었다. 사실 모든 '국어'는 드넓은 영토와 대규모 인구에 걸쳐 존재하는 실제 언어 공동체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문어와 구어의 표준화를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상주의적인 인공물(constructs)에 가깝다. 이러한 국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인구 간 소통 능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높은 이질성이 일반적인 규범이었다.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발견되는 높은 수준의 동질성은 독점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대개 이른바 '국어'의 발명과 공교육이 지닌 막강한 동화력의 결합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실제로 언어 보존을 연구하는 사회언어학자들은 이러한 지배적인 국어들이 언어적 이질성을 완전히 말살해 버리는 가공할 만한 수준 때문에 이를 '킬러 언어(killer languages)'라고 부른다. 뮐하우스러(Mühlhäusler, 1996)가 요약했듯 말이다.
"이러한 킬러 언어의 기원은 유럽 공교육의 발전, 특히 국가 안의 모든 이가 단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함으로써 중앙 정부의 개념을 구체화했던 프랑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및 그 모방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된 바로 이 이념이 그 이후 전 세계 언어의 사회사를 지배해 왔다. 이러한 언어들의 지배력에 대한 정당성은 정치적(달리 어떻게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겠는가), 경제적(다양성이 초래하는 비용 문제), 도덕적(인간에게는 미신과 지역적 적대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이유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이 모두는 결국 '발전'이라는 공통 분모 아래 수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p. 20)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공교육의 거대한 제도적 장치는 단순히 표준화된 국어를 통해 인구를 동질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공교육은 개인의 직접적인 경험이나 부모의 삶의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국민(peoplehood)'이라는 새롭고 추상적인 범주를 도입했다. 교육과정 전반에 스며든 구성적 서사(constitutive stories)는 이러한 새로운 집단적 정의와 충성심에 의미, 역사, 맥락을 부여했다. 당시에 이러한 교육은 국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집단적인 국가적 목표를 위한 자기희생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레이틴(Laitin)이나 데이비드(Darden)의 연구가 보여주듯, 학교는 집단들을 공통의 국어에 적응(문화 수용)시킬 뿐만 아니라 공통의 민족 정체성으로 동화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사후적 정체성(subsequent identities)은 놀라울 정도로 확고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따라서 기존 연구들이 단순히 '언어적 동질성'의 결과라고 돌렸던 사회적 효과(내전 감소, 경제 발전 등) 중 일부는, 사실 이 공교육이 만들어낸 '단단한 정체성' 자체의 독립적인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국제적 경쟁,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 그리고 언어적 공통성 사이에 다음과 같은 실증적 관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
- 가설 1 (고위협 환경): 영토 경쟁 수준이 높은 세계 여러 지역처럼, 초기 형성 과정에서 대외적 위협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국가들은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과정에서 관찰 가능한 중요한 함의는 국가적 내용과 단일 국어를 포함하는 공교육의 추진이다. 이 정책의 성공적인 이행(이 정책을 통한 문해율의 증가로 측정됨)의 결과는 더 높은 수준의 언어적 공통성으로 나타난다.
- 가설 2 (저위협 환경): 국경의 고정성이 높고 국가 간 군사적 경쟁이 낮은 세계 여러 지역처럼, 영토에 대한 대외적 위협이 낮은 환경에서 성장한 국가들은 다수의 언어를 사용하는 비단일적(분파적) 교육 체계를 가질 가능성이 더 높으며, 결과적으로 언어적 공통성도 낮게 나타난다. 인구를 동질화할 강력한 대외적 유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mpirics 실증 분석
본 연구의 주장은 구조적(structural)이다(Waltz, 1979/2010). 대외적 영토 위협의 존재(혹은 이에 대한 인식)가 국가로 하여금 민족 형성을 추진하도록 유인을 창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배 엘리트가 반드시 그 유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행동에 나서더라도 엘리트들이 이러한 인과관계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거나 논의하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논리 구조가 직접적인 사료(archival)나 과정 추적(process-tracing) 증거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이 영토에 대한 대외적 위협이 존재함에도 민족 형성을 추진하지 않은 국가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즉각적으로 영토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 연구의 논지는 확률론적으로 볼 때, 이들이 특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토 상실이라는 결과에 직면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본 연구의 주장은 역사적 시간이라는 범위 내로 한정된다. 대외적 영토 위협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으나, 민족주의라는 개념과 결속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민족 형성 및 공교육 활용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주로 시작된 과정인, 민족주의라는 아이디어와 대외 위협에 대응하는 데 있어 그것이 갖는 유용성이 전 세계로 확산된 '이후'에야 비로소 대외적 위협의 존재가 국가들로 하여금 동질화를 추구하는 민족 형성 정책을 채택하도록 이끌 수 있었다. 게다가 통일된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 체제의 수립과, 그 정책 대상 인구의 언어적 동질화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lag times)는 수십 년 단위로 측정되며 세대 간 변화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매우 길고 가변적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통계 데이터 수집과 회귀 추정을 까다롭게 만들기 때문에, 개별 사례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일반적 패턴들을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결실이 크다(Mahoney, 2000; Slater & Ziblatt, 2013). 