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구성주의(Conventional Constructivism)의 주요 명제
Actors and Structures are Mutually Constituted
전통적 구성주의는 현실주의가 가정하는 “구조가 행위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거부하고,행위자와 구조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구성된다(mutually constituted)고 주장한다. 즉, 무정부(anarchy)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같은 국제 구조는 단순히 외부에서 국가의 행동을 제약하는 실체가 아니라, 국가들이 공유하는 규범(norms), 정체성(identities), 관행(practices) 속에서 의미를 얻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국가는 이러한 상호주관적 맥락 속에서 행동하며, 동시에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속한 구조를 재생산한다. 예컨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단순한 군사적 전략이나 물질적 조건의 결과가 아니라, “강대국(great power)”으로서의 자기 인식에 따라 유화정책(appeasement)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이 개입은 미국이 강대국임을 다시 확인하는 동시에, “강대국이란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들이다”라는 국제적 상호주관적 의미를 강화시켰다.
이처럼 구성주의는 국가의 행위가 사회적 의미에 의해 형성되고, 그 행위가 다시 구조를 유지·재생산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적 구조(material structure)만으로는 국제정치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무정부(anarchy)나 역량의 분포(distribution of capabilities) 같은 개념은 그 자체로 국가를 “사회화(socialize)”시킬 힘이 없으며, 국가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규범·문화·제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Hopf는 이를 “극장 화재”의 비유로 설명한다. 불이 난 극장에서 모두 출구로 달려가더라도, 누가 먼저 나갈지는 단순한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여성과 아이가 먼저인가, 힘센 사람이 먼저인가” 같은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의해 결정된다. 국제정치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행동은 힘의 분포가 아니라 공유된 규범, 문화적 기대, 제도적 관행 속에서 정의되고 조정된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세계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힘이 아니라 행위자와 구조를 함께 구성하는 사회적 의미(social meaning)의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Anarchy as an Imagined Community
Ted Hopf는 “무정부(anarchy)”를 단일하고 고정된 구조로 보던 주류 이론의 관점을 비판하며, 무정부는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의미의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는 Alexander Wendt의 논지를 확장해, 각 국가나 공동체가 공유하는 상호주관적 이해와 사회적 관행(communities of intersubjective understandings and practices)에 따라 무정부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국제정치의 모든 영역이 동일하게 “무정부적”이지 않으며, 안보와 같이 자조(self-help)가 필수적인 영역에서는 신현실주의적 무정부 개념이 유효하지만, 무역협정과 같은 제도적·협력적 영역에서는 그러한 무정부 개념이 거의 상상에 불과하다. 결국 Hopf는 무정부를 하나의 절대적 조건이 아닌, 여러 공동체와 이슈 영역마다 다르게 구성되는 사회적 현실의 스펙트럼으로 재정의한다.
Identity and Interests in World Politics
Hopf는 국제정치에서도 사회처럼 ‘정체성(identity)’이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라고 말한다. 정체성이 없다면 국가 간의 행동은 혼란스럽고, 모든 관계는 불확실성과 불신으로 가득할 것이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할 뿐 아니라, “상대가 누구인가”를 구분해 행동의 기준을 제공한다. 즉, 정체성은 곧 이익(interests)과 행동(action)의 방향을 규정한다. 국가는 자신이 가진 정체성에 따라 이익을 인식하고, 다른 국가들을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 따라 이해한다. 예를 들어 냉전 시기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을 ‘러시아’로 인식했는데, 이는 소련이 스스로 설정한 정체성과 상관없이 주변의 인식과 일상적 행위(러시아어 사용 등)가 그 정체성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즉, 정체성의 의미는 단일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의 상호주관적 구조(intersubjective structure) 속에서 결정된다. 이런 관점에서 구성주의는 신현실주의처럼 ‘모든 국가는 자기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전제를 비판하고, 정체성 자체가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본다.
