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International Organization 특집호 “Legalization and World Politics” 에 대한 비판글. IO 특집호 vs Finnemore & Toope의 논쟁은 결국 “국제법을 구조적 결과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정당성의 과정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다.
1. IO 특집호의 문제의식과 한계
이전 특집호는 국제정치학자들에게 국제법을 변수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론적 틀을 제공했다. 저자들은 legalization을 세 가지 특징으로 정의한 바 있다.
- 의무 (obligation)
- 명확성 (precision)
- 위임 (delegation)
즉, 국제정치에서 법이 얼마나 제도화되어 있는지를 이 세 가지 축으로 측정하려 했다. 그러나 Finnemore & Toope는 이 개념이 지나치게 협소하고 형식주의적이라 비판한다. 법은 단순히 조약과 재판, 그리고 제도적 틀로만 이해할 수 없는 훨씬 더 복합적인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2. 첫 번째 비판: 관습법(customary law)의 무시
IO 특집호의 가장 큰 한계는 국제관습법을 사실상 배제한 점이다. 그러나 국제법의 핵심 사안인 국가책임, 영토, 인권, 무력 사용은 모두 관습법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예컨대, 무력 사용 문제에서 자위권은 조약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관습법적 토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행규범 (jus cogens) 또한 국가들의 행태를 규율한다.
국제법에서 무력 사용을 다룰 때 단순히 조약만 보면 전체 그림을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위권(self-defense)은 UN 헌장에 명시되어 있지만 그 뿌리는 국가들이 오랫동안 서로 인정하고 따라온 행동 규칙에 기반한다. 또한 강행규범(jus cogens)은 국제사회가 어떤 상황에서도 깨뜨릴 수 없다고 합의한 절대 규범으로, 침략 전쟁이나 노예제, 대량학살 같은 행위는 조약이 뭐라고 하든 무효가 된다. 결국 국제법의 구속력은 조약이라는 문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랜 관습과 절대적 규범 속에서도 생겨난다.
Finnemore & Toope는 이렇게 지적한다: “Any assessment of law's persuasive influence that neglects to treat seriously the customary law elements … is bound to produce a skewed perspective” (p. 747).
즉, 특집호가 조약과 재판에만 집착한 결과, 국제법의 실제 작동 방식 중 핵심적인 층위를 놓쳤다는 것이다.
3. 두 번째 비판: 의무 개념의 빈약함과 정당성의 배제
IO 특집호는 의무(obligation)를 조약 체결 같은 계약적 행위로만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순환적 정의다. “Legal obligations bring into play the established norms, procedures, and forms of discourse of the international legal system” (Abbott et al. 2000, 409). 즉, 의무의 결과로만 의무를 정의해, 의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 저자들은 “법적 의무(legal obligation)”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법적 의무는 국제법 체계의 규범, 절차, 담론을 작동시킨다.” 이 말은 결국, “법적 의무 = 법적 의무가 만들어낸 효과” 라는 뜻이다. ( 전기가 뭐야?”라고 물었는데, 답이 “전기는 불을 켜주고, TV를 켜준다”라면 결과만 말한 거지, 전기가 뭔지 설명한 게 아님.)
Finnemore & Toope는 국가들이 단순히 조약에 서명했기 때문에 의무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정당성(legitimacy) 이 있을 때 진짜 의무감이 생긴다.
예를 들어, 법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고(일반성), 규칙이 명확하며(명확성), 다른 규칙들과 모순되지 않고(일관성), 사람들이 알 수 있게 공개되고(공표), 소급해서 적용되지 않으며(비소급성), 쉽게 바뀌지 않고(지속성) 지킬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또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면 “남이 만든 규칙”이 아니라 “내가 동의한 규칙”으로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으로, 그 법이 합리적인 설명을 담고 사회가 원하는 가치를 반영할 때 더 큰 설득력을 얻는다. 이런 조건들이 갖춰져야 법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실제 의무감을 만들어낸다.
“Legitimate law generates obligation, not just in a formal sense but also in a felt sense” (p. 750).