높은 영토 경쟁이 통일된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과 그에 따른 높은 수준의 동화로 이어진 전형적인(paradigmatic) 사례는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들이다. 유럽에서는 이웃 국가들 간의 지속적인 경쟁과 표준 국어를 통한 자국 인구의 교육이 서로를 자극하며 상승효과(ratcheting effect)를 낳았다. 포센(Posen, 1993)은 프랑스 국민군(mass army)에게 패배한 프로이센이 명령 체계, 훈련, 정치적 동기부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초기에는 하사관 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통일된 국가적 내용의 교육을 확산시켰는지 보여주었다. 동일한 논리와 나폴레옹 프랑스의 정복 전쟁은 주변의 다른 게르만계 국가들 역시 자국 인구의 교육과 동질화를 추구하도록 만들었다(Harp, 1998). 프로이센의 교육 개혁 성공이 군대의 효율성과 1871년 프랑스 격파의 배후에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고, 이는 프랑스 스스로가 1881년 페리법(Ferry Laws)을 통해 독일의 개혁을 복제하도록 만들었으며, 멀리 떨어진 일본과 같은 국가들까지 독일의 교육 모델을 모방하기 위해 독일 관료들을 영입하도록 이끌었다(Weber, 1976). 모든 강대국에서 공통 국어를 통한 표준화된 교육은 19세기 말, 특히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볼리와 라미레즈(Boli & Ramirez, 1987)가 지적하듯,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국가들이 발전 수준이나 교육 확장에 흔히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조건들에서의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을 이토록 놀라울 정도로 보편적으로 추구했다는 사실은, 특유의 경쟁적인 국가 간 환경이 이 모델의 급격한 확장과 복제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수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정부 주도의 동화주의적 민족 형성 정책을 통해 높은 다양성이 말살되지 않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국가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초기 국가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교육 역량을 창출하고 언어적 이질성을 감소시키는 능력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유럽 국가들의 초기 국가 역량, 더 긴 국가 지속 기간, 그리고 여타 특성들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는 비유럽 사례들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사례는 초기의 언어적 이질성은 높고, 초기의 국가 역량은 낮았던 국가들이다.
대외적 영토 위협이 미치는 구조적 효과를 부각하기 위해, 본 연구는 초기 상태에서는 언어적으로 매우 이질적이고 중앙 정부의 역량도 비교적 제한적이었으나, 독립 과정과 그 이후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 영토 위협에 직면했던 국가(인도네시아)와, 국제적 합의로 인해 국경선이 고정된 것으로 인식되고 대외적으로 보장된 조건에서 성장한 국가(콩고/자이르)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Indonesia: High External Threat and Mass Schooling With Uniform National Content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확보했을 당시, 영토 내에는 75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7,550만 명의 인구는 18,000개의 섬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중 922개의 섬에 사람이 영구 거주하고 있었다. 1950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고작 80달러에 불과하여 세계 최하위권에 속했다(Maddison, n.d.). 15세 이상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해율은 겨우 15%에서 20% 사이에 불과했다(UNESCO, 1957).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는 자바어였으나, 이 역시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하는 인구가 사용했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민족주의 운동 진영이 국어로 선택했던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는 독립 당시 전체 인구의 5% 미만만이 구사할 수 있었다. 이처럼 대규모 인구가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고 이질성이 극심한 데다, 관료적 역량과 조세 징수 능력이 제한된 신생 독립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초기 국가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국가 형성이나 국민적 결속 구축을 용이하게 해줄 지리적·인구학적 조건도 전혀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달성한 치명적인 초기 시기에 앞서 논의한 두 가지 유형의 대외적 위협 모두에 직면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대중 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 캠페인을 개시했다. 무엇보다도 인도네시아는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일본의 패망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행정을 넘겨받았던 네덜란드와 영국은 인도네시아 독립의 형성기에 치명적인 대외적 위협을 구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과거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영국의 군사적 통제하에 들어갔고, 영국은 과거 식민지의 주권을 네덜란드에 돌려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대응하여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 진영은 1945년 독립을 선언했고,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세력 간의 전쟁이 4년 동안 이어졌다. 1949년 네덜란드가 철수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비록 서파푸아 지역은 여전히 분쟁 중이었지만)한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국가는 민족주의 운동 진영이 인도네시아 영토로 간주했던 지역들을 둘러싸고 과거 식민 열강 및 말레이시아와 국경 분쟁을 지속했다. 국경선은 계속해서 경합 상태로 남았으며, 일부 분쟁은 공격적인 군사 행동과 병합을 통해 해결되기도 했다.
