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hang, Yun and Yimeng Jia. 2021. "From Confrontation to Cooperation." Asian Survey 61(4):615-640.
Oct 1, 2025
1999년 ILO가 미얀마에 강제노동 중단을 권고하면서 미얀마는 국제사회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군사정부는 이를 부인하며 주권 침해라 반발했으나, 2002년 ILO 사무소 개설 이후에도 2005~2006년에는 ILO가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거론하고, 미얀마 정부는 탈퇴를 시사하는 등 극도의 대립이 이어졌다. 그러나 2007년부터 관계가 급변해, ILO는 단 세 명의 직원에서 2015년 113명 규모로 확대될 정도로 현지 기반을 확립했고, 미얀마 정부가 신노동법 제정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협력적 태도로 전환했다. 기존 연구는 국제노동법적 시각이나 국제 압력 요인에 치중했으나, 이는 군부 내부의 정치적 역학이나 인식 변화를 간과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원칙적 관여(principled engagement)’라는 개념이 대안적 설명틀로 제시되었지만, 여전히 외부인의 시각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보완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2007~2010년 ILO–미얀마 상호작용을 분석하며, 군부 지도부 내부의 인식 변화를 중심으로 국제기구와 권위주의 체제 간 관계 변화를 조명한다. 연구진은 2017~2020년 네피도와 양곤을 아홉 차례 방문해 테인 세인 전 대통령(당시 군부 서열 4위), 쉐 만 전 총참모장(군부 서열 3위) 등 최고위급 인사와 심층 인터뷰(각 3시간, 총 2회씩)를 진행하고, 서면 답변도 확보했다. 또한 미얀마 정부 협상 대표였던 뉀 마웅 쉐인 대사와 2007~2015년 ILO 연락관 스티브 마샬을 비롯한 실무자들과의 면담, 방대한 ILO 공식 문서·회의록 검토를 결합하여 사건 전개를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국제 압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군부 내부 인식 전환의 메커니즘과, 권위주의 환경 속 국제기구 활동의 성공 조건을 밝히고자 한다.
분석틀
저비스(Jervis, 1976)의 분석에 따르면 정부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주요 관심사’를 기준으로 외부 행위자를 단순화해 판단하며, 상대가 이를 존중하지 않으면 적대 세력으로 분류해 협력을 축소한다. 따라서 국제기구가 권위주의 정부와 협력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의 관심사에 민감하게 대응해 적대적 인식을 ‘위협적’에서 ‘중립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 단계에서는 적절한 탈정치화(depoliticization)가 중요한데, 국제기구의 활동이 국내 분열을 심화시키지 않고 기술적·관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신호를 주면 정부는 오인을 수정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열게 된다. 이는 인식 환경(epistemic environment)을 바꾸는 첫 단계로서, 건설적인 상호작용의 기반이 된다.
이후 외부 행위자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정부 눈치만 보며 활동을 최소화하는 ‘안전 제일’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내부적 요구를 파악해 공통의 이익을 발굴하며 협력의 장을 확장하는 전략이다. 후자의 경우 담론이 수렴되고, 공통 학습이 이루어져 아들러(2005)가 말한 실천공동체(communities of practice)가 형성된다. 이를 통해 정체성, 제도, 새로운 정치 의제가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국제기구의 정치적 민감성은 핵심 역량이다. 정치화는 분열과 갈등을 심화할 때는 부정적이지만, 협상과 합의를 촉진할 때는 긍정적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치화 자체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정치화를 켜고 끄는가이며, 권위주의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려면 국제기구는 기술적 중립성과 정치적 조율을 상황에 맞게 결합해야 한다.
