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Richard J. Regan, On Law, Morality, Politics (Hackett, 2002), ch. 1 Conscience, 2. Law, 3. Justice, 5. War and Killing, 8. Practical Wisdom and statecraft.
Oct 16, 2025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제1부 제1-2편(Prima Secundae, ST I–II)

Conscience

Synderesis(신데레시스) 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도덕적 인식의 근원적 능력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을 직관적으로 아는 ‘본능’을 의미한다. 이는 성 예로니모가 “영혼 속의 도덕의 불꽃”으로 처음 언급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양심(conscience; 양심은 ‘힘’) 과 구분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synderesis는 오류가 없는 이론적 인식 능력으로서 도덕 판단의 출발점이 되고, conscience는 이 원칙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실천적 판단 능력으로 때때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synderesis는 인간의 양심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도덕 직관의 토대라 할 수 있다.

양심은 이 원칙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기능인데, 잘못된 판단이 생기면 의지가 그와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의지는 악한가? 아퀴나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판단 (비록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도) 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양심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그 판단은 나중에 교정되어야 한다. 결국 그는 “양심은 인간이 가진 도덕적 판단의 원리이며, 잘못된 양심이라도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죄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퀴나스는 이 부분에서 “의지가 잘못된 이성과 일치할 때 선한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는 먼저,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이성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르려는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판단을 성실히 따른다면 겉보기에는 선한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러한 경우, 그 의지가 진정으로 선하다고 볼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잘못된 판단은 이미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며, 그 판단을 따르는 것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이성이 아니라 왜곡된 판단에 복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본래 하느님의 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잘못된 이성은 그 법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으므로, 그에 따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셈이 된다. 따라서 비록 사람의 내면이 ‘양심을 따르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양심 자체가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면 의지는 완전히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즉, 양심을 따른다는 사실만으로는 도덕적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 양심이 진리와 일치해야만 참된 선이 된다는 것이다.

  • 이성 자체(reason itself) → 선하고, 하느님의 법에서 비롯됨.
  • 잘못된 이성(erring reason) → 인간이 그 법을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한 결과로 생긴 오류의 상태.

결국 아퀴나스는 “의지가 이성과 함께 있을 때 선하다”는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성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 그 선함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짓는다. 의지는 이성이 제시하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성이 참을 보면 의지도 선해지고, 이성이 오류를 보면 의지도 그 오류를 함께 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양심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양심이 진리에서 비롯될 때에만 참된 선으로 인정된다”고 말한다.

이는 잘못된 양심이 면책 사유가 되는가? 와 연결된다고 본다. 그는 무지(ignorance) 가 두 가지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 어떤 무지는 자신이 알 수 있었는데도 게으름이나 부주의로 인해 모르는 경우(“죄 있는 무지”, vincible ignorance).
  • 다른 무지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모르는 경우(“죄 없는 무지”, invincible ignorance).


첫 번째 경우에는, 잘못된 판단이나 양심의 오류가 면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 수 있었는데도 배우지 않거나 확인하지 않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 번째 경우, 즉 사람이 정말로 몰라서, 혹은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착각한 경우라면, 그 행위는 비자발적(involuntary)으로 간주되어 도덕적 죄가 되지 않는다.

Law

아퀴나스는 인간 행위를 이끄는 외적 원리를 설명하면서, 선을 향하게 하는 힘은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grace) 이며, 그 은총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법(law)”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부터 시작한다. 이 문제를 네 가지로 나누어 다루는데,

(1) 법은 이성과 관계가 있는가,

(2) 법은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하는가,

(3)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4) 법이 어떻게 공표되는가(promulgation) 등이다.

제1항: “법은 이성과 관계가 있는가?” (Is Law Something Pertaining to Reason?)

아퀴나스는 먼저 법(law)을 단순한 명령이나 습관이 아니라, “이성의 규범(rule)과 기준(measure)”으로 본다. 법은 사람을 행동으로 이끄는 명령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권력자의 의지가 아니라 이성이 행위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질서 있게 이끄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는 “법이란 인간 행위를 이끌거나 억제하는 규칙이며, 그 규칙의 척도는 바로 이성(reason)”이라고 정의한다. 즉, 법은 이성의 산물이며, 인간의 행위가 이성에 따라 선을 향할 때 진정한 법이 된다. 법은 감정이나 명령이 아니라 “이성의 목소리”다.

