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소련이 약화되고 동서 갈등이 점차 완화되던 시기였다. 군사적 억지와 핵 균형이 여전히 중요했지만, 유럽에서는 군사동맹인 NATO만이 아니라 경제 공동체(EEC)가 점차 정치적·외교적 목소리를 키워갔다. ‘안보의 경제화(securitization of economy)’라는 흐름 속에서 경제·제도적 수단을 통한 영향력 행사가 국제정치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냉전 종식 직전과 직후에는 군사 개입 대신 제도적 조정과 경제적 압박이 국가 간 갈등을 다루는 주요 수단으로 실험되었다.
2. 경제 제재의 부상과 다양한 사례
이 시기 경제 제재는 군사 개입의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1980년대 초 서방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폴란드 사태에 대응해 무역 제재와 올림픽 보이콧을 논의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문제를 두고도 경제 제재를 둘러싼 격렬한 국제 논쟁이 있었다. 리비아가 테러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1986년 미국은 무역·금융 제재를 주도했다. 이어 1990~91년 걸프전에서는 유엔이 전례 없는 수준의 대이라크 제재를 시행했는데, 이는 군사적 개입과 결합해 국제 제재가 안보정책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에 맞서 군사 행동뿐만 아니라 경제 제재를 추진했으며, 특히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협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다른 회원국들은 전쟁 개입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 경제적 손실 때문에 제재를 꺼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EEC 제도의 절차와 인센티브 구조를 활용해 회원국들을 묶어내고, 예산 문제와 포클랜드 문제를 연계(linkage)하는 전략을 통해 제재 연장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제도는 단순한 회의장이 아니라 거래비용을 줄이고 협력의 신뢰성을 높이는 핵심 장치로 작동했다.
이 사례는 제도가 국가 협력에 어떤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협력이 단순한 공통 이익 때문이 아니라 특정 국가의 강력한 이해관계와 제도를 통한 교차 이슈 연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제도주의가 말하는 “대칭적 집단행동 문제 해결” 모델도 아니고, 현실주의의 “제도 무의미론”과도 다르다. 나아가 포클랜드 제재는 냉전 종식 이후 점차 중요해진 경제 제재의 특징을 선취적으로 드러내며, 이라크 제재 등 후대 사례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국제기구는 때로는 제약적 요인, 때로는 협력 촉진 장치로 기능하며, 제도와 국가 이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협력이 형성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포클랜드 사태의 원인
1982년 포클랜드 위기는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200년 넘는 영유권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아르헨티나는 1820년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1833년 이후 영국이 지배해왔다. 포클랜드 주민들은 영국에 강한 충성을 보였고, 영국 내 ‘포클랜드 로비’는 주권 양도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아르헨티나는 경제·정치 위기 속에서 군사정권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침공을 결심했다. 1982년 3월 남조지아 사건을 계기로 사태가 악화되었고,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와 주변 제도를 침공했다. 영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결의안 502를 통과시키며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아르헨티나와 단교하고 자산 동결 및 무역 금지 등 경제 제재를 시행했다.
사실상 이들은 common interest가 없었다고 볼 수 있음 →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피해를 보게 되므로, 전쟁을 막기 위한 공통이익은 있었다고 볼 수 있음. 영국은 K그룹에 해당
이후 영국은 다른 국가들, 특히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제재 동참을 이끌어내려 했으며, 독일·프랑스 등은 (1) 협력의 결과 무기 금수에 나섰다. (이는 전쟁을 막기 위함임) 미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영국을 지원했고, 4월 말 원정군이 도착하며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5월 2일 영국이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를 격침하자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고, (이 때부터 전쟁) 이어 아르헨티나는 영국 구축함 셰필드를 침몰시켰다. 유엔과 페루가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영국은 5월 21일 상륙작전을 개시해 전세를 장악했다. 결국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항복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고, 이는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 수입(소가죽) 때문에 제재 동참할 유인이 적었음
해결과정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중심 무대로 삼아 아르헨티나에 대한 경제제재 동참을 이끌어냈다. 초기에는 회원국들이 제재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외교적 대안으로 인식했고, 단기간의 비용만 감수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영국은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을 설득하며 신속히 공동 결정을 이끌어냈고, 1982년 4월 10일 EEC는 무기 금수와 아르헨티나산 수입 전면 금지를 결의했다. 평소 느린 의사결정 구조와 달리 이례적으로 빠른 합의였으며, 이는 영국의 집중적인 외교적 노력 덕분이었다.