~2007 : A Victim of Self-Politicization
2002년 ILO의 양곤 주재 허용은 국제 압력의 결과라기보다는 군부 내부의 정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1997년 SLORC(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에서 SPDC(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국가평화발전위원회)로의 전환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라 젊은 군부 엘리트의 충원과 ASEAN가입 같은 조직적 변화였다. 이들은 과거 세대와 달리 개혁을 추진할 인물들이었다. 2001년 경제 상황이 개선되고 15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군부는 헌법 제정과 정치 전환을 모색했고, 이를 위해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민주주의민족동맹)와 소수민족 세력의 참여가 필요했다. Than Shwe(탄 쉐) 최고사령관은 새 지도자들과 아웅산 수치를 연결하기 위해 회동을 주선했고, 이는 국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ILO의 현지 주재가 허용된 것이다.
1988 민주화 시위 이후 시대적 배경
1988년 민주화 시위(8·8·88 항쟁)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장악 → SLORC(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 수립
SLORC는 강압적 통치, 인권 탄압, 강제노동으로 악명 높았음.
1990년 총선에서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민주주의민족동맹)가 압승했지만 군부는 결과를 무효화하고 아웅산 수치를 가택연금.
2. 1997년 체제 변화와 ASEAN 가입
1997년 SLORC가 SPDC(State Peace and Development Council, 국가평화발전위원회)로 개편됨.
단순한 이름 바꾸기가 아니라 세대 교체와 조직 재편의 의미.
젊은 군부 엘리트들이 새로 지도부에 합류 → 개혁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했음.
같은 해 미얀마는 오랜 논쟁 끝에 ASEAN 가입.
국제사회 편입을 통해 정권 정당성을 얻으려는 계산.
3. 2001~2002년 변화 조짐
2001년 경제가 일부 호전, 여러 소수민족과 휴전 협정(2002년까지 15건 체결).
SPDC는 헌법 제정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 재개를 고려 → 정치 전환의 명분 필요.
이때 아웅산 수치와 NLD가 참여해야 국내외 정당성을 확보 가능.
그래서 2002년 1월 군부 지도부가 아웅산 수치와 오찬 회동 →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려는 신호.
같은 해 5월 ILO와 양곤 연락사무소 설치에 합의 → 이 또한 변화의 분위기와 연결됨.
2003년 이후 후퇴
2003년 Depayin(데파인) 사건: 수치의 유세 행렬이 공격당해 다시 가택연
그러나 2003년 Depayin(데파인) 사건으로 아웅산 수치가 재연금되면서 군부와 NLD 관계는 무너졌고, NLD는 국제기구 제소와 같은 전통적 자유민주주의 전술에 의존했다. ILO는 반복적으로 수치와 접촉하며 조언을 구했는데, 이는 군부로 하여금 ILO가 국내 정치에 개입한다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미국과 EU의 제재 강화, ILO 회의장에서의 모욕적 경험 등이 더해져 군부는 ILO를 “도우는 자 혹은 해치는 자”라는 단순한 틀로 판단했다. 결국 ILO의 principled engagement(원칙적 관여)노력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자신들의 정치 전환 계획을 위협한다고 보고 협력을 최소화했으며, 이는 국내 정치 교착과 국제기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2007 Depoliticizing the ILO
2007년 2월 국제노동기구와 미얀마 정부는 강제노동 제보를 보호하고 처리하기 위한 보충이해(SU, Supplementary Understanding) 에 서명했으나, 실행 과정에서 심각한 한계에 직면했다. 양곤 외 지역 접근을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가 없어 다른 유엔 기구(UN agencies)의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ILO는 민족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의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정치적 편향 의혹을 불러일으켜 군부는 SU가 야당의 정치적 무기로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특히 군부가 주도한 헌법 제정 과정에서 안정 유지가 최우선 과제였던 만큼,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의 가택연장(2007년 5월) 등 조치에도 이러한 우려가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ILO는 SU를 단순한 감시 장치에서 벗어나 중립적이고 협력적인 틀로 재설정했으며, 정치적 동기성이 의심되는 제보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2007~2008년 접수 사례 중 42% 기각), 인식 제고·훈련 등 협력 영역을 확장하면서 정부의 불안을 완화하려 했다.