제2항: “법은 항상 공동선을 지향하는가?” (Is the Law Always Directed to the Common Good?)

아퀴나스는 법의 목적을 명확히 한다.

법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질서, 즉 공동선(common good)을 향해야 한다. 그는 “법은 시민 모두의 행복을 목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개인의 사적 이익만을 위한 법은 진정한 의미의 법이 아니라 폭정(tyranny)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는 정치철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즉, 법의 정당성은 공동선에 대한 지향성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법은 모두의 행복을 위한 이성적 질서”이다.

제3항: “누구나 법을 제정할 수 있는가?” (Is the Reason of Any Person Competent to Make Laws?)

아퀴나스는 “모든 사람이 법을 만들 수는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법 제정은 단순한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이끄는 ‘공적 이성’(public reason) 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법을 만드는 것은 공동체 전체 또는 그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통치자)의 몫”이라고 설명한다. 즉, 아버지가 가족의 규칙을 정하듯이, 국가의 법은 전체 공동체를 위한 이성적 명령이므로, 개개인은 스스로를 위한 ‘사적 규칙’을 가질 수는 있어도 ‘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

제4항: 법이 되기 위해 공표가 꼭 필요한가? Is Promulgation Essential to a Law?

아퀴나스는 먼저 몇 가지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1) 어떤 사람들은 “자연법(natural law)은 이미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굳이 공표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법은 행동을 금하거나 명령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의무는 이미 그 법이 만들어질 때 생기므로, 공표되지 않아도 법의 효력은 있다”고 주장한다. 3) 또 “법은 미래 세대에도 효력을 미치지만, 미래의 사람들에게 직접 공표될 수는 없으니, 공표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에 반대한다. 그는 법이 진정한 ‘법’이 되려면 반드시 공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법은 사람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규범(rule and measure)이기 때문이다. 즉, 법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적용되려면 그 법이 알려져야 하고, 그 법을 따라야 할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법은 단순히 제정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표됨으로써 비로소 효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법의 적용(application)”이며, 공표는 그 적용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다음 질문은 법의 여러 종류 (Of the Various Kinds of Law)에 대한 것이다.

제 1항. 영원법이란 존재하는가? (Eternal Law)

아퀴나스는 “세상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이성(신적 지혜)’ 자체가 법이며, 이것이 바로 영원법이다. 이 법은 변하지 않으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목적을 향해 인도한다. “하느님의 이성 속에 있는 세계의 질서 자체가 곧 영원법이다.” 즉, 영원법은 우주 전체의 불변의 원리이고, 모든 다른 법의 근원이다.

제 2항. 우리 내면에 자연법이란 존재하는가? (Natural Law )

자연법은 인간이 가진 이성을 통해 영원법을 ‘참여(participation)’하는 방식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 전체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의 일부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라’ 를 본성적으로 깨닫는다. 이성 있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과 공동체의 선을 향하도록 타고났기에, 살아가며 본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 “자연법이란 인간 이성이 영원법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제 3항. 인간법이란 존재하는가? (Human Law)

자연법이 인간 이성에 새겨진 보편적 원칙이라면, 인간법은 그것을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예를 들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자연법은 “폭행 시 형벌을 부과한다”는 인간법으로 제정된다. 즉, 인간법은 자연법의 구체적 실천이며, 자연법에 부합할 때만 ‘진정한 법’이다. 만약 인간법이 정의를 어긴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라 ‘부정(不法, corruption of law)’이다.

제 4항. 신법이 필요한가? (Was There Any Need for a Divine Law?)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므로, 하느님은 구원을 위해 계시된 법, 즉 신법을 주셨다. 신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구약의 율법 (Old Law): 외적 행위 중심, 두려움에 의한 복종의 법 2) 신약의 은총의 법 (New Law): 내적 사랑 중심, 은총(grace)에 의한 법. 구약의 법이 외적 행동을 규제했다면, 신약의 법은 마음속 사랑과 믿음을 이끄는 법이다.

