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RC는 1945년 이후 정치범 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1982년까지 75개국에서 30만 명 이상의 정치적 구금자를 면회하는 등 비정부기구로서는 이례적인 국제적 정당성과 접근권을 확보했다. ‘왜 주권 국가들이 외부 기관의 감시를 허용했는가? 현대 국제사회가 주권에 기반한 질서 속에서 어떤 조건하에 주권의 일부를 양보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 문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ICRC가 어떻게 독특한 국제적 지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적십자 운동은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병을 구호한 스위스인 앙리 뒤낭의 활동에서 비롯되었으며,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설립되고 1864년 첫 제네바협약이 체결되었다. 오늘날 이 운동은 ICRC, 각국 적십자사, 그리고 적십자사연맹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국 적십자사는 국내 보건·구호활동을 주로 수행하고, ICRC는 전쟁이나 정치적 폭력 등 ‘인위적 재난’ 상황에서 중립적 중재자로 국제적으로 활동한다. ICRC는 공정성과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각국 적십자사 및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이로 인해 때때로 마찰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범 문제와 같이 국가 간 관계나 정부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활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비정부기구로서 ICRC는 국가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정치적 맥락을 피할 수 없으며, 스위스 내에 기반을 두고 있어 스위스 정부의 지원과 관계 속에서 복합적인 의존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조직 개편 이후에도 스위스는 소규모이면서 인맥이 밀접한 사회로, ICRC의 지도부는 대부분 유사한 배경을 지닌 남성 중심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위스 정부와 ICRC는 ICRC가 주도해온 무력분쟁 관련 국제인도법의 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데, 제네바협약과 추가의정서 채택을 위한 회의는 형식상 스위스 정부가 주최하지만 실제 초안 작성과 핵심 논의는 ICRC가 주도한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ICRC는 국제인도법의 내용과 발전에 있어 비정부기구로서는 독보적인 영향력을 확보해왔다. 특히 ICRC는 제네바협약의 ‘수호자’로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협약에 의해 분쟁 개입 권한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또한 국제사회에서의 명성과 정당성을 바탕으로, 협약 조항을 유연하게 해석하거나 자체 행동을 통해 새로운 관행을 만드는 등 인도법과 자신들의 권한을 점진적으로 확대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는 정치범 문제에 집중되었다.
ICRC의 정치범 문제에 대한 관심의 기원 (1863–1938)
ICRC의 정치범 문제 개입은 제도적 권한 축적보다 현장에서의 인도적 실천에서 출발했다. 초기에는 부상병 구호와 포로 방문 등 비교적 비논쟁적 영역에서 활동했으나, 점차 내전과 정치적 구금 문제로 확장되면서 국가주권 원칙과의 충돌을 겪었다. ICRC는 정부의 역할을 ‘보완’하는 중립적 기구임을 강조하며 정부의 신뢰를 얻었지만, 내전 개입은 “내정간섭”으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1919년 헝가리혁명 같은 사례에서 인도적 필요가 절박했기 때문에 ICRC는 점진적으로 내전 피해자와 정치범에 대한 구호를 시작했다. 특히 헝가리 혁명정부는 ICRC를 “정부들의 연합이 아닌 인민의 연합”으로 인정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국가 이념과 인도주의적 국제주의를 조화시켰다. 이러한 사례들은 ICRC가 주권과 이념의 장벽을 넘어, 내전과 정치적 폭력 상황에서도 인도적 구호의 정당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921년 적십자 회의는 내전뿐 아니라 “사회적·혁명적 혼란”을 구호 범위에 포함시키며 적십자의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같은 해 채택된 결의안은 정치범의 인도적 처우를 처음으로 언급했으나, 실제 실행 의무는 부여되지 않았고 주된 책임은 각국 적십자사에 맡겨졌다. 이는 ICRC가 여전히 내정간섭 비판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러웠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20~30년대에 들어 ICRC는 점차 ‘인도적 개입권(humanitarian initiative)’을 자임하며, 내전과 국내 소요에도 개입할 정당성을 넓혀갔다. 1928년 회의에서 내전과 국내 소요 시 중립적 중재자 역할을 공식 부여받았고, 1929년 외교회의에서 포로 문제에 대한 개입권을 인정받았으며, 1930년에는 자체 규정에 ‘개입권’을 명시적으로 포함시켰다. 