이때 국가의 이익(interests)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정체성과 관행(social practices) 속에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강대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국가는 “군사력 유지” 같은 이익을 당연시하지만, “유럽연합 회원국”이라는 정체성은 “협력과 제도적 통합” 같은 전혀 다른 이익을 낳는다. 이처럼 정체성이 다중적이기 때문에, 구성주의는 신현실주의처럼 “모든 국가가 동일한 이익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Hopf는 존재하지 않는 이익(absent interests)조차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단순히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정체성과 규범이 그 이익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 결과’, 즉 ‘생산된 부재(produced absence)’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전기의 미국은 반공주의 정체성 때문에 ‘소련과의 협력’을 국가 이익으로 상상할 수 없었고, 권위주의 국가는 ‘표현의 자유’를 정책적 이익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관행이 허용하지 않는 이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이익이 생겨나는 방식뿐 아니라 왜 어떤 이익은 생기지 못하는가까지 이론화한다. 그 결과, 국가는 신현실주의가 상정하는 것보다 훨씬 폭넓은 행동 가능성을 가지지만, 그 선택은 여전히 사회적 구조와 규범의 틀 안에서 제약된다. 결국 국가의 자율성(agency)은 확대되지만, 그 자율성은 사회적 의미와 정체성의 그물망 안에서만 작동한다.
The Power of Practice
Hopf는 먼저 “권력(power)” 개념부터 새롭게 정의한다. 주류 이론은 권력을 군사력이나 경제력처럼 물질적(material) 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구성주의는 여기에 담론적(discursive) 차원을 추가한다. 즉, 권력이란 ‘세계가 어떻게 이해되고 해석되는가’를 형성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구성주의에서 ‘사회적 실천(practice)’이란 담론적 권력의 구체적 형태라고 설명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지식(power/knowledge)’ 개념, 그람시(Gramsci)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베버(Weber)의 ‘강제(coercion)’와 ‘정당한 권위(authority)’의 구분 등을 인용하며, 이런 사상들이 이미 “아이디어와 언어, 문화도 권력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사회적 실천이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공유된 의미(intersubjective meanings)를 재생산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강대국”, “제국주의자”, “적”, “동맹”이라는 다양한 미국의 정체성을 드러냈으며, 이 행동을 지켜보는 다른 국가들은 그 행위를 통해 “미국이란 어떤 존재인가” 를 다시 정의했다.
즉, 한 국가의 행동은 자기 정체성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그 행동이 일어나는 국제적 의미 구조(intersubjective social structure) 자체를 강화한다. 이처럼 사회적 실천은 행위자와 구조를 함께 만들어내며, 가장 큰 힘은 예측 가능성과 질서(order)를 생산하는 데 있다. 행위자들은 서로의 관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를 예상할 수 있고, 그 예측 가능성이 국제사회에 안정성과 규칙성을 부여한다.
Hopf는 이어서 사회적 실천은 ‘무엇이 정당하고 가능한 행동인가’를 결정짓는 통제력(disciplining power) 을 가진다고 본다. 사회적 실천은 특정 공동체 안에서 어떤 해석은 “정상”으로, 다른 해석은 “비정상”으로 만드는 기준이 된다. 즉, 실천은 행동의 의미를 고정(fix)하고, 이해의 경계를 설정하며, 공동체 내부에서 ‘허용 가능한 현실(permissible reality)’ 을 구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 실천은 정당성을 부여(authorize) 하고, 규율하며(discipline), 감시(police)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결국 이는 국제사회 전체뿐 아니라 그 안의 여러 정체성 공동체(예: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이슬람 국가들)를 유지시키는 힘이 된다. Hopf는 리처드 애슐리(Richard Ashley)의 논의를 인용하며, 외교정책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국내·국제·경제·정치의 경계를 정의하며 사건에 대한 해석을 조직하고 대안적 해석을 배제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구성주의가 말하는 ‘권력’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은 무기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세계의 의미와 행동의 규칙을 정의하고 유지하느냐의 문제다.