제5항. 신법은 하나뿐인가? (Is There but One Divine Law?)

본질상 신법은 하나이지만, 역사 속에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구약의 법은 준비 단계, 신약의 법은 완성 단계다. 즉, 같은 신의 법이지만 계시 수준(완성도, 성숙도)에 따라 나뉜 것이다.

제6항. 죄의 법이 존재하는가? (Is There a Law of Sin? Law of Concupiscence, 즉 욕망의 법)

아퀴나스는 ‘죄의 법(law of sin, “내 안에서 나를 끌고 가는 잘못된 힘”)’이 진정한 의미의 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법은 본래 이성에 근거해 공동선을 향해야 하지만, 죄의 법은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서 이성이 아닌 욕망(concupiscence)이 주도권을 잡아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왜곡된 질서(disordered order)일 뿐이다. 바오로가 “내 지체 속에서 또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로마 7:23)고 말했듯이, 인간은 내면에서 이성과 욕망이 충돌하는 이중적 상태에 놓여 있다. 아퀴나스는 이 욕망의 힘을 ‘법’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이성이 제 기능을 잃은 상태에서 욕망이 마치 법처럼 군림하는 비이성적 질서라는 점에서 참된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한 모방물이라고 규정한다.

다음으로 아퀴나스는 법이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제 1항. 법의 효과: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Is an Effect of Law to Make Men Good?)

일부는 덕(virtue)은 오직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법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선하게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법이 단지 외적 명령이 아니라, “통치자의 이성적 명령(dictate of reason)”으로서 인간 행위를 질서 있게 이끄는 규범임을 강조한다. 법의 목적은 인간의 행위를 ‘공동선(common good)’에 맞추는 것이며, 이성에 따라 행위하도록 훈련함으로써 사람을 점진적으로 선하게 만든다. 법이 선한 목적에 근거할 때 인간은 이를 따름으로써 덕을 습득하게 되고, 악한 목적을 위한 법(예: 폭군의 법)은 참된 의미의 법이 아니다. 즉, 법의 올바른 의도는 인간을 선으로 향하게 하며, 이로써 법은 덕의 실천을 촉진하는 수단이 된다.

제 2항. 법의 행위: 명령·금지·허가·처벌의 구조 (Are the Acts of Law Suitably Assigned?)

이어 아퀴나스는 법의 작용(acts of law)을 “명령(command)·금지(prohibition)·허가(permission)·처벌(punishment)”의 네 가지로 구분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법의 중심은 ‘명령’에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그 파생 형태라고 본다. 법은 명령을 통해 선을 행하게 하고, 금지와 처벌을 통해 악을 억제하며, 허가는 예외적 상황에서 행위를 인정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그는 인간이 선을 행함에 있어 단순히 ‘두려움(fear)’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 스스로 옳음을 깨닫고 따를 때 참된 덕이 형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법은 단지 억압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이성적 질서 속으로 인도함으로써 공동선과 덕을 이루는 교육적 수단으로 작용한다.

다음은 영원법에 대한 질문들이다.

제1항. 영원법은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최고 형태의 법인가?

아퀴나스는 영원법이 단순히 하느님 안의 ‘형상(type)’으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서, 법은 단순한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divine wisdom) 가 피조물을 질서 있게 인도하는 통치 원리(governing principle) 라고 설명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각 존재의 행위와 목적을 그분의 지혜에 따라 설계했기에, 그 지혜 자체가 곧 법의 본질이다. 따라서 영원법은 하느님의 지성 안에서 존재하는 ‘형상적 법’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궁극적 목적에 맞게 이끄는 신적 이성의 질서 자체이다.

제2항. 모든 이가 영원법을 알 수 있는가 ? Is the Eternal Law Known to All?)

모든 피조물이 영원법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성적 존재는 그 반영(reflection)을 통해 부분적으로 참여한다. 인간은 ‘진리의 일부’를 깨달을 때 이미 영원법의 빛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연법(natural law) 이 성립한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자연적 이성의 빛을 통해 영원법의 질서를 부분적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영원법의 흔적을 인식한다.