- “제도” 때문에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음. 표준, 공유, 감시 (배신자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은 국가들의 심리)
그러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 침몰 등으로 유럽 여론은 영국을 공격자로 보는 시각도 커졌고, 아일랜드·서독 등은 제재 지속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경제적 피해와 정치적 부담 때문에 개별국이 철회하고 싶어 했지만, EEC 제도의 구속력은 회원국들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았다. 즉, 공동체 틀 안에서 합의가 유지되는 한, 각국은 불만이 있어도 쉽게 이탈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5월 중순 제재 갱신 협상이었다. 여기서 영국은 외교적 지렛대로 EEC 예산 분담 문제와 공통농업정책(CAP)을 활용했다. 당시 영국은 CAP(Common Agricultural Policy, 농업 보조금 체계)의 가장 큰 불만 국가였다. CAP는 유럽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농산물 가격지지·보조금 지급·농산물 수입규제를 핵심으로 하는 정책이었는데, 프랑스 등 농업 중심국이 큰 혜택을 보는 반면 영국은 농업 비중이 낮아 혜택은 적고 분담금 부담은 과도했다. 이른바 “영국 리베이트(British rebate)” 요구는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결국 영국은 예산 및 CAP 관련 문제에서 일부 양보를 얻어내는 대신, 회원국들의 제재 연장을 확보했다. 따라서 포클랜드 제재는 단순한 안보 대응이 아니라 EEC 내부의 구조적 갈등과 영국의 ‘이슈 연계(linkage politics)’가 결정적이었다.
-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국가들은 자국 이익을 철저히 계산하며, 제재 협력조차 강압적 흥정과 사이드페이먼트에 의해 유지되었다. 실제로 영국은 “군사적 사안(포클랜드)”을 “재정적 사안(EEC 예산·CAP)”과 맞바꾸는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협력이 이상적 공동선 때문이 아니라 힘과 이해관계의 비대칭 때문에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 그러나 신제도주의적 시각에서는, 이러한 교환이 가능했던 것은 EEC라는 제도적 틀 덕분이라고 본다. 제도는 (1) 다양한 사안을 패키지화(linkage)해서 단일 협상으로 묶었고, (2) 다자 협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래 비용을 줄였으며, (3) 합의의 신뢰성을 보장했다. 즉, 제도는 단순한 협상장이 아니라 협력의 매개자로 기능했다.
전쟁 초기 EEC의 제재 동참은 영국을 제외하면 직접적 이해관계가 약했음에도 나타난 협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보증게임(assurance game)처럼 “다른 회원국도 하면 나도 한다”는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각국이 경제적 부담과 국내 여론을 이유로 망설이는 가운데, EEC라는 제도적 틀이 최소한의 신뢰와 연대 압력을 제공한 결과였다. 즉, 상호 이익에 기초한 고전적 보증게임이라기보다는, 영국 외교적 설득과 공동체적 정치 압력이 결합해 만들어낸 제한적 협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 충돌이 본격화되자 제재의 비용은 예상보다 커졌고, 회원국들의 이해는 더욱 비대칭적으로 변했다. 이때 협력은 단순한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현안과 묶인 쟁점연계(issue linkage*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는 제도가 협상 비용을 줄이고 합의를 신뢰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 연구는 제도와 협력 연구의 향후 방향에 두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국제정치 연구자들은 국가 간 이해관계가 대칭적이라고 가정하는 죄수의 딜레마나 보증게임 모델보다, 이해관계가 비대칭적일 때 제도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더 많이 주목해야한다. 둘째, 제도가 임시방편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특정한 쟁점연계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의 제재나 분쟁 조정은 EU 대러시아 제재,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G7+ 우크라이나 지원 연합처럼, 오히려 소다자(minilateral) 혹은 양자 간 연합을 통해 추진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과거에는 “제도가 협력을 묶어내는 힘”이 상대적으로 컸다면, 지금은 “정치적 의지가 있는 국가들끼리의 클럽(Club of the Willing)”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따라서 질문은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 오늘날 제도는 여전히 협력의 신뢰성을 보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WTO의 무력화와 같이, 제도적 틀은 점점 주변화되고, 실질적인 협력은 특정 국가들의 소다자적 네트워크로 이동하는 추세일까? 만약 후자가 맞다면, 국제제도 이론(특히 신자유제도주의)은 제재와 협력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수정·보완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