1935년 내부 문건에서는 이를 근거로 정치범 구금 사건에 대한 ICRC의 개입 정당성을 주장하며, ICRC가 국제법의 경계를 확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의 절정은 1938년 스페인 내전 중 열린 국제적십자회의에서 나타났다. ICRC는 내전 중 양측이 허락한 한도 내에서 4만 명의 포로를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계기로 비국제적 분쟁에서의 책임과 권한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회의에서는 ICRC의 독자적 책임 강화, 각국 적십자사와의 협력 의무 배제, 내전 유형의 세분화 등 네 가지 핵심 논점이 제시되었다. 특히 ‘심각한 소요’나 ‘조직화된 내전’에서는 ICRC가 반군 측 피해자 구호를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고, 내전 중 정치범의 인도적 대우·교환·석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만 당시의 정치범은 비전투원 구금자를 뜻했으며, 1945년 이후 ICRC는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석방보다는 인도적 처우 개선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전후의 ICRC
제2차 세계대전 이후 ICRC의 활동은 인도주의 원칙을 명문화하고 그 법적 정당성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전쟁 이전에는 국제적 분쟁에 한정되던 개입이 전후에는 내전·혁명·정치적 구금 등 비국제적 분쟁으로 확대되었고, 부상병뿐 아니라 포로와 민간인, 정치범까지 보호 대상으로 삼았다. 1945년 이후 ICRC의 최우선 과제는 그동안 사실상 수행해온 인도주의 원칙을 법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1949년 외교회의에서 채택된 네 개의 제네바협약이었다. 이 가운데 마지막 협약은 전시 민간인 보호를 다루었지만, 각국 정부의 반대로 정치범 보호 조항은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공통 제3조(Common Article 3) 가 새롭게 추가되면서 내전과 같은 “비국제적 무력분쟁(non-international armed conflict)”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인도적 기준이 적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항은 비전투원의 인도적 대우, 고문·인질·모욕적 처우·불법 재판의 금지를 규정하고, ICRC가 분쟁 당사자들에게 인도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럼에도 제3조는 여러 한계를 지녔다. 첫째, 언제 ‘비국제적 무력분쟁’으로 간주되는지 판단할 객관적 기준이 없어, 각국은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예컨대 포르투갈은 식민지 반란 진압이 이 조항에 해당될 수 있다는 이유로 비준을 주저했다. 둘째, 제3조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내전의 양측이 모두 이를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는 곧 반군 세력에게 일정한 국제법상 지위를 부여하는 셈이 되어 국가 주권을 위협한다고 여겨졌다. 한 ICRC 위원은 제3조 채택을 “적십자의 승리”라고 평가했으나, 이는 내전 상황에서 인도주의 원칙의 공식적 인정을 의미했을 뿐, 실제로 정치범 보호나 의료팀 안전 보장 등 구체적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ICRC는 1949년 이후 제3조를 확대·보완하려는 노력을 지속했으며, 이를 위해 1953년과 1955년 두 차례의 전문가위원회를 소집했다.
1953년 위원회는 제3조의 규정은 “최소 기준일 뿐이며, 가능하다면 이를 초과하여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법적 측면과 인도적 측면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내전 중 구금된 사람에 대한 순수한 인도주의적 지원은 분쟁 당사자의 법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정부가 이를 거부할 정당한 근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국가들은 어떤 명분이든 자국의 내정에 대한 절대적 개입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55년 위원회는 “비국제적 무력분쟁”에 이르지 않은 ‘국내 소요(internal disturbances)’ 에도 제3조를 적용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며, 인도주의와 주권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위원회는 단순한 국내 소요를 제3조에 포함하기는 어렵다고 인정하면서도, ICRC가 본연의 인도주의적 성격을 유지한다면 내정 간섭이 아닌 “인류애적 지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ICRC는 제3조의 법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각국의 주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적용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법의 형식적 경계와 인도주의의 실질적 요구 사이에서 ICRC가 취한 전략을 보여주며, 주권 절대성 속에서 인도적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는 공간을 모색한 대표적 시도로 평가된다.