제3항. 모든 법은 영원법으로부터 비롯되는가? (Is Every Law Derived from the Eternal Law?)

아퀴나스는 “모든 참된 법은 영원법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본다. 영원법은 신적 지혜가 세상을 질서 있게 유지하는 근원적 원리이며, 인간법(human law)자연법 모두 그 파생물이다. 그러나 죄의 법(law of sin)과 같이 이성에 반하는 규범은 영원법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따라서 영원법은 모든 정당한 법의 근원이며, 각 법은 그에 참여(participation)함으로써 정당성을 얻는다. 인간법이 정의롭다면 이는 영원법의 일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제4항. 필연적이고 영원한 존재도 영원법의 지배를 받는가? (Are Necessary and Eternal Things Subject to the Eternal Law?)

필연적 존재(예: 천체의 운동, 영적 실체)는 영원법의 직접적 지배 아래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완전하게 질서지어져 있어 추가적인 규제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또한 하느님의 이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영원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복종’하지 않는다. 즉, 영원법은 그들 위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질서 자체가 이미 법의 완전한 실현인 셈이다.

제5항. 자연적 우연사도 영원법의 지배를 받는가? (Are Natural Contingents Subject to the Eternal Law?

우연적 사건(contingents)과 자연적 변화도 영원법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이성적 피조물은 법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의 섭리(providence) 에 의해 움직인다. 자연 현상은 자율적으로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부여한 자연적 본성에 의해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우연적인 일조차도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허용된 질서의 일부로서 영원법에 간접적으로 종속된다.

제 6항.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영원법의 지배를 받는가? Are All Human Affairs Subject to the Eternal Law?

인간의 모든 행위는 원리적으로 영원법의 통제 아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태에 따라 그 ‘복종의 방식’은 다르다. 의로운 자(righteous) 는 자발적으로 영원법의 명령에 순응하지만, 악한 자(wicked) 는 처벌과 고통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원법에 종속된다. 즉, 선인은 사랑과 지혜로 법을 따르고, 악인은 형벌을 통해 법에 복종한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짓는다.

다음은 자연법에 대한 질문이다.

제 1항. 자연법은 습관인가? Is the Natural Law a Habit?

아퀴나스는 자연법이 ‘습관(habit)’이 아니라 이성(reason)의 작용이라고 본다. 습관은 어떤 행위를 쉽게 수행하게 하는 내적 성향이지만, 법은 외적 규범이며 이성의 명령이다. 다만 인간이 자연법의 원리를 ‘습관적으로 지니고 있을 수’는 있으므로, 자연법의 원칙은 이성 안에 잠재적으로 ‘habitually’ 존재한다. 즉 자연법은 본질적으로 이성의 산물이지만, 인간의 정신 속에 습관처럼 내재할 수 있다.

제 2항. 자연법은 하나의 규범만을 포함하는가, 여러 규범을 포함하는가? ) Does the Natural Law Contain Several Precepts or One Only? )

자연법의 근본 원리는 하나, 즉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라”(good is to be done, evil is to be avoided) 이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세부 규범이 존재한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자기보존, 번식, 진리 추구 등)에 따라 세부적 명령이 나오며, 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보편적 법칙이다. 즉, 자연법은 하나의 근원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여러 조항으로 확장된다.

제 3항. 모든 덕의 행위가 자연법에 의해 규정되는가? (Are All Acts of Virtue Prescribed by the Natural Law?)

모든 덕행은 본질적으로 자연법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이 자연적으로 선에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덕의 행위(예: 절제, 용기)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즉, 덕의 일반 원칙은 자연법에 속하지만, 구체적 행위 양식은 상황과 이성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제 4항. 자연법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가? (Is the Natural Law the Same in All Men?)

자연법의 일반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적용의 정도와 명료성은 다르다. 즉, 보편적 진리(“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하라”)는 누구나 인식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규칙(예: 재산권, 형벌 등)은 인간의 지성과 환경에 따라 변한다. 따라서 자연법의 근본 원리는 불변하나, 구체적 적용에서는 차이가 있다.