둘러싼 대외적 위협의 두 번째 유형으로, 인도네시아의 후기 식민지 시대와 독립 초기 역사의 상당 부분은 외부 세력이 독립된 인도네시아 국가를 약화시키거나 영토를 제한할 목적으로 다양한 민족 집단들을 동원하는 과정으로 점철되었다. 외세의 부당한 개입(meddling)이 만연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지도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치하의 협력 정부를 거치며 단련되었다. 일본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맞서 연대감을 구축하기 위해 가장 큰 언어 집단인 자바인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군대를 조직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영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반작용이었는데, 이들 식민 당국은 핵심 집단(자바인)의 민족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비핵심(소수) 집단들을 동원하는 '분할 통치(divide-and-rule)' 전략을 취해왔으며, 일본 점령군과 이후의 인도네시아 독립에 맞서 이들 소수 인구를 동원하려 했다. 네덜란드는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 영토를 쪼개어 소규모 민족 국가들을 난립시키고자 '파순단(Pasundan)' 국가 수립, 발리 민족주의, 암본(몰루카 제도) 사람들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국가에 대한 여타 영토적 도전을 부추겼다. 호로비츠(Horowitz, 1985)가 지적했듯, "강력한 반식민지 운동의 존재는 그 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집단들과 식민 정권에 가장 긴밀히 결탁했던 집단들 간의 분열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p. 517). 우리는 이러한 위기 상황이 인도네시아 정부로 하여금 민족적 한계를 초월하고, 인구를 언어적으로 동질화하며, 국민적 결속을 창출하기 위한 민족 형성 정책을 추진하도록 만드는 유인을 강력하게 증가시켰다고 상정하며, 이것이 바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정확히 실행한 바였다.
독립 전쟁 이전에도 네덜란드의 민족 분열 책동에 대응하여, 1928년 네덜란드 통제하의 인도네시아에서 성장한 민족주의 운동 진영은 네덜란드에 맞선 투쟁을 촉진하고자 말레이어 계열의 언어인 인도네시아어를 국어로 채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 협력했다. 일본은 네덜란드와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와 인도네시아어 보급을 기꺼이 장려했다. 일본 점령기 동안 네덜란드어 사용은 금지되었고, 인도네시아어는 행정 언어가 되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냉전 이후에도 주변국 말레이시아와의 경쟁(대개 인도네시아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지만) 및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탈식민지기 개입은, 독립 시기에 발현되었던 대외 선동에 의한 분리 독립 및 반란에 대한 공포를 지속적으로 자극했다. 또한 화교(ethnic Chinese) 집단과 외부 세력—대만 및 중화인민공화국 모두—간의 연계에 대한 지속적인 두려움 역시 민족 형성을 추진할 유인을 자극했다.
이러한 대외적 위협의 맥락 속에서, 인도네시아는 국가적 단결을 다지고 외세가 조장하는 선동과 분리 독립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겠다는 명시적인 목표하에 1950년대부터 학교를 통한 매우 적극적인 국어 진흥 전략을 추구했다. 1950년대 초부터 인도네시아 정부는 성인 교육 클래스, '인민 도서관' 개설, 수천 개의 학교 설립을 망라하는 대대적인 공교육 및 문해력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캠페인이 (수도인) 자카르타 시를 제외한 그 어떤 지역에서도 문해율을 즉각 50% 이상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으나, 전국적으로 인도네시아어를 유일한 국어이자 (3학년 이상) 교수 언어로 사용하는 대중 교육 제도를 확립했다. 1952~1953년 인도네시아 전체의 학령기 아동은 12,307,026명이었는데, 그중 6,391,101명(52%)이 학교에 등록하여 다니고 있었다. 등록률과 문해율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문해율은 1961년 42.9%, 1971년 59.6%, 1980년 67.3%, 1990년 81.5%로 증가했고, 2004년에는 90%를 상회했다.
