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식 이후 유럽의 안보 위협은 더 이상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국가 내부의 불안정과 민족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안보 구조는 전통적 동맹, 강대국 협의체, 공동체 구축, 집단안보가 결합된 복합적 형태로 재편되었으며, NATO와 EU는 체제 전환국의 민주화·경제 개혁을 지원하면서 조건부 회원제도를 통해 규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유인만으로는 모든 분쟁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다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위기 관리 장치가 필요해졌다. 이에 세 가지 제도적 대응이 등장했는데, 강대국 협의체인 ‘컨택트 그룹(Contact Group)’, 군사 개입을 조정하는 NATO, 그리고 내전 예방과 중재를 담당한 CSCE(후일 OSCE)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CSCE는 무력 대신 예방외교(preventive diplomacy)와 고등판무관(HCNM), 장기파견 임무(missions of long duration)를 통해 가장 폭넓게 국가 내부 갈등에 개입하며 실질적 성과를 냈다. 특히 발트 3국과 코카서스 지역에서 민족 분쟁이 확산되지 않도록 중재하고 제도 개혁을 지원한 것은 군사 개입보다 효과적이었다. CSCE는 이러한 개입을 ‘파리헌장(1990)’의 인권·민주주의·법치 규범에 근거해 정당화했으며, 결과적으로 주권 불간섭 원칙을 재해석해 ‘규범적 개입의 조건’을 마련했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제도 조정이 아니라, 유럽의 기본 규범 자체가 재구성된 과정이며,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구성주의적 접근이 현실주의나 자유주의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주장한다.
규범과 국제질서
이 부분은 국제정치에서 ‘규범(norm)’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저자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을 설명한다. 신현실주의는 규범을 단지 물질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 결과로 보고, 신자유주의는 협력의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로 이해한다. 반면 구성주의는 규범이 국가의 정체성과 이익을 ‘구성’한다고 보지만, 저자들은 구성주의조차도 규범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선택되는가’보다는 ‘규범이 이미 존재할 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만 집중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단순히 규범이 국가를 제약하거나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논의를 넘어, 국가가 스스로 규범을 ‘행동의 도구(agency)’로 사용하는 과정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들은 규범의 세 번째 기능인 ‘가능적(enabling) 역할’을 강조한다. 이는 규범이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정당성을 통해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의미한다. 예컨대 냉전 후 유럽에서 ‘민주주의 수호’는 주권과 불간섭의 원칙을 완화시키며, 외부 개입을 정당화한 ‘가능적 규범’으로 작동했다. 결국 국가들은 규범에 의해 단순히 제약받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냄으로써 국제 질서를 재구성하는 행위자이며,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CSCE(현 OSCE)의 개입이다. 이는 Ikenberry와 Kupchan이 말한 ‘사회화(socialization)’와도 구별된다. 겉보기에는 비슷한 효과를 냈지만, 여기서의 변화는 특정 패권국이 자신의 가치를 주입한 결과가 아니라, 여러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새로운 힘의 질서를 구성(collective ordering of power)한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이 사례는 규범이 단순히 행위자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이 스스로 규범을 창출하여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path from agency to structure) 을 잘 보여준다.
냉전 이후 CSCE의 제도적 발전
냉전 종식 이후 CSCE(유럽안보협력회의)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모든 국가가 참여한 합의제(consensus-based) 제도였으며, 모든 회원국이 거부권을 가졌기 때문에 한 번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만큼 강력한 규범적 의미를 지녔다. 첫 번째 단계(1986~1990년)에서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회원국들이 민주주의·인권·집단안보라는 가치들을 새로운 유럽 질서의 중심 규범으로 제도화하고, 이를 파리헌장(1990) 등 국제 합의문에 명문화했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1990~1992년)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소련 해체로 인해 유럽이 예상치 못한 국가 내부 갈등과 민족분쟁에 직면하면서, CSCE는 기존의 국가 간 협력 틀로는 대응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CSCE는 헬싱키 회의와 스톡홀름 장관회의를 거치며 회원국 내부의 분쟁 예방 및 관리 메커니즘을 창출했다. 비록 운영적으로는 제한적이었지만, 이는 주권·내정불간섭의 전통적 규범을 수정해 국제사회의 집단적 개입을 정당화한 규범적 혁신이었다.
결국 CSCE의 진화는 단순히 이상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럽 안보의 핵심 전제이자 집단적 개입의 근거로 재정의한 과정이었으며, 이는 행위자들이 규범을 창출하고 제도화함으로써 구조를 변화시킨 구성주의적 사례로 평가된다.
냉전 시기 CSCE(유럽안보협력회의) 는 동서 진영 간 최소한의 대화를 유지하는 느슨한 협의체에 불과했지만, 1989년 체제 전환을 계기로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제도적 기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89년 비엔나 회의에서는 동서 간 인권 대립이 해소되어 ‘인권 차원 메커니즘(human dimension mechanism)’이 만들어졌고, 이는 바츨라프 하벨 석방 등 실제 정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어 본(1990)과 코펜하겐(1990) 회의에서는 구사회주의 국가들이 다당제 민주주의, 법치, 시장경제 등 서구의 가치를 공식 수용하며, 민주주의를 유럽 평화와 안보의 전제 조건으로 명문화했다. 특히 코펜하겐 문서는 “국민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모든 정부 정통성의 근원”이라 선언하며, 민주주의를 유럽의 새로운 헌법적 질서(new public order)로 제시했다.
