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올바른 것 (정의로운 것: to dikaion)
폴레마르코스는 아버지 케팔로스의 말을 이어받아 정의(올바름)를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좀 더 구체화해 “친구에게는 이익을 주고, 적에게는 해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친구’의 의미를 문제 삼는다. “정말 선한 사람만이 진정한 친구인가, 아니면 내가 착하다고 믿는 사람도 친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식의 오류를 지적한다. 폴레마르코스가 “선한 사람을 친구라 한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누구에게든 해를 입히는 것은 모순이라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행위는 언제나 사람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지, 해를 주어 악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폴레마르코스의 정의는 스스로 무너지고, 대화는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대화에 끼어든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이전 논의들을 비웃으며,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모든 정체(왕정, 귀족정, 민주정 등)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주장한다. 즉, 법이란 결국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며, 정의란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장치라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실수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만약 통치자가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법을 만든다면,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여전히 강자의 이익일까? 트라시마코스가 이 점을 인정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가 언제나 강자의 이익이 될 수는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어 그는 ‘통치’를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techne)의 문제로 본다. 의사는 환자의 건강을 위해 일하고, 항해사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 항해하듯, 참된 통치자도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피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화는 정의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 (즉, 유익한가, 해로운가, 지혜로운가, 무지한가) 를 논하는 데 머물렀을 뿐, 정의 자체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이르지 못했다. 제1권의 끝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의 논의가 여전히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2장
글라우콘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정의의 본질을 보다 깊이 설명하도록 의도적으로 도발한다. 그는 먼저 인간 본성에 대한 냉정한 전제를 제시한다. “본래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 더 이롭다”는 것이다. 정의는 사람들이 본래 원해서가 아니라, 불의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인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즉, 정의란 완전히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최선의 경우(불의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음)’와, 완전히 손해를 보는 ‘최악의 경우(불의를 당하고도 복수할 수 없음)’ 사이의 중간지대에 놓여 있다.
누구든 들키지 않고 불의를 저지를 수 있다면, 가장 정의로운 사람조차 불의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불의의 대가를 두려워해서 억지로 정의롭게 행동할 뿐이다. 반면 불의한 사람은 정의로운 척하면서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으므로, 결국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불의가 정의보다 낫다고 글라우콘은 결론짓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도전을 받아들이며, 정의를 단순히 개인의 행동 규범이 아니라 국가(polis)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새롭게 탐구하기로 한다. 그는 이론상의 국가를 세우기 시작한다. 한 사람은 한 가지 일만 맡아야 하며, 각자는 자신의 천성과 능력에 맞는 역할을 맡을 때 공동체가 조화롭게 운영된다고 본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수호자(guardian) 계급을 가상으로 설정한다. 그들은 나라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지만, 동시에 지혜와 절제를 갖춘 품성을 지녀야 한다. 수호자가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용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에 올바른 믿음과 감정을 심어주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문학과 예술 교육에서 신들을 나쁘게 묘사하는 이야기를 금지하고, 신은 언제나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3장
이 장에서는 어린이의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계속 논의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설화와 시가 역시 올바른 방향으로 이야기 되도록 해야한다. 또한 이들은 훌륭한 통치에 기여하기 위해 그 밖의 어떠한 것에도 종사하지 않아야 하므로, 이들이 다른 것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시가 다음에는 체육에 의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시가와 체육 즉 지혜를 사랑하는 애지적인 면과 격정(기개)적인 면이 적절할 정도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특혜를 누리면 안되고, 오히려 엄격히 통제된 공동 생활을 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이다.
4장
소크라테스는 한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 위해서는 각 계층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고 본다. 통치자는 나라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끄는 지혜(sophia)를, 수호자는 그 판단을 지키는 용기(andreia)를, 모든 시민은 서로의 질서를 존중하는 절제(sophrosyne)를 지녀야 한다.
이 세 덕목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각 계층이 자기 일에 충실하여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상태, 바로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dikaiosyne)이다. 이 정의의 구조는 인간의 영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의 영혼은 이성(logos), 기개(thymos), 욕망(epithymia)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성이 지배하고, 기개가 이를 돕고, 욕망이 절제될 때 영혼은 조화로운 질서를 이룬다.
이런 상태가 정의로운 인간의 영혼이며, 반대로 각 부분이 제 역할을 잃고 서로 간섭하거나 뒤집히면 불의(올바르지 못함)가 생긴다. 즉, 욕망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기개가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할 때 영혼은 혼란에 빠진다. 플라톤은 이를 “서로 다스리며 다스림을 받는 관계가 본래의 성향에 어긋난 상태”라고 표현한다. 결국 정의란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모두가 내부의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상태이다.
