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철학적 역사학자로서의 투키디데스

Strauss, Leo. City and Ma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1964)), pp. 139-242 (Chapter 3)
Sep 23, 2025
철학적 역사학자로서의 투키디데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의 정체’라는 이상적 정치질서를 탐구했다면, 투키디데스는 정치적 삶을 이상으로 초월하지 않고 전쟁과 권력 투쟁의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했다. 그는 아테네의 자유, 제국 건설, 확장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위대함과 비극을 기록하면서, 철학자가 말로만 제시할 수 있었던 “움직이는 도시(전쟁 중의 도시)”를 실제 역사 속에서 보여준다.

따라서 플라톤과 투키디데스의 차이는 철학과 역사라는 점에서 뚜렷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은 상호 보완적이다. 플라톤이 이상적 질서를 설계했다면, 투키디데스는 실제 전쟁과 제국 운영 속에서 그 이상이 시험받는 과정을 드러냈다. 이 점에서 투키디데스는 정치철학을 보완하는 역사적 증언자로 읽힐 수 있다.

저자는 투키디데스를 단순한 정치적 인간이나 기록가로 보지 않고, 보편과 특수, 운동과 정지,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보려는 ‘철학적 역사학자’로 해석한다. 특히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주의를 ‘의도적 타락’으로 본 반면, 투키디데스는 전쟁과 제국 운영의 필연적 결과로 민주화가 강화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 대비된다. 따라서 그는 도시의 자기 이해(신탁·재난·종교적 의례 등, 과학적 역사학이나 고전 정치철학이 무시했던 영역)를 통해, 고전 정치철학이 전제한 ‘자족적이고 고립된 이상도시’ 개념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요컨대 투키디데스의 작업은 철학을 대신하지 않지만, 도시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전쟁과 신성 개념이 정치의 한계와 가능성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여주는 독자적 기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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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전쟁사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중간에서 서술이 멈추는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는 1권 서문에서 밝힌 역사 기록의 목적—후세를 위한 교훈적 기록—이 이미 411년까지의 기술로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을 단순한 사건 기록자가 아니라,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를 평가하는 “역사에 대한 평가자”로 인식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한다 했지만, 그 의미는 단순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교훈을 남기는 데 있었기에 주관적 가치판단과 해석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의 서술은 역사를 왜곡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평가와 의미 부여였다고 볼 수 있다.

연설과 대담 서술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연설의 경우, 많은 청중이 있었고 투키디데스 자신이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아 기록의 신뢰성이 크다. 그러나 멜로스 대담은 실제 대화라기보다 저자의 재구성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굳이 정합성에 대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화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했는가? 이는 투키디데스가 역사가로서 단순 사실을 넘어 교훈 전달에 무게를 두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케르키라 내전의 묘사에서 드러나듯 그는 내전을 인간 본성의 “전형적 사례”로 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얼마나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장면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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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는 해외 원정을 나설 때마다 언제든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 머물지 못하고 곧 철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스파르타의 약점을 잘 알았기에 성 안에서 버티는 전략을 구사했다. 스트라우스는 이를 스파르타의 national character라 부르며, 스파르타를 덜 팽창적이고 온건하며 절제하는 성향으로 특징지었다. 반면 아테네는 척박한 자연환경 덕에 외부로부터 큰 공격을 받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그 안전한 조건 속에서 문명이 발달했다. 그러나 부와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기에, 시칠리아까지 항해하거나 동맹을 맺는 등 외부 팽창을 내재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는 바로 그 아테네적 성향을 “과도하게” 드러냈다. 투키디데스의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는 원정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아테네적 성향을 줄이고 스파르타적 캐릭터를 흉내 내려 했지만,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결국 균형을 잃고 붕괴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가 보기에 스파르타처럼 행동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아테네적 역동성과 스파르타적 절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바로 그 균형을 잃은 결과로 읽을 수 있다.

* 그리스인은 헬라스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Ἑλλάς, Hellas)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기들 세계를 부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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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케(ἀνάγκη, 필연·필수)

투키디데스의 맥락에서 의 논리를 수용한다는 것은, 결국 ‘현실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단일하지 않고, 주체가 처한 조건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따라서 멜로스인의 선택을 단순히 “비합리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스파르타 혈통의 유대, 신탁과 신의 개입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항복 시 치러야 할 정치적·도덕적 대가가 현실적 고려였기 때문이다.

즉, 멜로스인이 받아들인 아난케는 아테네가 말하는 아난케와 동일하지 않았다. 아테네에게 아난케는 힘과 팽창의 논리였지만, 멜로스에게 아난케는 신앙·정체성·명예를 버릴 수 없다는 또 다른 필연이었다. 결국 멜로스 대담은 “합리/비합리”의 단순 구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필연이 충돌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투키디데스가 단순히 강대국의 논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아난케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