1962년 ICRC 전문가위원회는 제3조의 적용 기준을 정부 판단이 아닌 ‘객관적 조건(objective conditions)’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내전뿐 아니라 무력분쟁 이하 수준의 국내 소요에서도 인도적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위원회는 합법정부를 상대로 조직적 집단행동이 존재한다면 제3조가 적용된다고 보고, 집단 소속이나 타인의 행위로 인한 처벌은 문명국의 사법적 보장 원칙에 반한다고 명확히 했다. 또한 ‘국내 소요(internal disturbances)’를 엄격히 정의하지 않더라도, 제3조가 규정한 “언제 어디서든 금지되는 행위”가 발생한다면 ICRC가 이를 중단시키기 위한 인도적 개입을 할 정당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70년대 초까지 ICRC는 제3조의 해석을 확대하고, 비국제적 무력분쟁의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추가 규범 제정을 시도했으나, 각국은 자국의 내정 문제를 국제법의 적용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1974~1977년 제네바협약 추가의정서 논의 과정에서 이러한 국가들의 저항은 더욱 분명해졌다. 다수 정부가 “국내 소요와 긴장(internal disturbances and tensions)”을 국제인도법의 적용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시키고, 국가 주권과 불간섭 원칙을 강조하는 조항을 새로 삽입했다. 특히 ICRC가 비국제적 분쟁 당사자에게 인도적 서비스를 “제안할 권리(offer its services)”를 삭제시킨 것은 치명적 후퇴였다. 국가들은 이를 내정 간섭으로 간주하며 반대했고, 결과적으로 ICRC가 1945년 이후 추진해온 ‘인도적 개입권(humanitarian intervention)’의 제도화 노력은 좌절되었다. 비록 추가의정서가 전쟁 피해자의 의료지원 권리를 명확히 하는 성과를 남겼지만, 내전 피해자 보호의 법적 기반을 확장하려던 ICRC의 시도는 주권 절대성 논리에 의해 근본적으로 제약되었다.
제네바 추가의정서가 내전 피해자 보호 범위를 명확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적용은 반군이 일정한 영토를 통제하며 조직적인 군사행동을 하는 명백한 내전(civil war)에만 한정되었다. 이 때문에 내전으로 인정되지 않는 국내 소요나 정치적 탄압 상황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국제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특히 정치범(political prisoners)이 국제적으로 합의된 권리를 획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ICRC는 제네바협약상의 의무를 최우선시하면서도, 그 어떤 활동도 처음부터 법률 제정으로 시작된 적이 없다고 인식했다. 실제로 1945년 이후 정치범 관련 업무의 급증은 국가 간 법적 합의보다 인도주의적 필요(humanitarian necessity)에 근거한 결과였다. 물론 ICRC는 이런 활동의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하며 국제적십자운동 규약, ‘개입권(right of initiative)’, 오랜 관행(custom) 등을 근거로 삼았으나, 정치범 문제의 민감성 때문에 법적 진전이 어렵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 결과 ICRC는 정치범 사안에 개입할 구체적 조건과 범위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45년 이후 ICRC는 정치범 문제에서 두 단계를 거쳤는데, 첫째는 각국 정부가 내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부 분쟁에서도 피해자가 명백히 존재할 경우 법적 형식보다 인도주의적 의무를 우선시한 것이다. ICRC는 이를 ‘국내 소요(internal disturbances)’로 정의하며, 폭동·시위·군사력 투입 등 일정 수준의 폭력이 수반될 경우 최소한의 인도주의 규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보았다. 이때 피해자에는 정부 비판으로 구금된 정치범도 포함되었다. 둘째 단계에서는 ICRC 내부에서 정치범 개입을 둘러싼 1959~65년의 논쟁을 통해 체계적인 정치범 교리가 형성되었다.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정치범 보호를 중심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해졌고, 그 근거로 △전쟁포로 보호 원칙과의 연속성, △무력분쟁에서 ‘적’으로 간주된 자라도 인간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적십자의 역사적 기원, △‘국제전–내전–내부소요–내부긴장’으로 이어지는 인권침해의 연속선상이라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정치범은 정부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취급되어 전쟁포로보다 더 가혹하게 대우받는 경우가 많으므로, 국제적 보호의 필요성이 동일하게 정당화된다.