이 담론적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는 물론 군사력·경제력 같은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의미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실천의 장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Change in World Politics
Hopf는 구성주의가 세계정치의 변화(change)에 대해 “가능하지만 매우 어렵다”는 현실적 불가지론(agnosticism)의 태도를 취한다고 설명한다. 구성주의는 무정부(anarchy)나 질서(order)를 고정된 현실이 아니라 국가들의 인식과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s)이 만들어낸 산물로 보지만, 그 구조들이 한 번 형성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정부는 국가가 만들어가는 것(anarchy is what states make of it)”이라는 말은, 세계에 다양한 무정부의 형태와 행동 방식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서로 다른 질서들은 모두 이미 사회적 구조(social structures)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실천의 힘(power of practice)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신현실주의보다 세계정치를 더 유연하게 바라보지만, “생각만 바꾸면 구조가 바뀐다”는 낙관주의를 거부한다. 행위자들은 매일의 실천을 통해 자신이 속한 규범과 제약을 스스로 다시 만들어내므로, 세계정치의 변화는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Hopf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주의가 “변화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변화는 기존의 상호주관적 질서(intersubjective structures)가 완전히 폐쇄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과 실천, 그리고 물질적 자원을 가진 행위자들(alternative actors)이 등장할 때 가능하다.
로버트 콕스(Robert Cox)의 연구가 보여주듯, 영국과 미국의 패권은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동시에 역사적 변화 속에서 결국 쇠퇴할 수도 있었다. 또한 워커(Walker)가 말하듯, 구성주의는차이와 다양성을 드러내는 만큼, 기존 질서에 대한 잠재적 대안(potential alternatives)의 공간을 연다.
결국 구성주의는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를 “의미를 생산하는 권력(power to produce meaning)”을 둘러싼 끊임없는 경쟁으로 이해하며, 차이가 존재하는 한 변화의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본다. 요컨대 구성주의는 “행위자와 구조가 서로를 구성한다”는 전제 위에서, 세계질서의 변화는 쉽지 않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는 “모든 국가가 동일하게 행동한다”고 전제하여 변화의 여지를 차단하는 신현실주의와 달리, 구성주의가 변화의 동력을 정체성과 의미의 재구성 과정에서 찾는 이유다.
전통적 구성주의와 비판적 구성주의
구분 | 비판적 구성주의 | 전통적 구성주의 |
기원 | 비판이론에 충실함 (푸코, 하버마스, 그람시 등) | 비판이론에서 출발했지만 “너무 급진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함 |
관심사 | 권력, 담론, 지식의 관계를 파헤치고 기존 질서를 바꾸려 함 | 사회적 구성 과정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집중함 |
방법론 | 포스트모던·해석학적 접근 (비실증주의) | 경험적 연구·‘정상과학(normal science)’ 방법 유지 |
목표 | “세상을 바꿔야 한다” (transformative) | “세상을 더 잘 이해하자” (analytical) |
토머스 버거(Thomas Berger)처럼 일본과 독일의 국민 정체성(national identity)에 대해 장기간 고정된 특성을 전제하는 연구들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관행(practices), 제도(institutions), 규범(norms), 권력 관계(power relations)가 불변하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비판이론가들은 이를 ‘통제 가능성의 환상(illusion of control)’이라고 비판하며,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은 결코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 차이는 정체성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전통적 구성주의는 정체성과 그에 연관된 사회적 재생산 관행(reproductive social practices)을 발견하고, 그 정체성이 특정 행동(action)을 어떻게 낳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비판이론은 정체성의 결과를 분석하기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특정한 ‘자연화된 진리(a naturalized truth)’를 믿게 되는지를 탐구하며, 그 믿음이 만들어낸 신화를 폭로(exploding myths)하는 데 초점을 둔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변화(change)에 대한 관심과 변화를 촉진할 능력(capacity to foster change)을 강조하며, 단순히 사회를 설명하려는 구성주의보다 더 급진적인 성찰을 추구한다.
