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Draft

Dec 3, 2025

보편기구와 지역기구의 이분법을 넘어서

권위–기능 배분에 기반한 국제기구 질서의 재개념화

1. 서론

국제기구 연구는 오랫동안 ‘보편기구(universal IGOs)’와 ‘지역기구(regional IGOs)’의 구분을 기본적인 분류틀로 삼아왔다. UN·WTO·IMF는 전 지구적 범위를 갖는 보편기구로, ASEAN·EU·AU·MERCOSUR·SICA 등은 특정 지리적 범위를 갖는 지역기구로 분류된다. 이러한 구분은 직관적이고 편리하지만, 실제 국제기구들이 수행하는 기능과 작동 방식은 이 단순한 이분법을 일관되게 지지하지 않는다.

국가들은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국제기구를 병렬적으로 사용하며, 각 기구는 권위, 기능, 집행 방식, 정치적 적합성에서 상이한 역할을 맡는다. 즉, ‘보편’과 ‘지역’이라는 표현은 실제 제도가 수행하는 역할의 본질을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복잡한 다층적 제도질서(multilevel institutional order)를 흐릿하게 만드는 개념적 성격을 갖는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보편기구–지역기구의 이분법을 ‘설명변수(variable)’가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결과(outcome)’로 재위치시키고, 국제기구의 실제 기능적 역할을 권위(authority)와 기능(function)의 배분 구조를 통해 재개념화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1) 기존 문헌이 보편–지역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왔는지 검토하고, (2) 해당 문헌을 ‘권위의 수준’과 ‘기능의 종류’라는 분석 틀로 재정렬하며, (3) 라틴아메리카 지역기구 사례를 통해 새로운 분석 틀이 가지는 설명력을 검증한다.

본 논문이 기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기구를 지역 단위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최근 연구 흐름—“모든 국제기구는 특정 지역성(regionality) 속에서 작동한다”—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한다. 둘째, 국제기구 간 관계를 경쟁·보완이라는 단일 축이 아니라 기능적 분배 구조로 파악함으로써, 보편기구와 지역기구가 형성하는 다층적 거버넌스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2. 기존 문헌에 대한 비판적 검토: ‘보편–지역’은 설명이 아니라 서술

기존 문헌은 보편기구–지역기구의 관계를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설명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실제로는 이론의 차이가 아니라, 동일한 현상을 서로 다른 언어로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이를 먼저 검토한 뒤, 새 분석 틀로 재구성한다.

2.1. 경쟁·대체: 제도 간 권위 중첩에 따른 기능 경쟁

Lake, Kahler, Mansfield & Milner 등의 연구는 지역기구의 확산이 WTO·UN 등 보편기구의 권위와 규범적 역할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국가들이 ‘아레나 쇼핑(arena shopping)’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포럼을 선택함으로써, 제도 간 경쟁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은 실제로 국가들이 지역협정(RTA)·양자협정(FTA)·WTO를 전략적으로 오가는 경험적 현상을 잘 포착한다.

그러나 경쟁 설명은 왜 일부 지역기구는 활성화되고, 다른 지역기구는 비활성 상태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며, 보편기구가 제공하는 정당성·규범적 기반과 지역기구의 정치적 적합성 간의 상호의존성을 간과한다.

2.2. 보완·조정: 지역기구의 정치적 적합성 기능

Katzenstein, Acharya, Börzel & Risse 등은 지역기구가 보편기구가 수행하기 어려운 정치적 조정·갈등 완화 기능을 담당한다고 본다. UN Charter Chapter VIII와 AU–UN 협력체계는 이러한 보완적 관계의 제도적 기반을 보여준다. 이 관점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보편기구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지역기구의 활성 정도가 설명되지 않으며, 기능 분업이 어떤 원리로 구조화되는지를 밝히지 못한다.

2.3. 제도복잡성: 중첩된 권위 속에서 나타나는 다층적 역할 분리

Alter & Helfer, Voeten, Hooghe & Marks 등은 국제기구를 ‘중첩된 권위 구조’ 속에서 이해한다. 여러 국제기구가 동일한 영역에서 상호작용하며, 국가들은 때로 포럼을 선택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제기구 자체가 기능적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으며 다층적 질서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은 여전히 ‘보편–지역’이라는 분류틀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즉, 보편–지역 구분은 이론의 출발점이 아니라, 문제적 전제로 남아 있다.

3. 새 분석 틀: 국제기구를권위–기능의 배분 구조로 재편성하기

본 논문은 기존 문헌의 분류를 따르지 않고, ‘권위(authority)’와 ‘기능(function)’이라는 두 기준을 통해 국제기구를 재개념화할 것을 제안한다.