제 5항. 자연법은 변화될 수 있는가 Can the Natural Law Be Changed?

자연법은 본질적으로 불변하지만, 보충(addition)제거(subtraction) 의 두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인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법 위에 새로운 인간법이 더해질 수 있고, 반대로 인간의 부패나 무지로 인해 어떤 부분이 약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본질이 아니라 ‘적용의 변화’로서, 자연법의 근본 원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제 6항. 자연법은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질 수 있는가?

자연법의 근본 원리는 인간의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질 수 없다. 그러나 부차적 원리(secondary precepts)는 열정, 악습, 왜곡된 판단으로 인해 손상될 수 있다. 즉, 인간의 죄성으로 자연법의 적용이 흐려질 수 있지만, 본성 자체에 새겨진 근본적 법칙(“선을 추구하라”)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다음은 인간법에 대한 것이다.

제 1항. 인간이 법을 제정하는 것이 유익한가? (Was It Useful for Laws to Be Framed by Men?)

아퀴나스는 인간이 스스로 법을 제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을 지향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덕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법은 훈련과 교정의 도구로 존재해야 한다. 법은 악을 억제하고, 처벌의 두려움을 통해 인간을 악행에서 멀어지게 하며, 점차 선행으로 습관화시킨다. 즉, 법은 완전한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성숙한 인간을 덕으로 이끌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제 2항. 모든 인간법은 자연법에서 유래하는가? (Is Every Human Law Derived from the Natural Law?)

모든 인간법은 자연법으로부터 두 가지 방식으로 유래한다. 첫째, 연역적 방식으로, 예를 들어 “타인을 해치지 말라”는 자연법에서 “살인을 금하라”는 구체적 법이 도출된다. 둘째, 구체화의 방식으로, 예를 들어 “범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자연법 원칙이 “사형” 혹은 “벌금형”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모든 정당한 인간법은 자연법의 이성적 질서에 근거하며, 만약 법이 그 질서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더 이상 ‘법’이 아니라 **‘부정의한 명령(perversion of law)’**이다.

제 3항. 이시도르의 인간법(실정법)에 대한 정의는 적절한가? (Is Isidore’s Description of the Quality of Positive Law Appropriate?)

이시도르는 “법은 덕스럽고, 정의롭고, 자연에 부합하며, 국가의 관습과 일치하고, 공공선을 위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퀴나스는 이를 전반적으로 옳다고 보지만, 핵심을 압축해 “법은 인간의 덕을 함양하고, 훈육에 유익하며, 공공선을 촉진하는 것”이라 재정의한다. 그는 “법의 유용성”을 강조하면서, 법이 현실의 시간·장소·능력에 따라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법은 덕과 공공선에 부합해야 하지만, 그 형태는 상황적 적응성(adaptation to time and place) 을 가져야 한다.

제 4항. 이시도르의 인간법 구분은 적절한가?(Is Isidore’s Division of Human Laws Appropriate?)

이시도르는 인간법을 “국제법(Law of Nations)”“시민법(Civil Law)” 으로 나눈다. 아퀴나스는 이 구분을 인정한다. 국제법은 인간 본성의 공통된 이성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예를 들어 무역·계약·재산의 원칙 등이 이에 속한다. 반면 시민법은 각 정치공동체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구체화된 법으로, 정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즉, 모든 인간법은 자연법에서 유래하지만, 국제법은 보편적 이성의 산물, 시민법은 특정 공동체의 실천적 결정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
Eternal Law (Divine Wisdom)

├──
Natural Law (Participation of Rational Creature in Eternal Law)
│ ├── Primary Precepts: "Good is to be done, evil avoided"
│ ├── Secondary Precepts: Derived moral rules
│ └── Immutable in principle, variable in application

└──
Human Law (Particular Determination of Natural Law)
├──
Function: Restrain evil, habituate virtue
├──
Derivation:
│ ├── (1) Deduction – from natural principle (e.g., "Do not kill")
│ └── (2) Specification – concrete legal forms (e.g., penalties)
├──
Quality: Just, virtuous, oriented to the common good
└──
Division:
├── Law of Nations (jus gentium)
└── Civil Law (lex civilis)

다음은 인간법의 효력에 대해 논의한다 (of the power of human law)

제 1항. 인간법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제정되어야 하는가 (Should Human Law Be Framed for the Community Rather Than for the Individual?)