이러한 규범적 합의는 같은 해 11월 채택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으로 제도화되었다. 파리헌장은 회원국들이 “민주적 성취를 되돌릴 수 없도록 협력한다”고 서약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단순한 정치 이념이 아닌 공동 안보의 핵심 원칙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소련 해체로 민족주의적 갈등이 폭발하면서, 이상적 선언을 실질적 제도로 옮기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1991년 발레타 메커니즘(Valletta Mechanism)은 국가 간 분쟁 해결 시 만장일치 원칙을 완화했지만, 면책조항과 권고적 성격 때문에 실질적 효력은 없었다. 같은 해 베를린 장관회의에서 긴급 대응 절차가 만들어져, 원칙 위반이나 평화 위협이 감지될 경우 12개국 지지로 긴급회의를 소집할 수 있게 되었으나, 유고슬라비아 사태에서처럼 당사국 동의 부재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어 제네바 소수민족 회의(1991)에서는 “소수민족 문제는 더 이상 국내문제가 아닌 국제적 관심사”라는 획기적 선언이 나왔고, 모스크바 메커니즘을 통해 ‘합의-1(consensus minus one)’ 원칙이 도입되어 특정국의 반대에도 인권조사를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프라하(1992)에서 이 원칙이 공식화되어, 심각한 인권 위반국에 대한 국제적 정치 제재가 가능해졌고, 곧 유고슬라비아가 회원 자격을 정지당했다. 같은 해 스톡홀름 회의에서는 이를 국가 간 분쟁에도 확장해 ‘합의-2(consensus minus two)’ 방식으로 양국의 반대 없이 조정과 중재를 지시할 수 있는 ‘CSCE 중재 및 화해 협약(Convention on Conciliation and Arbitration)’이 채택되었다. 이는 회원국이 스스로 내정 간섭 가능성을 제도화한 전례 없는 변화였으나, 현실적으로는 작동이 어려웠다. 각국은 주권 약화를 우려해 강제적 결정 절차를 꺼렸고, 결국 유고 내전의 실패는 CSCE의 한계를 드러냈다. 즉, 포괄적 안보기구로서의 CSCE는 규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결단력 있는 집단행동을 실현할 제도적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1992년 헬싱키 II 정상회의(The Challenges of Change)는 CSCE가 단순한 협의체를 넘어 제도화된 안보기구로 재탄생한 전환점이었다. 이 회의는 유럽 내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하고, 민족주의·외국인 혐오·인권침해가 민주화된 신생국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 결과 CSCE는 조기경보(early warning)와 갈등예방(conflict prevention) 메커니즘을 도입했고, 특히 소수민족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 on National Minorities, HCNM) 제도를 창설했다. HCNM은 단순한 인권 옹호자가 아니라 안보 차원의 중재자이자 예방외교의 실무자로서, 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소수민족 문제를 사전에 탐지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등판무관은 ‘소수민족을 위한(for)’이 아니라 ‘소수민족에 관한(on)’ 인물로 정의되어, 국가의 주권을 직접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내부 갈등을 국제 안보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제도적 통로를 마련했다.
이후 코소보, 산자크, 보이보디나 등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파견된 사실조사단(fact-finding missions)과 장기임무(missions of long duration)는 이러한 제도 변화의 실질적 시험대가 되었다. 이는 기존의 모스크바 메커니즘보다 유연하고 신속한 대응 방식을 가능하게 했으며, 형식적 합의 없이도 현장 중심의 예방외교(preventive diplomacy)를 실행할 수 있었다. 나아가 고위관리위원회(CSO)와 의장국(Chairman in Office)의 권한이 강화되어, 외교장관급 대표가 직접 위기 지역에 특사(personal representative)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CSCE가 단순히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 내부의 정치·민족 갈등을 안정시키는 ‘건설적 개입(constructive intervention)’의 주체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즉, 헬싱키 II는 인권·개입·예방외교를 제도적으로 결합해, 유럽 안보질서의 규범적·구조적 전환을 완성한 분수령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유럽의 패권적 강요가 아닌, 동·서유럽 국가 간 합의(consensual agreement) 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약소국들도 만장일치 제도를 통해 규범 창출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국가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새로운 행동 공간을 여는 도구(enabling norm) 로 활용했으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인권·안보를 상호 보완적으로 엮은 유럽형 질서를 만들어냈다. 기존의 현실주의나 자유주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지만,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국가가 규범을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하고, 행위(agent)와 구조(structure)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국제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는 주장의 글이다).
또한 이 논문은 규범 변화를 마치 합리적 선택의 연장선처럼 설명하며, 권력과 담론의 비대칭성을 간과한다. “서방의 강요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민주주의·인권·시장경제라는 서구적 규범이 “보편적 합의”로 제시된 것은 전형적인 헤게모니적 내면화(hegemonic internalization) 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자발적 합의(consensual agreement)”라기보다 ‘규범적 사회화(normative socialization)’의 결과로 위장된 권력이다. 다시 말해, 이 논문이 말하는 ‘합의’는 상호주관적 이해의 산물이 아니라, 서구 담론이 “정상(normal)”으로 자리 잡은 결과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규범이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누구에게,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했는가를 묻지 않는다. 구성주의적 비판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규범의 힘”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특정한 권력 관계를 재생산(reproduction of power) 한다. 유럽의 ‘민주적 질서’는 평등한 규범 공동체라기보다, ‘문명화된 국가’와 ‘문명화되어야 할 국가’의 위계적 구분을 정당화하는 규범적 장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