3.1. 권위(authority)의 수준

  • 규범적 권위(normative authority): 국제규범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위 권위
  • 절차적 권위(procedural authority): 의제 설정, 심의, 감독 기능
  • 집행 권위(executive authority): 정책 조정, 갈등 완화, 현장 집행

보편기구라 해서 항상 규범적 권위를 가진 것도 아니며, 지역기구라 해서 집행만 담당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권위의 위계는 기구의 설계, 국가들의 의도, 지역의 정치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3.2. 기능(function)의 유형

  • 규범 설정 (rule-making)
  • 분쟁 해결 (adjudication)
  • 모니터링·감시 (monitoring)
  • 정치적 조정·중재 (political mediation)
  • 집행·이행 촉진 (implementation)

3.3. 이 두 축을 결합하면?

보편기구–지역기구라는 지리적 구분은 본질이 아니라 권위–기능 배분의 한 결과물로 재위치된다.

예를 들어,

  • UN은 높은 규범·절차 권위를 가지지만 현장 집행력은 약하다.
  • AU, ASEAN, UNASUR 같은 지역기구는 높은 정치적 적합성을 가진 대신 강한 규범 권위는 없다.
  • WTO는 강한 분쟁해결 권위를 가지지만 정치적 조정 기능은 거의 없다.
  • MERCOSUR는 중간 수준의 절차·정치 권위를 가진 특수한 형태다.

즉, 국제기구의 핵심은 지리적 범위가 아니라, 어떤 권위와 어떤 기능이 어떻게 배분되어 있는지다.

4. 라틴아메리카 사례 분석: 이론적 반례를 통한 검증

라틴아메리카는 국제기구가 풍부하지만 활용도가 극단적으로 불균등하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분석틀을 검증하기에 적합한 ‘반례 집합(counterfactual universe)’이다.

4.1. CCJ(SICA)의 비활성: 지역기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기능 불일치 때문

중앙아메리카사법재판소(CCJ)는 강한 법적 권위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이는 지역기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권위–기능 미스매치 때문이다.

  • 법적 권위는 높지만 → 국내정치적 분쟁의 정치적 성격과 맞지 않음
  • 분쟁 대부분은 ‘법적 adjudication’보다 ‘정치적 조정’을 필요로 함
  • 절차적 권위는 있으나 정치적 권위가 부족함

따라서 CCJ의 비활성은 보편기구 경쟁 때문이 아니라 권위 구조와 기능 요구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4.2. MERCOSUR 분쟁해결기구: WTO와의 경쟁이 아니라 기능적 분업

MERCOSUR의 분쟁해결체계는 WTO보다 접근성이 높고 정치적 타협이 가능해,

회원국들은 종종 지역 포럼에서 먼저 정치적 완화를 시도한 후 WTO로 가는 ‘단계적 전략’을 취한다.

즉, 두 기구는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법적 기능을 분담하고 있다.

4.3. UNASUR의 정치중재: 보편기구의 권위 공백을 메우는 기능

UNASUR는 베네수엘라·볼리비아 위기 등에서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 UN이 개입하기 어려운 민감한 내정 관련 사안
  • 지역 정치에 대한 미시적 지식 필요
    • 같은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특징적 기능이다.

즉, UNASUR의 개입은 ‘지역기구의 활성’이 아니라, **보편기구의 권위 공백(authority gap)**이 만들어낸 기능적 역할이다.

5. 논의: 보편–지역이라는 이분법은 ‘명칭’일 뿐, ‘분석 단위’가 아니다

위 사례와 분석을 종합하면, 보편기구–지역기구 구분은 다음과 같이 재정의되어야 한다.

  • 국제기구의 지리적 범위는 **설계 결과(ex-post outcome)**일 뿐,
  • 기구의 본질은 권위–기능의 배분 구조이며,
  • 실제 운영은 보편기구와 지역기구의 **다층적 기능 분업(multilevel division-of-labor)**으로 이루어진다.

이 접근은 국가들이 왜 특정 지역기구만 사용하고, 왜 어떤 지역기구는 비활성 상태가 되는지, 그리고 왜 보편기구가 특정 사안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6. 결론: 국제기구 연구의 새로운 분류 틀을 향하여

본 논문은 기존의 보편–지역 이분법을 넘어서, 국제기구를 권위(authority)와 기능(function)의 재배치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문헌 요약이 아니라, 국제기구 연구의 분석 단위를 재구성(reconceptualization)하는 작업이다.

  • 보편기구는 규범·절차적 권위를 제공하고,
  • 지역기구는 정치적 조정·현장 집행을 담당하며,
  • 양자는 경쟁자도, 단순 보완자도 아니라 다층적 governance를 구성하는 상호의존적 행위자이다.

따라서 국제기구 연구에서 보편–지역 구분은 더 이상 이론의 출발점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변수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모든 국제기구가 사실상 특정 지역적 맥락 속에서 작동한다는 현실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한다.

또한 국제기구의 활성·비활성, 국가의 포럼 선택, 제도 간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데 새로운 분석적 도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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