아퀴나스는 법의 목적이 공동선(common good) 에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개인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법은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지향해야 한다. 법이 개별 사례나 개인의 욕구를 기준으로 제정되면 일관성과 정의가 무너진다. 따라서 인간법은 공동체의 질서와 덕을 증진시키는 보편적 규범으로 제정되어야 하며, 사적인 이익을 위한 법은 진정한 법이 아니다.

제 2항. 인간법은 모든 악을 억제해야 하는가? Does It Belong to Human Law to Repress All Vices?

인간법은 모든 악을 억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미성숙한 인간을 덕으로 인도하는 수단이지, 완전한 의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법이 모든 죄를 금지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법을 지키지 못해 사회 전체가 더 큰 악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인간법은 사회 질서를 직접적으로 해치는 중대한 악행(살인, 절도 등) 만을 금지하며, 경미한 악은 인간의 성장과 습관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정되도록 둔다.

제 3항. 인간법은 모든 덕의 행위를 규정하는가? Does Human Law Prescribe Acts of All the Virtues?

법은 모든 덕을 직접 규정하지 않는다. 덕은 개인적 성숙의 영역까지 포함하지만, 법은 오직 공공선을 직접적으로 증진시키는 덕(정의, 평화, 사회 질서 유지) 만을 다룬다. 즉, 절제나 온유 같은 사적 덕목은 법의 직접 대상이 아니며, 정의(justice) 나 공동선에 기여하는 행위만이 법적 규제의 범주에 들어간다.

제 4항. 인간법은 양심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는가? (Does Human Law Bind a Man in Conscience?)

정당한 법은 양심을 구속한다. 법이 정의롭고 공동선에 부합하며 정당한 권위에 의해 제정되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영원법에서 유래했으므로 양심상 반드시 따라야 한다. 반면, 불의한 법(unjust law) (예컨대 폭정이나 신의 명령에 반하는 법) 은 양심을 구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따르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다. 즉, 법의 도덕적 정당성이 양심의 의무를 결정한다.

제 5항. 모든 사람이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Are All Subject to the Law?)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법의 강제력(coercive power) 은 주로 악한 자에게 작용하고, 선한 자는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기에 외적 강제가 필요 없다. 영적 인간(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은 인간법을 초월하더라도, 여전히 사회 질서 안에서 신적 법의 지휘 하에 살아가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제 6항. 법 아래 있는 자가 법문(文字)을 넘어 행할 수 있는가?( May He Who Is Under a Law Act Beside the Letter of the Law? )

일반적으로는 법문(letter of the law)을 따라야 하지만, 예외적 상황에서는 법의 문자보다 입법자의 의도(spirit of the law) 를 따라야 한다. 법은 대체로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지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그 준수가 오히려 공동선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예컨대 적이 쳐들어오는데 “성문을 닫아야 한다”는 법 때문에 방어를 못한다면, 공동선을 위해 성문을 여는 것이 법의 진정한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개인의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공적 권한(authority) 을 가진 자에 의해 제한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다음은 인간법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
Eternal Law → Natural Law → Human Law
↓ ↓
Immutable Mutable by:
(1) Reason → improvement for common good
(2) Custom → collective reason of people
(3) Dispensation → authority for special necessity

제1항. 인간법은 변화될 수 있는가 (Should Human Law Be Changed in Any Way?)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법은 자연법에서 비롯되었지만, 자연법은 불변(immutable) 인 반면 인간법은 인간의 이성과 행위에 의존하므로 변할 수 있다. 법은 이성의 명령(dictate of reason)으로서, 인간이 더 완전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함에 따라 점진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단지 임의적이어서는 안 되고, 공동선을 더 잘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A temporal law, however just, may be justly changed in course of time”이라 말하며, 시대 변화에 따라 동일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법의 형식이 바뀌는 것은 정당하다고 본다

제2항. 더 나은 것이 발견될 때마다 법을 바꿔야 하는가 (Should Human Law Always Be Changed Whenever Something Better Occurs?)