같은 해 9월 연료보조금 축소로 촉발된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 은 대규모 승려 시위를 불러왔고, 일부 전직 지도자조차 군부의 정통성 부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폭력적 진압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정 일정은 차질 없이 진행되어 군부의 전환 의지를 보여주었다. 국제적으로는 유엔 국가팀(UN Country Team) 상주대표 찰스 페트리(Charles Petrie) 추방 등 강경한 대응을 보였지만, 동시에 ILO에는 외국인 보조관 입국을 허용하고(피야말 피차이웡세, Piyamal Pichaiwongse, 2007년 7월), 노동부와 공동으로 중재·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등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ILO 역시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며 활동의 정치성을 줄이고 공정성을 강조했고, 이는 군부가 ILO를 대립적 외부 압력세력이 아니라 중립적 국제 파트너(neutral international partner) 로 인식하게 만드는 변화를 이끌었다.
2008 Exploring New Cooperation in the Context of the New Constitution
2007년 2월 국제노동기구와 미얀마 정부는 강제노동 제보를 보호하고 처리하기 위한 보충이해(SU, Supplementary Understanding) 에 서명했으나, 실행 과정에서 심각한 한계에 직면했다. 양곤 외 지역 접근을 위한 전국적 네트워크가 없어 다른 유엔 기구(UN agencies)의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ILO는 민족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의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정치적 편향 의혹을 불러일으켜 군부는 SU가 야당의 정치적 무기로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특히 군부가 주도한 헌법 제정 과정에서 안정 유지가 최우선 과제였던 만큼,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의 가택연장(2007년 5월) 등 조치에도 이러한 우려가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ILO는 SU를 단순한 감시 장치에서 벗어나 중립적이고 협력적인 틀로 재설정했으며, 정치적 동기성이 의심되는 제보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2007~2008년 접수 사례 중 42% 기각), 인식 제고·훈련 등 협력 영역을 확장하면서 정부의 불안을 완화하려 했다.
같은 해 9월 연료보조금 축소로 촉발된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 은 대규모 승려 시위를 불러왔고, 일부 전직 지도자조차 군부의 정통성 부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폭력적 진압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정 일정은 차질 없이 진행되어 군부의 전환 의지를 보여주었다. 국제적으로는 유엔 국가팀(UN Country Team) 상주대표 찰스 페트리(Charles Petrie) 추방 등 강경한 대응을 보였지만, 동시에 ILO에는 외국인 보조관 입국을 허용하고(피야말 피차이웡세, Piyamal Pichaiwongse, 2007년 7월), 노동부와 공동으로 중재·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등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ILO 역시 정부의 입장을 존중하며 활동의 정치성을 줄이고 공정성을 강조했고, 이는 군부가 ILO를 대립적 외부 압력세력이 아니라 중립적 국제 파트너(neutral international partner) 로 인식하게 만드는 변화를 이끌었다.
2009: Child Soldiers and Direct Interaction with the Military
2009년을 전후해 ILO는 아동병사(child soldier) 문제를 매개로 미얀마 군부와 본격적인 직접 교류를 시작했다. 군부는 국제 평판을 의식해 2004년 이미 관련 위원회를 설치했으나, 낮은 인식 수준과 소수민족 무장 갈등으로 문제는 지속되었다. SU 체결 이후 민간 강제노동 제보는 줄고 아동병사 제보가 다수를 차지했으며, 2010년 총선을 앞둔 군부는 ‘현대화된 조직’ 이미지를 위해 ILO와 협력할 동기를 갖게 되었다. 2009년에는 ILO와 정부가 전국 단위 인식 제고 활동을 제도화했고, ILO가 접근 불가능했던 민감 지역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아동병사 모집 규정 위반 장교가 처음으로 해임·실형을 선고받았으며, 군부는 모집소 점검, 사관학교·군사기술연구소 방문 허용 등 투명성을 높였다. 2011년 들어 ILO 제보의 60%가 아동병사 문제였으나,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 실질적인 징계로 이어지면서 ILO와 군부 간 신뢰가 크게 강화되었다.