5장
플라톤은 이상국가의 완성을 위해 세 가지 급진적 제도를 제시한다. 첫째, 남성과 여성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같으므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 수호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수호자 계층은 사유재산과 가족을 소유하지 않고, 배우자와 자녀를 공동으로 둔다. 이는 사적인 욕망과 애착에서 비롯되는 분열, 즉 내분(內紛)을 막기 위한 장치다. 모든 수호자가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는 의식을 공유할 때, 국가는 하나로 유지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은 국가의 통일성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사적 이익을 제거하고, 공동체적 질서를 확립하려 한다. 이상국가가 진정으로 올바르게 다스려지기 위해 플라톤은 마지막으로 철학자의 통치를 제안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는 단순히 학문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감각적 세계의 불완전한 것들을 넘어 불변의 진리와 선(善)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즉 의견의 세계’에 머무는 사람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만 ‘인식의 세계’에 도달한 철학자만이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6장
④ 이해 (νόησις, Noēsis) ← 진리·이데아의 직관 (철학자의 영역)
③ 사고 (διάνοια, Dianoia) ← 수학적 추론, 가정된 전제 사용
─────────────── 보이는 세계 (Visible Realm) ───────────────
② 믿음 (πίστις, Pistis) ← 감각적 사물에 대한 확신
① 상상 (εἰκασία, Eikasia) ← 그림자·영상에 대한 추측
─────────────────────────────────────────────────
↓ 인식의 상승: 감각 → 사고 → 이해 → 선(善)의 이데아)
플라톤에게 선의 이데아는 모든 존재와 인식의 궁극적 원리이자, 다른 모든 이데아의 근원이다. 그는 이를 태양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감각의 세계에서 태양이 사물에 빛과 생명을 부여하듯, 지성의 세계에서는 선의 이데아가 모든 존재에 인식 가능성과 존재성을 부여한다. 인간의 이성(νοῦς, nous)이 사물을 알 수 있는 것도,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선의 이데아가 비추는 ‘진리의 빛’ 덕분이다. 따라서 선의 이데아는 단순히 도덕적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자 앎의 근거, 즉 존재론과 인식론의 공통 기반이다.
지식은 선을 통해 가능해지고, 진리 또한 선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아—정의, 아름다움, 절제—는 선의 이데아로부터 존재 이유를 얻으며, 철학자는 이 최고 원리를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지혜에 도달한다. 결국 선의 이데아는 인간 인식의 최고 대상이자, 정의로운 정치의 궁극적 기준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자가 통치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철학자만이 이 선의 이데아를 이해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7장
플라톤은 인간의 인식 과정을 ‘동굴의 비유’ 로 상징한다. 그는 사람들을 태어날 때부터 지하 동굴에 사슬로 묶여,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상태로 묘사한다. 이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현실로 믿고 살아간다. 그림자는 동굴 뒤편의 불빛 앞에서 사람들이 들고 지나가는 인형과 물체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들은 보이는 것(감각의 세계) 만을 실제라 착각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묶인 사슬에서 풀려나 밖으로 나가면, 처음에는 태양빛 때문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지면, 그는 불빛보다 더 밝은 빛, 즉 태양의 빛 을 보게 되고,
그때서야 자신이 보던 그림자들이 진실의 모상(模像) 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과정은 인간이 감각적 세계(그림자)로부터 지성적 세계(이데아의 세계)로 인식의 상승(anabasis)을 경험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태양은 여기서 선의 이데아를 의미하며, 모든 존재를 드러내고 알게 하는 진리의 원천이다.
동굴 밖의 태양(진리)을 본 철학자는 이제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그가 어둠 속으로 돌아오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동굴 속 사람들에게는 “눈이 멀어 쓸모없는 자”처럼 보인다.이 장면은 철학자가 진리를 깨달았지만 현실 정치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비극적 운명을 상징한다. 플라톤은 그러나 철학자가 공동체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진리의 빛을 바탕으로 국가를 이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진리를 아는 자는 그 앎을 나누어 공동선을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의 통치”가 단순한 특권이 아니라 의무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동굴을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의 교육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그는 교육이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을 바꾸어 진리의 빛을 향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교육의 목적은 영혼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세워, 감각적 세계에서 벗어나 선의 이데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단계 | 교육 내용 | 목표 |
① 기초 수학 교육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 감각적 세계의 질서를 넘어서 추상적 사고 능력을 훈련 | 영혼의 논리적 사고력 개발 |
② 변증법(διαλεκτική, dialectic) | 가정된 전제를 넘어, 존재와 진리를 직접 탐구 | 이데아와 선(善)의 인식 |
③ 철학자의 귀환 훈련 | 이데아를 본 자가 다시 국가로 돌아와 통치 실천 | 지혜의 봉사자로서 정치 수행 |
이데아의 세계를 보고 돌아온 철학자는 감각적 세계의 명예나 부에는 관심이 없고, 국가 전체의 질서와 조화(정의)를 위해 일한다. 그에게 정치란 권력 행사가 아니라,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봉사다. 그는 지혜에 의해 다스리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다. 이때 비로소 『국가』 제1권에서 제기된 질문—“정의란 무엇인가?”—는 완전한 형태로 답을 얻는다. 정의는 이성이 지배하고, 영혼과 공동체가 조화롭게 질서를 이루는 상태이며, 그 궁극적 근거는 선의 이데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