그는 더 나은 제도가 생길 때마다 법을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법은 단순한 개선보다 안정성과 신뢰(stability and authority) 를 통해 효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는 법의 잦은 변경이 시민들로 하여금 법 자체에 대한 존중심을 잃게 하고 순응의 습관을 해친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변화는 반드시 “when the observance of the law is clearly unjust or extremely harmful to the common good” 결국 법의 개혁은 공동선의 명백한 증진이 입증될 때만 신중히 단행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제3항. 관습은 법의 효력을 가질 수 있는가 (Can Custom Obtain the Force of Law?)

아퀴나스는 관습(custom) 역시 이성의 반복된 행위이므로 법의 효력(force of law) 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인간법은 말로 제정되지만, 이성적 행위가 반복되어 사회적 합의(consensus) 를 이루면 그것 또한 법의 한 형태가 된다. “Custom has the force of law, abolishes law, and is the interpreter of law”라는 그의 말처럼, 관습은 법을 보충하고 때로는 폐기하며, 법의 정신을 해석하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다만, 관습은 공동선에 부합할 때만 정당한 법적 효력을 가지며, 악습은 “Let custom yield to authority; evil customs should be eradicated by law and reason”과 같이 폐기되어야 한다.

이하는 구약에 대한 질문이다.

제1항. 모든 구약의 도덕법은 자연법에 속하는가 (Do All the Moral Precepts of the Old Law Belong to the Law of Nature?)

아퀴나스는 구약의 도덕법이 본질적으로 자연법에 근거하지만, 그 모든 조항이 자연법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연법은 “이성에 의해 스스로 인식되는 보편적 원리”이지만, 도덕법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즉각 파악되지 않는 신적 계시의 요소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는 “The Gentiles, who have not the Law, do by nature those things that are of the Law”라며,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선(善)에 관한 조항들은 자연법에 속한다고 보았다. 결국 도덕법은 자연법에서 비롯되지만, 신의 계시가 보충한 형태로 완성된다.

제2항. 도덕법은 모든 덕의 행위에 관한 것인가 (Are the Moral Precepts of the Law About All the Acts of Virtue?)

아퀴나스는 도덕법이 모든 덕의 행위를 포함하지는 않으며, 공동선(common good) 을 직접적으로 지향하는 행위들만 규율한다고 본다. “법은 정의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acts of justice)”라고 한 그는, 인간법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질서를 세우듯, 신법(divine law) 또한 인간의 공동체와 신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렬시키기 위해 주어졌다고 본다. 따라서 정의는 모든 덕의 조정자이며, 도덕법은 이를 통해 인간의 행위가 신의 질서에 맞게 조율되도록 한다.

제3항.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Are All the Moral Precepts of the Old Law Reducible to the Ten Precepts of the Decalogue?)

그는 모든 도덕법이 십계명(Decalogue)에 환원된다고 본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자연법의 요약(summary of natural law)”이며, 그 외의 법들은 십계명에서 파생된 세부 조항들이다. “Moses, after propounding the ten precepts, set them out in detail”이라는 인용처럼, 십계명은 자연법의 첫 원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다른 도덕법들은 그 원리를 구체화한 결론들(conclusions)이다.

제4항. 십계명의 조항들은 서로 구분되는가 (Are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Suitably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아퀴나스는 십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구분하여 배열된다고 본다. 앞의 세 항은 하나님과의 관계(“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뒤의 일곱 항은 인간 상호 간의 정의(“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를 다룬다. 신앙과 사회적 덕목의 질서는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제5항. 십계명은 적절히 제시되었는가 (Are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Suitably Set Forth?)

그는 십계명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 도덕 명령만 포함하도록 의도되었다고 설명한다. 신은 “He wrote them on tables of stone” — 즉, 누구나 명백히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이성의 법을 돌판에 새긴 것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져야 할 가장 기초적 의무를 보여주며, 세세한 예식이나 감정의 규율은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직접 주신 법이기 때문에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른다.