2010: ILO’s Repoliticization
2010년 11월, 미얀마는 20년 만에 총선을 예정하고 있었고, 군부 지도부는 선거 정치 참여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군부 기반의 연합연대발전협회(USDA, Union Solidarity Development Association) 를 연합연대발전당(USDP, 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 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군부 주도의 선거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새 정부의 정통성은 국내외적으로 의문시될 것이 분명했기에 군부는 일정 수준의 자유화와 개혁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정부는 2010년 초 총선 이후 새 의회에 노동조합법(Trade Union Act) 을 제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ILO는 이를 즉각 포착해 2010년 1월 방미 시 국제노동기준국(International Labor Standards Department) 부국장 카렌 커티스(Karen Curtis)를 파견, 결사의 자유(ILO 협약 87호, Convention No. 87) 관련 설명을 진행했다. 정부는 당시까지 ILO의 개입을 내정 간섭으로 비판했으나, 헌법 채택(2008년) 이후에는 점차 논의를 수용하고 의견 교환을 요청하는 등 변화된 태도를 보였다.
2011년 2월 노동부 장관은 헌법과 ILO 협약을 반영한 노동조직법(Labor Organization Law) 을 의회에 제출할 계획을 밝혔고, 이는 ILO가 반복적으로 요구해온 결사의 자유 제도화에 부합하는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노동운동가 구금 문제가 정치범 논란과 맞물려 있었는데, 정부는 형사범죄라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2011년 초 장관은 국제노동총회(International Labor Conference, 2011년 6월)를 앞두고 사면 가능성을 시사했고, 실제로 5월 테인 세인(Thein Sein) 정부는 첫 사면을 단행했다. 이는 군부 내 강경파와 야당 사이에 놓인 테인 세인 정부가 “포괄적 정치(all-inclusive politics)”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조치였다. 결국 2011년 10월, ILO의 지원을 받아 노동조합 결성이 합법화되었고, 이는 1962년 이후 처음이었다. 과거 테러조직으로 낙인찍혔던 버마노동조합연맹(FTUB, Federation of Trade Union Burma)도 합법화되었다. ILO는 이처럼 군부의 내부 변화 수요와 정치적 전환 국면을 활용해 결사의 자유라는 민감한 의제를 다시 정치화(repoliticization)하며 개혁 성향 세력을 지원했고, 군부는 ILO를 전환기의 신뢰할 만한 파트너(reliable partner) 로 인식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 ILO와 미얀마 군부 관계는 적대에서 협력으로 전환된 대표적 사례다. 초기에 ILO는 NLD(민족민주동맹)와 가까운 태도와 비판적 입장 때문에 군부로부터 “외세-야당 동맹자”로 인식되었으나, 2007년 이후 정치적 동기성이 있는 제보를 배제하고 인식 제고·훈련 같은 협력 분야를 확장하면서 점차 중립적 행위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08년 헌법 채택 이후에는 정부의 내부 입법 수요를 포착해 결사의 자유와 노동조합 설립 문제를 직접 제기하며, 단순 모니터링을 넘어 입법 자문 파트너로 역할을 확장했다. 결과적으로 ILO는 미얀마의 민주적 전환 과정에서 실질적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토대에는 군부 지도부의 일관된 권력이양 의지가 있었다. 탄 슈웨(Than Shwe) 체제는 반민주적 독재로 묘사되었지만, 헌법 제정과 권력이양 필요성에는 꾸준히 공감하고 있었다. 다만 민주화 방식에서는 야당과 갈등하며 정치 교착을 겪었으나, 결국 헌법을 전환의 제도적 기반으로 삼았다. ILO와의 협력도 이 국내 일정 속에서 결정되었으며, 강제노동 철폐는 군부 핵심 이해를 위협하지 않았기에 개혁 엘리트들의 협상 여지가 존재했다. 따라서 권위주의 체제에서 국제기구의 성공은 집권 세력의 변화 의지에 달려 있으며, 국제기구가 이를 단순한 선전으로 치부하지 않고 민감하게 포착할 때 지속적 협력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