2010년에 이르러 인구는 2억 3,764만 2,000명에 도달했고, 이 중 2억 1,000만 명(88%)이 인도네시아어 구사자였다(인도네시아 인구조사, 2010). 비록 이중언어 사용이 지속되고 있으나, 뮐하우스러(Mühlhäusler, 1996)에 따르면 "이러한 양층언어 현상(diglossia)이나 이중언어 사용은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이며, 향후 두 세대 안에 인도네시아어 단일 언어 사용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한다(p. 205). 자바어를 비롯하여 수백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인도네시아어는 정부, 교육, 공적 생활에서 제도적으로 유지되는 유일한 언어이다. 언어 다양성 보존을 우려하는 언어학자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유행병 같은 언어 전환(epidemic language shift)'이나, 대중 교육을 통한 보급의 결과로서 인도네시아어가 수행한 '킬러 언어(killer language)'로서의 역할에 대해 기술한다. 다양성 보존에 대한 규범적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영토 보전에 대한 명확하고 현존하며 인지된 위협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 독립의 순간에 다져진 의도적인 민족 형성 정책의 일환으로 인도네시아 사례에서 대규모 동질화가 완수되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Low Geopolitical Competition and Mass Schooling With Heterogeneous Content: Sub-Saharan Africa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19세기 말 이후 국가 간 전쟁, 국경 변동, 대외적 위협이 거의 부재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각 식민 열강의 비교적 평화로운 철수 이후 독립을 성취했으며, 지난 세기의 대부분 동안 아프리카 내전에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었던 경우에서조차 영토를 강탈하거나 국경을 변경하려는 시도는 없었다(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등이 예외에 속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분쟁의 대다수는 내전이었다. 대체로 20세기에 이 지역 국가들이 민족 형성을 추진할 유인은 아시아의 일부 지역이나 19세기 유럽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제 환경은 민족 형성 정책의 내부적 전개와 궁극적으로는 언어적 공통성의 정도를 어떻게 형성(결정)했는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은 언어적으로 가장 이질적인 국가들에 속한다. 사실상 모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적 다원주의'를 보존해 왔다(Young, 1976). 본 연구는 이러한 다양성이 식민 열강과 독립 아프리카 국가들 모두가 민족 형성 정책을 채택하지 않은 결과라고 제안하며, 그 주된 이유는 그들에게 그렇게 할 유인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사례에서는 초기의 언어적 이질성이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만약 국제 환경이 달랐다면 상황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콩고/자이르의 사례를 보라.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콩고 역시 높은 수준의 언어적 이질성에서 출발했는데, 1969년 에스놀로그(Ethnologue) 기록에 따르면 110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했고 가장 큰 언어 집단인 루바(Luba)어 구사자는 총인구 1,750만 명 중 300만 명, 즉 고작 17%에 불과했다. 독립 당시의 문해율 역시 비슷하게 낮아서, 1970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 어떤 언어로든 읽고 쓸 수 있는 비율이 33%에 불과했다—그리고 이 낮은 수준 안에서조차 다수의 서로 다른 언어로 문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탈식민화 당시 콩고의 국가 역량은 인도네시아보다 딱히 더 나을 것이 없었다. 1960년 기준 1인당 GDP는 748달러였다.
영(Young, 1985)이 콩고/자이르와 관련하여 지적했듯이, 인구의 절대다수가 사용하는 반투(Bantu)어군, 특히 친연 관계에 있는 콩고-니제르어군 사이에는 통합, 동질화, 그리고 표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높은 잠재력이 존재했다. 특히 영은 표준 문어(국어)가 쉽게 정립될 수 있었던 전반적인 '콩고 언어대(Kongo linguistic zone)'에 대해 기술하는데, 이는 인도네시아어가 말레이 방언들을 통합하기 위해 국어로 정립되었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 '콩고 언어대' 내의 교육은 수많은 서로 다른 복음주의 선교 단체(선교회)들로 파편화되어 있었고, 이들 각 단체는 식민지 시절 초등 교육에서 저마다 다른 언어와 정체성을 추구했다. 언어와 충성심 모두의 기본 단위는 국가가 아니라 선교회의 '신도단(congregation)'이었으며, 교육은 이러한 단위들을 강화하고 차별화했다(Young, 1985). 독립 이후에도 교육은 여전히 주로 교회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MacCaffrey, 1982). 1974년 국가가 통제권을 장악하고 '자이르화(Zairianization)'를 추구하려 했던 단기적이고 불완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1976년에 다시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다. 문해율은 1980년까지 50%로 증가했으나, 통일된 국가적 내용을 담은 단일한 중앙 정부의 교육과정도 없었고 함양된 국어도 없었으며, 대신 다수의 언어가 존재했다. 콩고/자이르의 경우, 언어적 이질성의 육성은 식민지 시대와 독립 이후 모두에서 교육을 선교 조직에 위탁(대행)하기로 한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국경선이 고정되고 보장된 환경 속에서, 그들은 민족 형성을 추진할 아무런 유인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언어적 이질성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프랑스어가 공식 국가 공용어이기는 하지만, 인구의 단 9%만이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추가로 30%만이 어느 정도의 프랑스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다. 식민지 시절에 공통 통용어(lingua franca)로 선택되었던 링갈라(Lingala)어는 약 2,141,300명의 모국어 구사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700만 명을 추가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고작 13%에 불과하다. 학교에서 육성된 몇몇 언어들이 서로 다른 지역이나 정부 부처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키콩고어, 링갈라어, 칠루바어, 스와힐리어), 지배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링갈라어가 '군대'의 공식 언어라는 사실은 대외적 위협에 맞선 집단적 동원의 필요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내부 경쟁 세력에 맞서 특정 민족 파벌들을 동원해 온 이 나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유물(artifact)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사례들도 우리에게 유사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잠비아 역시 높은 수준의 언어적 이질성에서 출발했으나, 공통의 국어로 발전할 수 있었던 몇 가지 핵심적인 언어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포즈너(Posner, 2003)는 잠비아의 사례에 초점을 맞추어 "식민주의가 민족 집단의 형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 상대적 크기, 그리고 공간적 분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한다(p. 127). 포즈너는 식민지 시대 말기의 문해율이 41.3%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정책은 물론 선교회와 광산 회사의 행동이 어떻게 잠비아의 언어 지도를 50개 이상에서 단 4개로 통합(정리)해 나갔는지 보여준다.