그러나 ICRC는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치범’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거나 ‘비범죄적 구금자(nondelinquent detainees)’ 등의 표현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결국 1970년대에 들어서야 ICRC는 개입 기준을 구체화했는데, 심각한 정치·종교·인종·사회적 긴장이 존재하거나, 사법절차가 중단되거나, 비인도적 대우의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 개입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1981년 자크 모리용(Jacques Moreillon)은 정의를 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치범의 공통점은 “그들의 말·행동·저술이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간주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자들”이라는 점이며, 일반 범죄자와 달리 그들의 목표가 개인적 이익이 아닌 체제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ICRC는 정치범 문제를 다룰 때도 인도(humanity), 공정성(impartiality), 중립성(neutrality), 독립성(independence)의 네 가지 핵심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이를 통해 각국 정부의 신뢰를 유지하려 한다. 특히 ‘침묵의 원칙(rule of silence)’ 은 ICRC 활동의 핵심으로, 조직은 정치적 판단이나 구금 사유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오직 수감 환경과 인도적 처우에만 집중한다. 이는 공개 비난이 정치화를 초래해 피해자 보호 기능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대신 ICRC는 정부로부터 모든 정치범에 대한 자유롭고 비증인적 접견권, 필요 시 재방문 권한을 보장받으며, 방문 후 작성되는 비공개 보고서를 정부에만 제출한다. 정부가 보고서를 공개할 경우 왜곡 없이 전면 공개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ICRC가 직접 전체 보고서를 공개할 권리를 가진다. 다만 ICRC는 구금시설 평가 시 현지의 조건과 관행을 고려해 추상적 인권 이상보다 현실적 개선을 우선시하는 실용적 접근을 취한다. ICRC의 정치범 관련 활동은 법적 논의나 내부 교리보다 현장에서의 실제 행동을 통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전후 특히 1960~80년대에 걸쳐 ICRC의 역할은 크게 확대되어, 1982년에는 3만 명 이상의 정치 구금자를 방문했고, 고문·강제실종 등 인권침해 문제에도 적극 대응했다. 칠레 등지에서는 실종자 명단을 직접 제출해 사건 해결에 기여하기도 했다 즉, ICRC의 정치범 관련 활동은 공개적 비판보다 조용한 외교(quiet diplomacy)를 통해 인도주의적 신뢰를 유지하려는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
ICRC의 정치범 방문을 허용한 정부들은 인도주의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계산에서 움직인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ICRC의 방문 사실을 선전용으로 활용해 국제 비판을 무마하거나, 수감자 처우에 양보하는 척하며 근본적인 구금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려 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이를 자주 이용했다. 또 어떤 정부는 ICRC 방문을 통해 국제적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으며, 혁명정부의 경우 이를 국제 승인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ICRC는 개인 보호라는 본래 목적이 달성된다면 정부의 이런 동기를 문제 삼지 않았으나, 주권에 대한 민감성과 점진적 접근 방식을 유지해야 했다. 법적 근거가 미약한 상황에서 ICRC는 명성과 중립성, 비공개 원칙에 의존해 정부를 설득했고, 그리스 군사정권 사례처럼 전례 없는 접근권을 얻어 고문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결론
ICRC의 비공개 원칙 때문에 성과는 측정하기 어렵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석방이나 사면이 이루어졌고, 지속적인 방문이 정치범의 처우를 개선한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ICRC의 실용적 접근은 부정의한 정부를 용인하면서 개인의 고통을 줄이는 길을 택한 것으로, 이는 체제 유지를 돕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ICRC는 체제 변화보다 당장의 구호를 중시하며,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정치범 접근권과 인도주의적 역할 자체를 잃게 된다고 본다.
결론은 ICRC가 비밀주의적이고 폐쇄적이며 스위스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그 모든 특성이 정부의 신뢰를 얻고 실질적 구호를 가능하게 한 핵심 조건임을 강조한다. 스위스의 중립성과 국제적 신뢰 덕분에 ICRC는 특별한 지위를 얻었으며, 이는 다른 NGO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예외적 사례다.
결국 ICRC는 체제 비판보다 피해자 보호를 우선시하는 현실적 인도주의를 선택했고, 이 점에서 완벽하지 않지만 가장 효과적인 인권 기구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