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계몽적 자유주의와 선의의 제국

박성우. (2026). 밀: 계몽적 자유주의와 선의의 제국. 박성우 외 저, 『서양국제정치사상』. 아카넷.

Mar 23, 2026
 계몽적 자유주의와 선의의 제국

밀의 정치사상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to)를 넘어, 사회적 다수의 횡포와 권위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를 강조한 19세기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원형이다. 그는 18세기 이전의 핵심 가치였던 '자기 지배(self-ruling)'가 근대 대의제 안에서 다수의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에 밀은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위해(또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제시하며, '자기 관련 행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다. 이는 적극적 자유가 도덕이나 관습의 이름으로 악용될 소지를 막기 위한 '소극적 자유'의 옹호였다.

그러나 밀의 이 자유주의는 비유럽 지역을 향한 대외 정책인 '제국주의'와 만나는 지점에서는 기묘한 예외가 있다. 밀에게 제국주의는 자신이 신봉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을 비유럽 지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는 스스로 진보할 능력이 결여된 사회를 '문명화의 대상'으로 분류하고,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해 이들에 대한 간섭과 통치를 허용했다. 즉, 타자 관련 행위가 아닐지라도 '문명화'라는 거대 담론 안에서 국가의 개입 명분을 찾은 것이다.

밀의 논증 구조는 로크나 칸트가 세운 '배제의 메커니즘'과 꽤나 비슷하다. 로크가 폭군을 "이성을 버린 짐승"으로 규정하고, 칸트가 보편적 질서를 위협하는 "부당한 적"을 상대로 연합된 제지를 허용한 것처럼, 밀은 대상을 '문명'과 '미개'로 나누어 도덕적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냈다. 상대를 공동체 바깥의 존재로 명명하는 순간, 그들에 대한 무력 사용이나 주권 침해는 살인이 아니라 '정당한 제거'나 '필요한 개입'으로 세탁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하려면 먼저 그 죽음이 보편적 금지의 예외임을 증명해야 한다. '살인은 안 된다, 하지만 이건 살인이 아니다'라는 이 교묘한 수사가 작동하려면 예외를 만드는 '기준'과 그 기준을 세우는 '권력'이 필요하다. 밀이 주장한 인류 전체의 진보를 위한 개입은 오늘날 '보호책임(R2P)'의 모태가 되어, 강대국에게는 개입의 정당성을 제공하고 약소국에게는 주권 침해의 위협이 되는 양면적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

필머가 신의 이름이라 부른 것을 밀은 '이성'과 '진보'의 이름으로 재건했다. 누군가를 도덕적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낸 다음, 그 죽음이나 억압에 정의, 문명, 진보라는 이름을 붙이는 구조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예외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범주는 과연 가능한가. 정의로운 전쟁이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범주가 얼마나 자의적를 폭로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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