독립 시기에 잠비아는 그 어떤 대외적 영토 위협에도 직면하지 않았다. 1990년까지 잠비아인의 78.8%가 벰바(Bemba)어, 냔자(Nyanja)어, 통가(Tonga)어, 로지(Lozi)어를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사용했다(Posner, 2003). 이처럼 수많은 언어에서 소수의 언어로 통합되는 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합심한) 민족 형성 노력은 부재했으며 따라서 언어적 공통성은 여전히 낮은 상태로 남아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인 벰바어조차 인구의 26%만을 커버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제한적인 통합조차 높은 수준의 양층언어 현상(diglossia, 이중언어 상태)을 보존시켰다. 포즈너(Posner, 2003)가 표현했듯, "사람들은 자신의 '옛' 언어를 '새로운' 언어와 맞바꾼 것이 아니라, 두 언어를 모두 포함하는 언어적 레퍼토리를 발달시켰던 것"이다(p. 142).잠비아와 콩고 역시 민족 형성을 추진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할 대외적 유인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들 국가의 역량이 인도네시아보다 딱히 더 약했던 것도 아니며, 사회가 더 이질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탄자니아의 예외적인 사례는, 비록 지정학적 환경이 민족 형성을 추구할 유인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동화와 학교 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의 기회가 열려 있었음을 증명한다. 잠비아, 콩고(혹은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탄자니아 역시 매우 높은 수준의 언어적 이질성과 낮은 국가 역량에서 출발했다. 독립 당시 탄자니아에는 약 181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했으며, 가장 큰 집단인 수쿠마(Sukuma)족의 모국어 구사자는 당시 총인구의 고작 12%인 약 1,500만 명에 불과했다(Kaplan, 1968). 1961년 GDP 대비 조세 비율은 겨우 15%였고 1인당 GDP는 459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탄자니아 역시 선교 학교들을 물려받았는데, 이 학교들은 문해율 20% 미만으로 극소수의 인구에게만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추가적인 이질성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 직후, 탄자니아 국가는 모든 교육 기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스와힐리어 중심의 표준 교육을 추진했으며, 독립 이후 자리 잡고 있던 수많은 민족·부족적 차별성을 넘어서 공통의 민족 정체성을 함양하기 위해 강력한 노력을 기울였다(Hydén, 1980). 국가 교육 캠페인의 일환으로 교육 지출이 대폭 증가했으며, 1981년까지 문해율은 50%를 초과했고 스와힐리어는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분명 탄자니아의 이러한 선택은 대외적 환경의 기능이 아니라, 다른 이유(사회주의적 이념 등)로 민족 형성을 추구했던 공산주의 스타일의 지도부(레너드 니에레레 정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통한 동화를 전략으로 선택한 원인(동기)은 달랐을지라도, 그 효과는 매우 유사했다. 그리고 여기 탄자니아에서도 인도네시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민족 형성 정책의 결과로서 높은 수준의 언어적 공통성이 달성되었다. 이 예외적인 사례가 드러내는 바는,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이 아프리카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선택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옵션'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민족 형성을 추진할 대외적 유인이 부재했기에, 이러한 정책이 거의 추진되지 않았을 뿐이다.
The Bite of Structural Reality: Failure to Respond to External Incentives and Loss of Territorial Integrity
탄자니아의 사례는 지배 엘리트들이 항상 대외적 위협 환경에만 기반하여 민족 형성 선택을 내리는 것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학교 교육을 통한 민족 형성의 대외적 유인이 없는 국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경우, 그 결과는 대개 다른 발전적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언어적 공통성과 국민적 결속으로 나타난다(Miguel, 2004). 그러나 지배 엘리트가 대외적 위협에 직면했음에도 이러한 유인에 민족 형성 정책으로 대응하지 않거나, 혹은 이미 뚜렷하게 형성된 별개의 민족 정체성을 지닌 교육받은 인구를 통치하는 경우, 국민적 결속을 창출하지 못하는 이러한 무능력은 반드시 대가(비용)를 수반하게 된다. 즉, 본 연구가 상정하는 구조적 유인(대외 위협)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민족 형성이 추진되지 않거나 실패할 때, 우리는 그 국가가 '영토 보전성의 상실(분열 및 소멸)'을 겪게 될 것이라 예상한다.