법이 단순히 ‘종이에 적힌 약속’이 아니라, 참여와 정당성을 통해 느껴지는 의무감을 창출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4. 세 번째 비판: 법을 ‘산물(product)’로만 본 접근
IO 특집호는 법을 그냥 “국가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물” 정도로 봤다. 하지만 Finnemore & Toope는 법의 진짜 힘은 만드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법이 정당하게 작동하려면 공정한 절차를 지키고, 사람들이 그 과정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유를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신뢰와 의무감을 형성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정체성이나 문화, 규범 변화와 잘 연결되고, 흔히 말하는 “연성 규범(soft law)이 점점 강한 규범(hard law)으로 굳어지는 과정”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5. 실증 연구 적용에서 드러난 문제점
(1) Beth Simmons – 통화(IMF Article VIII)
Simmons는 IMF 규칙 준수를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 문제로 설명했다. 하지만 Finnemore & Toope는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처럼 국내 법질서가 약한 나라에도 투자가 몰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히려 IMF 자체의 역할에 주목한다. IMF는 단순히 규칙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각국에 제도와 정책 지식을 전파하고 새로운 권위를 형성하면서 국가들이 아예 다른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IMF 규칙 준수는 단순한 ‘신호’라기보다는, IMF가 만든 제도적·지식적 환경 속에서 국가들이 투자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선택지로 바뀐 결과라는 것이다.
(2) Goldstein & Martin – 무역(WTO, NAFTA)
Goldstein & Martin은 무역협정이 더 강제적이고 구체적일수록 협력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 세력(보호무역 집단)을 불러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Finnemore & Toope는 이 설명이 사실상 **“정보가 늘어나면 이해관계자들이 더 쉽게 움직인다”**는 개념에 기대고 있을 뿐, 법 자체의 힘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Once we understand what legalization does to information, information does most of the heavy analytic lifting in this article, not law” (p. 753).
또 두 저자는 국내 법 구조의 차이를 무시한 점을 비판한다. 예컨대 미국은 조약 비준에 의회 동의가 필요해서 보호무역 세력이 개입할 기회가 많지만, 캐나다는 내각이 단독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어 이런 기회가 거의 없다.
“Domestic structures of law are, themselves, mobilizing factors for a wide variety of groups involved in trade politics” (p. 755).
즉, 각국의 법제도는 단순한 제약 조건이 아니라, 이익집단을 구성·권한 부여·동원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을 특집호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3) Lutz & Sikkink – 인권(고문, 실종, 민주화)
Lutz와 Sikkink는 인권 분야에서 규칙이 강하고 구체적일수록 준수가 잘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고문 금지처럼 가장 법제화가 강한 영역에서 준수율은 낮았고, 민주화처럼 규칙이 느슨한 영역에서 오히려 준수가 높았다. 이들은 그 이유를 규범이 사회적으로 퍼져나가는 “norm cascade” 같은 요인에서 찾았는데, 이는 Finnemore & Toope가 강조한 정당성과 사회적 의무감의 중요성과 연결된다. 결국 이 사례는 법을 단순히 형식적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효과가 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정당성과 의무감이 뒷받침될 때 지켜진다는 Finnemore & Toope의 비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6. 결론: 개념적 기여의 한계와 대안
Finnemore & Toope는 IO 특집호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legalization” 개념은 협소하고 이론적 토대가 약해 학문적 지속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Our suspicion … is that this process will not yield a long trail of scholarship on the concept of legalization as defined in the volume” (p. 757).
대신, 관습법·정당성·과정을 포함한 넓은 시각이야말로 국제법과 국제정치학의 진정한 교차 연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논문의 학술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자.
1980~90년대에 국제기구와 제도가 협력을 촉진한다고 본 신제도주의(neoliberal institutionalism) 이론이 주류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법도 제도의 한 형태”로 다뤄지기 시작함.
당시 IR에서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 가 부상하고 있었고, 국제법을 사회적 규범·정체성과 연결해서 연구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었다. Finnemore는 구성주의 진영의 대표 연구자였기 때문에, 법을 단순히 제도적 산물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의미와 정당성을 강조한 것.
- IR 쪽에서는: “법을 계량적으로 다루자”는 흐름(신제도주의) vs “법을 사회적 과정으로 보자”는 흐름(구성주의)이 맞붙은 장면이었고,
- IL 쪽에서는: “법을 단순히 규칙의 집합으로 환원하지 말고, 정당성과 관습, 과정의 차원까지 보자”는 오래된 주장을 IR에 연결한 시도.
비판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IO 특집호는 법을 의무·명확성·위임으로 환원했지만, 그 결과 실증적 예측력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Finnemore & Toope는 반대로 개념적으로 과잉 확장을 했다. 정당성·관습·과정 등 ‘법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열거했다. 두 접근 모두 전략적 실패가 아니었을까? 결국 제도와 규범을 어떻게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더 어려운 과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