비판적 구성주의(critical constructivism)는 또한 연구자가 자신이 관찰하는 사회적 실체(social entities)의 구성과 재생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즉, 행위자(actor)와 관찰자(observer)는 분리될 수 없으며, 연구자는 스스로를 비판적 성찰(self-reflective critical inquiry)의 대상으로 포함해야 한다. 정체성의 기원(origins of identity)에 대해서도 두 입장은 갈린다. 전통적 구성주의는 정체성을 인지적(cognitive) 과정의 산물로 설명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비판적 구성주의는 정체성의 욕구가 ‘소외(alienation)’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와 아시스 낸디(Ashis Nandy)는 유럽의 정체성이 미주와 인도의 ‘타자(the Other)’를 만나기 전까지 불완전했다고 주장하며, 헤겔(Hegel)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bondsman’s tale)’처럼 타자와의 차이(difference)가 자기 정체성의 필수적 조건임을 보여준다. 전통적 구성주의는 이러한 ‘차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멈추지만, 비판적 구성주의는 니체(Nietzsche), 프로이트(Freud), 라캉(Lacan)의 통찰을 빌려, 차이가 어떻게 동화(assimilation)나 억압(oppression)의 논리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하며, 정체성의 형성 과정 자체에 내재된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
비판이론은 모든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에 권력이 작동하며, 그 안에는 항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비판이론의 핵심 과제는 이러한 권력 관계를 드러내고(unmask) 해방(emancipation)과 계몽(enlightenment)을 추구하는 데 있다. 반면 전통적 구성주의는 권력이 사회적 관행(social practices)을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 관계를 비판하거나 변화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지식과 통찰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 점에서 “분석적으로 중립적(analytically neutral)” 입장을 취한다. 흥미롭게도, 비판이론이 모든 사회 관계를 위계(hierarchy)·종속(subordination)·지배(domination)의 형태로 본다는 점은 현실주의(realism)나 신현실주의(neorealism)의 세계관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판이론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구성주의나 현실주의와 구별된다.
구성주의 연구 의제
저자는 구성주의를 국제정치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라카토슈의 연구 프로그램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구성주의 연구 의제를 제시한다. 그 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1) 기존 주류 이론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 구성주의적 대안을 제시하고, (2) 구성주의만이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를 탐구하며, (3) 마지막으로 구성주의 스스로의 약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위협의 균형(balance of threat),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s), 무정부 상태에서의 협력(cooperation under anarchy) 에 대한 신자유제도주의(neoliberal institutionalism)의 설명, 그리고 민주적 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에 대해 대안적 해석(alternative accounts)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위협의 균형(balance of threat)’ 논의에서 신현실주의(neorealism)는 국가들이 단순히 강한 힘(power)을 가진 국가에 맞서 균형을 형성한다고 본다. 그러나 스티븐 월트(Stephen Walt)가 지적했듯, 실제로 국가는 ‘힘’ 그 자체보다는 ‘위협(threat)’으로 인식되는 대상에 반응한다. 구성주의는 이 지점에 주목한다. 국가가 어떤 상대를 위협으로 인식하는가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적 인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이 냉전 시기 소련을 ‘공산주의 위협’으로 본 것은 단지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는 소련을 ‘러시아적 세력 확대’로 봤기에 미국처럼 반공 전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구성주의는 위협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각 국가가 ‘타자(the Other)’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적 구성물(social construct)로 본다.
이와 같은 논리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와 ‘무정부 상태에서의 협력(cooperation under anarchy)’ 논의에도 이어진다. 신현실주의가 안보 딜레마를 국가 간 불확실성(uncertainty)의 불가피한 결과로 본다면, 구성주의는 불확실성을 ‘상수(constant)’가 아닌 ‘변수(variable)’로 본다. 즉, 불확실성은 국가들이 서로를 어떤 정체성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동맹국 간에는 신뢰와 상호 이해가 존재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잠재적 적대국 사이에서는 불확실성이 확대된다. 이는 ‘정체성’이 곧 신뢰를 형성하고 위협을 줄이는 메커니즘임을 의미한다. 또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협력의 가능성을 제도(institutions), 규칙(rules), 투명성(transparency) 같은 물질적 요인에서 찾는다면, 구성주의는 공유된 정체성과 규범(shared identities and norms)을 협력의 기반으로 본다. 친구 관계에 있는 국가들은 자신을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파트너(partners in a shared enterprise)’로 이해하기 때문에 협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반면 서로를 낯선 존재나 경쟁자로 인식할수록 협력은 어려워진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국제정치를 단순히 힘의 계산이나 제도의 작동으로 설명하기보다, 국가들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즉, 사회적 의미(social meaning)와 상호 인식(intersubjective understanding) 의 세계로 본다.