민족 형성 정책이 '실패'하는 흔한 원인은, 이전의 정체성 구축 노력이 이미 성공하여 인구가 '이미 다른 언어와 정체성으로 교육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통일된 국가적 내용으로 교육을 마친 영토들이 모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거나 그 영토들이 편입될 때 발생했다. 예컨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인구는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편입될 당시 이미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문해율은 각각 약 85%와 60%에 달했다. 게다가 양차 대전 사이의 유고슬라비아 정권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정권도 학교 교육과정을 단 한 번도 중앙집권화(통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파편화(분할형 교육)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 민족을 견제하고, 세르비아에 의해 더 작은 슬라브 집단들이 하위 민족적으로 동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티토(Tito) 대통령의 정치적 목표에 부합했다. 즉,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들의 각 교육과정에서는 공통의 '유고슬라비아인' 정체성이 아니라, '서로 분리된 별개의 정체성'이 육성되었다.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의 문해율은 1980년대에 이르러 90%를 훨씬 상회하며 대중 공교육이 완전히 완료되었음을 보여주었으나, 인구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교육과정으로 학습받았기 때문에 하위 주(연방 공화국) 단위의 민족 정체성에 비해 유고슬라비아 국가에 대한 결속력과 충성심은 거의 창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는 영토 보전성의 상실이라는 위기를 반복해서 겪었으며, 결국 1990년대의 폭력적인 연방 해체(소멸)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레바논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발견하는데, 레바논은 일찍이 1950년에 인구의 약 5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나 교육 체계가 공통의 국가적 내용 없이 지역적·종파적 노선에 따라 분열되어 있었다(UNESCO, 1957). 이곳 역시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파벌들이 주기적인 전쟁(내전)에 가담한 결과, 영토의 보전성을 간신히 유지하거나 때로는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장 오래 지속되고 해결하기 어려운 내전 중 하나인 키프로스는 높은 문해율, 높은 이질성, 그리고 대외적 위협 및 침략으로 인한 '영토 보전성의 상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키프로스에서는 교육을 통해 민족적 다양성이 육성되고 정치화되었다. 섬에 관한 상충되는 구성적 서사(constitutive stories)를 배양한 공동체별 분리 교육은, 영국이 식민지 초기에 전개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의 기능(산물)이었다. 18세기와 20세기 초, 키프로스인이라는 단일한 민족 정체성을 구축할 아무런 유인이 없었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유산을 이어받아 터키계 공동체와 그리스계 공동체를 각각 자신들의 학교를 통제할 권리를 가진 별개의 종교 공동체로 취급하며 섬의 교육에 개입하지 않았다. 1878년부터 1895년까지 학교들은 영국의 제한적인 재정 지원하에 전적으로 자발적인 공동체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1895년의 교육법은 터키계 학교와 그리스계 학교를 서로 독립된 별도의 교육위원회 관할하에 둠으로써 학교의 공동체적 분열을 공식화했다. 키프로스가 대영제국의 직할 식민지(Crown Colony)가 된 이후인 1929년과 1933년의 교육법에 이르러서야 학교들이 영국 식민 당국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공동체 중심의 교육 구조는 대체로 보존되었다.
그리스계 키프로스 엘리트들이 먼저 결집했고, 터키계 정체성의 발달은 섬 전체에 대한 그리스계의 영유권 주장에 맞불을 놓기 위해 터키 공화국의 대외적 지원을 받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어났다. 그리스 민족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주로 정교회(Orthodox Church)의 독려와 그리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기독교 정교회를 믿는 키프로스 엘리트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그리스계 키프로스 학교들은 그리스 국가의 주권하에 역사적인 모든 그리스 영토와 그리스 민족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강조하는 그리스의 표준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스계 인구의 교육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어 엘리트층에서 시작해 1930년대에는 거의 전원 등록(취학)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이 1931년에 섬의 학교 체계를 인수했을 때 그들은 보편적 초등 교육을 밀어붙였으나, 다른 지역에서의 영국 제국주의 관행과 마찬가지로 교육과정에 대한 통제권은 고도로 지방 분권화(방치)된 상태로 남겨두었다.
이러한 공동체별 분리 교육의 결과로, 키프로스에는 민족적 충성심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두 공동체가 남겨지게 되었다. 섬의 기독교 정교회 공동체는 자신을 그리스인으로 강하게 정체화하고 그리스 민족국가와의 통합(에노시스, enosis)을 갈망하도록 교육받았다. 반면 무슬림 키프로스(터키계) 공동체는 비록 교육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자신을 터키 국가와 정체화하도록 교육받았다. 터키나 그리스 국가를 철천지원수(mortal enemy)로 바라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두 공동체 중 그 누구도 키프로스가 상대방 국가의 주권하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따라서 에노시스(그리스 통합)를 향한 그리스계의 노력이 무슬림 공동체의 무장 반발을 촉발한 것도, 1974년 터키군의 키프로스 침공이 영토 보전성의 상실(분단)로 이어진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침공은 무슬림 공동체에게는 환영받았으나, 기독교 정교회 공동체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일부 국가들은 국가적 동질화 의무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지 않았던 다른 국가나 제국 내에서 성장했으며, 따라서 공통의 정체성과 언어에 기반한 결속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예컨대 1991년에 독립한 많은 구소련 공화국들은 소련의 교육 내 민족 정책(Soviet nationalities policies in education)의 결과로 국가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비국가적 민족 정체성(소수 민족 정체성)을 지닌 집단들을 내부에 배태하고 있었다(Martin, 2001). 소련의 붕괴와 그에 따른 독립 이후, 이들 신생 독립국은 외부(러시아 등)의 지원을 받는 분리주의 운동의 결과로 영토 보전성에 대한 위협과 실제적인 영토 상실 모두에 직면해 왔다.
남오세티아인, 압하지야인, 아자리야인은 각각 조지아인(게오르기아인)과 자신들을 구별 짓는 교육과정을 가진 자치 공화국을 보유하고 있었다. 체첸인들은 러시아인이 되도록 교육받지 못했다. 타지키스탄의 고르노-바다흐샨 지역에 사는 파미리인들은 자치주와 독자적인 교육 체계를 가졌으며, 타지크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함양되지 않았다. 트란스니스트리아(트랜스니스트리아)의 슬라브족과 몰도바인들은 소련 체제하에서 교육을 받았던 반면, 몰도바 대다수의 루마니아어 구사자들은 양차 대전 사이 루마니아 치하에서 루마니아인으로 정체화하도록 학교 교육을 받았다. 아제르바이잔의 카라바흐(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은 투르크계(아제르바이잔인)에 적대적인 역사 교육과정을 통해 아르메니아인으로 정체화하도록 교육받았다. 1991년 당시 러시아, 조지아, 몰도바,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은 모두 높은 문해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그들 국가가 제공한 교육 내용의 이질성(파편성)은 이들 국가의 인구 내에 결속력 있는 국가적 충성심이 없었음을 의미했으며, 러시아어 외에는 그들 인구를 하나로 묶을 공통 언어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국가는 모두 일시적 혹은 영구적인 '영토 보전성의 상실(분단 및 영토 강탈)'을 경험했다.
Conclusion
세계의 모든 지역은 한때 언어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이질적이었다. 이주, 무역, 정착의 패턴은 물론 시간의 흐름과 지리적 고립에 따른 자연스러운 엔트로피(분열) 현상은, 결과적으로 주권 국가가 된 사실상 모든 영토에서 언어적·민족적 이질성을 발생시켰다. 유럽과 동아시아에 지역적으로 집중된 일부 국가들의 경우, 배제적(배타적) 정책뿐만 아니라 대중 교육을 통한 국어의 보급을 통해 언어적 이질성이 감소했다. 반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지역적으로 집중된 다른 국가들의 경우 이질성이 고착화되었고 때로는 강화되기까지 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민족 형성 정책이 전혀 추진되지 않았던 것이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대외적 위협—직접적인 군사적 대결과 경쟁국의 약화 및 분열을 노리고 민족적 분열을 조장하는 간접적인 노력 모두—과 민족 형성을 추진하겠다는 결정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연결 고리가 현재 우리가 전 세계에서 발견하는 언어적 공통성과 국민적 결속의 정도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하고 기본적인 지역적 패턴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민족적 차이점이 정치화될 수 있던 시대에 대외적 위협에 직면했던 국가 엘리트들은 자국 인구를 동질화할 유인을 가졌다. 반면 대외적 위협이 대체로 부재했던 사례들에서는 이질성이 그대로 보존되거나 의도치 않게 강화되었다.
영토 경쟁, 민족 형성, 그리고 언어적 동질성 수준 사이의 이러한 연계는 지금까지 충분히 탐구되지 못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선행 연구들은 국가 간 군사적 경쟁과 국가 형성(State-building)의 관계를 탐구해 왔는데, 이는 오토 힌체(Otto Hintze)를 거쳐 찰스 틸리(Charles Tilly), 제프리 허브스트(Jeffrey Herbst), 그리고 아칠리(Atzili)부터 티스(Thies)에 이르는 일련의 현대 학자들로 이어지는 전통이다. 국가 간 군사적 경쟁과 국가의 조세 및 지출 능력(재정 국가 역량) 간의 연계는 오랫동안 확립되어 왔으나, 대외적 위협과 언어적 공통성 간의 연계는 그렇지 못했다. 개발도상국의 발전, 국가 역량, 그리고 내전을 설명함에 있어 '민족언어적 이질성(ELF)'에 부여된 중요성을 감안할 때, 동질성과 국가적 충성심을 낳은 원인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원인의 상당 부분이 국가 외부의 환경, 즉 국가 간 환경(국제 체제 수준)에서 발견된다고 제안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어적 이질성은 그것이 설명하기 위해 자주 동원되는 수많은 정치적·발전적 과정에 대해 흔히 내생적(endogenous,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라는 점이다. 포즈너(Posner, 2003)가 잠비아의 언어 분열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한 국가의 민족언어적 다양성은 "단순한 사회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다양성과 공통성의 역사적 생산 이면에 체계적인 패턴이 깔려 있음을 입증했다. 이 '산물'은 종종 자국의 영토 보전에 대한 대외적 위협에 대응하여, 국가적 내용을 담은 공교육을 통해 민족 형성을 이루고자 했던 통치 엘리트들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은 정부가 대외적 유인에 기반하여 민족 형성, 특히 통일된 국가적 내용을 갖춘 대중 교육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다. 물론 대중 공교육이 국가가 국민적 결속과 언어적 공통성을 달성한 유일한 수단은 아니었다. 국가들은 피통치자들을 동화시키고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교육 외에도 종교 제도, 보조금, 그리고 여타 도구들을 사용해 왔다. 더욱이 국가 엘리트들은 인구를 동화시키는 대신, 잠재적으로 불충성스럽다고 믿어지는 집단에 속한 인구를 교환하거나 추방하거나 학살(소멸)하기도 했다. 밀로나스(Mylonas, 2012)에 따르면, 어떤 집단이 말살 대신 동화의 표적이 될지는 대체로 그 국가가 가진 구성적 서사의 내용뿐만 아니라, 해당 소수 집단의 대외적 배후 강대국(patron)과 수용국(본국) 간의 국제 관계에 달려 있다.