또한 이 글은 국제 협력(cooperation)과 제도의 지속성(institutional persistence)을 서로 다르게 설명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협정 준수의 핵심 요인을 국가의 신뢰할 만한 평판(reputation for reliability)과 제도의 기능에서 찾는다. 그러나 구성주의는 이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이 바로 응고된 평판(congealed reputation)으로서, 특정 정체성을 가진 국가가 반복적으로 예측 가능한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신뢰가 형성된다고 본다. 또한 제도가 단지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제도를 구성하는 국가들이 서로를 공동의 파트너(common enterprise)로 인식하고 그 관계가 사회적 관행 속에서 재생산될 때 지속된다고 설명한다. 즉, 제도의 수명은 권력이나 이익의 변화가 아니라, 그 속에서 형성된 공유된 정체성과 규범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한편 ‘민주평화(democratic peace)’ 현상(민주국가끼리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사실)에 대해 구성주의는 기존의 구조적(structural)·규범적(normative) 설명보다 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민주국가들이 서로 평화로운 이유는 제도나 체제의 제약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intersubjective understanding) 관계를 맺는 사회적 인식 구조(social practices and norms) 덕분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구성주의는 이러한 설명을 민주국가에만 한정하지 않고,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처럼 민주주의가 약한 지역에서도 일정 기간 전쟁이 없었던 ‘권위주의적 평화(authoritarian peace)’ 현상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평화는 제도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들이 서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구성주의 과제 (1)
구성주의는 국가 중심의 힘과 이익만이 아니라, 민족, 젠더, 종교, 인종, 성정체성 등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이 국제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하며, 그 정체성들이 어떻게 구성되고 상호작용하며 재생산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을 주요 연구 목표로 삼는다. 주류 이론이 국가를 힘과 이익의 계산 단위로 본다면, 구성주의는 국가를 정체성(identity)과 의미(meaning)를 가진 사회적 행위자로 본다. 국가는 스스로를 ‘민주국가’, ‘이슬람 국가’, ‘서방 동맹국’ 등으로 정의하고, 이러한 인식이 외교정책과 행동을 결정한다. 1990년 이라크가 사우디를 ‘아랍 형제국’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미국 개입을 예상하지 못했던 사례는, 정체성의 해석이 억지(deterrence)와 전쟁 같은 국제정치적 결과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성주의는 “국가의 행동은 힘의 계산이 아니라,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제시하는 세 가지 연구적 확장 방향, 즉 (1) 다중적 정체성, (2) 문화와 국내정치의 복귀, (3) 학제 간 연구 전략을 설명한다.
먼저 구성주의는 국가가 하나의 고정된 행위자(single actor)가 아니라, 복수의 정체성(multiple identities)을 지닌 존재라고 본다. 한 국가는 상대를 단순히 ‘또 다른 국가(state)’로 보지 않고, 우방(friend), 동맹(ally), 위협(threat), 민주국가(democracy)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식한다. 이러한 관점은 국제정치를 민주주의–비민주주의, 강대국–약소국, 북–남(North–South) 같은 이분법적 틀로 구분하던 주류 국제정치학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구성주의는 정체성이 지역적·역사적 맥락(local historical context) 속에서 형성되고 경험적으로 재생산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 공동체(communities of identity)—예를 들어 종교, 문화, 문명 단위의 행위자들—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 단위를 제시한다. 결국 구성주의는 국가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정의되고 변형되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주며, 국제정치의 분석 범위를 확장한
둘째로 구성주의는 문화와 국내정치를 국제정치이론 속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기존 현실주의나 자유주의가 주로 외교·군사력 같은 체제적 요인(systemic factors)에 집중했다면, 구성주의는 국가 정체성이 국내의 사회적 관행과 문화적 규범을 통해 형성된다고 본다. 예컨대 아시스 낸디(Ashis Nandy)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자국의 남성적·성인 중심적 정체성(masculine and generational identity)을 바탕으로 인도를 여성적·유아적 존재(feminine and infantile Other)로 규정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물질적 힘의 불균형이 아니라, 제국적 정체성(imperial identity)과 담론적 권력이 제국주의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나아가 구성주의는 국가가 자국 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 정체성’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외부의 ‘타자(the Other)’를 필요로 한다는 점까지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구성주의는 언어학, 비판이론, 문화연구,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과 결합할 수 있는 개방적 연구 전략을 제안한다. 스스로를 단일 패러다임으로 규정하지 않고, 의사결정·정치문화·사회화 연구 등과 협력함으로써 국제정치를 사회적·심리적·문화적 차원에서 더 풍부하게 분석하려는 것이 구성주의의 궁극적 지향이다.
구성주의 과제 (2)
저자는 프리드리히 크라토크빌(Friedrich Kratochwil)과 코워트(Kowert)·레그로(Legro)의 비판을 인용하며, 구성주의가 ‘문화 이론(cultural theory)’은 될 수 있어도 ‘정치 이론(political theory)’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즉, 구성주의는 정체성과 규범 같은 사회적 과정이 정치적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설명하지만, 정치적 결과—예를 들어 전쟁, 동맹, 정책결정 같은—를 인과적으로 예측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런 점에서 구성주의는 ‘무엇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는 보여주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 되는가’(the outcome)는 설명하지 못하는 “과정의 이론(theory of process)”일 뿐이다.
반면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은 “정체성은 권력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전제 아래, 위계·지배·해방 같은 정치적 주제를 적극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모든 사회 관계는 지배와 종속으로 구성된다”는 전제를 너무 당연시한다는 문제가 있다. 즉, 비판이론은 정치성을 확보하는 대신 이론적으로 ‘닫힌(closed)’ 구조를 가지게 되고, 구성주의는 더 개방적이지만 구체적 설명력이 부족한 ‘이론적 불명확성(theoretical underspecification)’의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로 저자는 구성주의가 ‘정체성의 인과 메커니즘(causal mechanism of identity)’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코워트와 레그로는 구성주의가 정체성과 행동 사이의 상관관계(correlation)만 보여줄 뿐, 왜 특정 정체성이 특정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인과적으로(causally)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사회심리학과의 결합을 제시한다. 예컨대 일본의 ‘비군사주의 정체성(antimilitarist identity)’이 실제로 군사비 억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심리적·인지적 수준에서 분석함으로써, 정체성과 행동 간의 연계를 더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구성주의의 “마지막 문제”를 오히려 강점으로 본다. 구성주의는 해석주의적(interpretivist) 접근에 기반해, 정체성·규범·관행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하려면 방대한 자료와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구성주의 연구자는 수천 쪽의 문헌을 읽고, 수개월간 인터뷰와 현지조사를 수행하며, 일상적 사회관행(social practices)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연구자에게 큰 부담이지만, 바로 그 깊이와 정밀함이 구성주의의 진정한 가치라는 것이다.
전통적 구성주의(conventional constructivism)는 주류 국제정치이론(mainstream IR)과 비판이론(critical theory) 사이의 중간지대에 위치한다. 현실주의·자유주의 같은 주류 이론은 세계정치를 시간·공간의 차이 없이 균질한 체계로 간주하며 일반법칙을 도출하려 하지만, 구성주의는 이를 거부한다. 반면 비판이론은 세계정치를 완전히 이질적인 파편들로 보고 전체적인 질서 자체를 ‘권력의 산물’로 의심하지만, 구성주의는 이 역시 과도하다고 본다. 구성주의는 세계가 완전히 통합된 체계도, 해체된 파편의 집합도 아니라고 본다. 대신 ‘상호주관성의 공동체(communities of intersubjectivity)’, 즉 행위자들이 서로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하는 영역들에 주목한다. 이러한 공동체 내부에서는 일정한 규범과 정체성이 형성되어 예측 가능한 행동이 반복된다. 따라서 구성주의의 약속은 세계정치에 ‘균질성에 의한 질서(homogeneity)’가 아닌, ‘차이에 대한 인식(appreciation of difference)’을 통해 부분적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결국 구성주의의 약속이란, “세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반복되는 질서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즉, 모두가 똑같다고 가정하지 않고도, 국제정치 안에서 부분적인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구성주의의 강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