국민적 결속과 언어적 동질화에 이르는 경로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과정이 가져오는 장기적 결과는 매우 강력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우리가 확인한 광범위한 패턴은 학교를 통한 민족 형성 결정이 사후적으로 그 국가가 내부 전쟁, 특히 민족 내전을 겪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며, 나아가 조세 징수, 징병, 그리고 공공 서비스 제공에서 국가적 충성심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질성, 즉 민족언어적 파편화는 국가 형성의 장애물이거나 국가 취약성의 근본 원인이라기보다는, 대외적 위협의 부재로 인해 민족 형성에 참여하지 않기로 선택한 결정의 산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적 이질성은 취약국이나 불안정성의 '외생적(근본적) 원인'이라기보다는, 국제적 원인에 의해 형성된 취약국의 한 가지 '속성(결과)'에 가깝다.
Notes
1. '언어'와 '정체성'의 분리 및 대리 변수의 한계 (Note 5, 6)
- 저자들은 본문에서 '언어 통합'을 '국민적 결속'의 대리 변수(Proxy)로 썼지만, 주석을 통해 "이 둘은 엄연히 다른 현상"임을 명시했다. 특히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문헌들이 흔히 "언어가 동질한 나라가 경제 성장도 잘하고 공공재 공급도 잘한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들은 "사실 언어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국민적 결속력(National Cohesion)'이 높아서일 것"이라는 날카로운 직관을 던진다.
- 언어적 동질성 데이터(ELF)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인과관계의 왜곡을 방지하는 정교한 논리로 인용하기 좋다.
2. 완벽한 예외 사례의 통제: '스위스' 모델 (Note 5, 14)
- 대외 위협이 높으면 무조건 '단일 언어'로 동질화된다는 가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례가 바로 스위스이다. 스위스는 사방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고위협 환경이었음에도 다국어(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체제를 유지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국가 구성 서사(Constitutive Story)에 단일 언어가 묶여있지 않은 특이한 케이스일지라도, 대외 위협은 언어 통합 대신 다른 방식의 '국민적 결속력'을 다지도록 강제한다"고 방어막을 쳤다.
- 내 가설에 치명적인 반례(Outlier)가 존재할 때, 이론의 핵심 메커니즘(위협 → 결속)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예외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포섭(Isolate)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방법론적 모범 예시이다.
3. 지배 엘리트의 '무의식적' 구조적 대응 (Note 16, 17)
- "대외 위협이 있을 때 엘리트들이 동질화 교육을 한다"고 하면, 역사 사료(회의록 등)에서 "우리는 대외 위협 때문에 학교를 짓는다"는 기록이 나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노트 17에서 저자들은 "엘리트들이 이를 너무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 사료에 직접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환경에 반응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즉, 주관적 기록보다 '거시적인 실증 패턴(Broader Empirical Pattern)'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 사료 분석(Process-tracing)에서 엘리트들의 직접적인 발언 기록이 부족할 때, 구조주의(Structural) 이론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강력한 논거가 된다.
4.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국경 분쟁: 'Konfrontasi' (Note 21)
- 내용: 인도네시아가 겪은 대외 위협의 구체적인 실태로 1963~1966년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결(Konfrontasi)'을 언급한다. 인도네시아는 영국령 보르네오 섬의 국경 조약을 거부하고 무력을 행사하며 신생 말레이시아의 국경을 위협했다.
- 인도네시아 사례를 구체적으로 서술할 때, 단순히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 전쟁'에만 그치지 않고 냉전기 주변국과의 실질적인 군사 충돌(지정학적 위협)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팩트로 활용할 수 있다.
5. 찰스 틸리(Charles Tilly) 및 배리 포센(Barry Posen)과의 차별화 (Note 10, 31)
- 저자들은 거장들과의 학술적 계보를 정리한다.
- 찰스 틸리: 대외 전쟁 위협이 국가의 '조세 역량(Taxation)'을 키웠다.
- 배리 포센: 대외 위협이 프랑스식 '대규모 국민군(Mass Army)' 모방을 낳아 민족주의를 확산시켰다.
- 본 논문의 기여: 저자들은 이 논의를 한 단계 더 확장하여, 단순히 군대 작전 효율성을 넘어 "외세의 영토 강탈, 분리 독립 조장, 내부 간첩(제5열) 공작에 저항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인구'를 만들어내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공교육과 언어 동질화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