제6항. 십계명은 올바른 순서로 배열되었는가 (Are the Ten Precepts of the Decalogue Set in Proper Order?)

아퀴나스는 십계명이 이성적 질서(reasonable order)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고 본다. 첫 세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신앙–경외–예배)를, 나머지는 인간이 이웃과 맺는 관계(생명–가정–재산–평판–욕망 절제)를 다룬다. “The precepts were given immediately by God; therefore they are arranged in becoming order.”

제7항. 십계명의 조항들은 올바르게 제시되었는가 (Are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Suitably Formulated?)

아퀴나스는 십계명의 조항들이 신적 지혜에 따라 가장 합리적으로 배열되었다고 본다. 긍정 명령은 선을 행하도록 이끌고, 부정 명령은 악을 금함으로써 이를 보완한다. “God made all things in measure, number, and weight” — 즉, 신의 지혜는 질서와 균형 속에서 법을 구성한다. 그는 십계명이 단순히 “긍정/부정”의 형식이 아니라, 인간의 덕과 악을 각각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이성적 구성임을 강조한다.

제8항. 십계명은 면제될 수 있는가 (Are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Dispensable?)

아퀴나스는 십계명은 면제 불가능(indispensable) 하다고 단언한다. 십계명은 “신의 의지와 정의의 본질을 직접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는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contain the very intention of the lawgiver, who is God”라 하며, 이 법들은 공공선과 정의의 보존 자체를 목적으로 하므로 결코 일시적 상황에 의해 면제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일부 절차적 조항(예: 안식일의 구체적 준수 방식)은 인간 법이나 신적 판단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제9항. 덕의 방식은 법의 명령에 포함되는가 (Does the Mode of Virtue Fall under the Precept of the Law?)

그는 덕의 방식(mode of virtue) (즉, 선행을 어떤 태도로 실천하느냐)는 법의 직접적 명령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법은 행위 자체의 의무를 규정하지만, 행위가 덕에서 비롯된 습관(habit)인지 여부는 신과 인간의 내면 판단에 달려 있다. “No man can act as a virtuous man unless he has the habit of virtue”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법은 덕을 ‘강제’할 수 없으며, 단지 선으로 향하도록 길잡는 역할을 한다.

제10항. 사랑의 방식은 신법의 명령에 포함되는가 (Does the Mode of Charity Fall under the Precept of the Divine Law?)

아퀴나스는 사랑의 행위 자체는 신법(divine law)의 본질적 명령에 포함된다고 본다. “If thou wilt enter into life, keep the commandments”라 한 예수의 말을 인용하며, 사랑(caritas)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근원적 덕목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사랑의 “모드(mode)” (즉, 행위가 사랑의 상태에서 나오는가) 는 은총(grace) 없이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며, 은총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제11항. 십계명 외에 다른 도덕법을 구분하는 것이 옳은가 (Is It Right to Distinguish Other Moral Precepts of the Law Besides the Decalogue?)

그는 십계명 외의 도덕법을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십계명은 핵심 원리이지만, 그 외에도 세부적 덕목(예: 효, 절제, 자비)을 규정하는 도덕 조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The moral precepts derive their efficacy from natural reason, even if they were never included in the Law”라 하며, 자연이성의 보편 명제가 모든 도덕법의 근거라고 본다. 즉, 십계명은 원리이고, 그 외의 도덕법은 그 원리에서 파생된 세부 규범이다.

제12항. 도덕법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가 (Did the Moral Precepts of the Old Law Justify Man?)

아퀴나스는 구약의 도덕법이 인간을 의롭게 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The letter kills, but the Spirit gives life” (2 Cor. 3:6)을 인용하며, 외적 행위의 준수만으로는 의로움이 생기지 않고, 은총(gratia)을 통해 내면의 의가 주입(infusion)될 때만 참된 정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즉, 도덕법은 인간의 정의를 표징(sign) 으로서 보여줄 뿐, 원인(cause) 이 되지는 못한다. 진정한 의는 신의 은총에 의해 성취된다.

마지막으로 아퀴나스는 구약 율법은 지도자나 통치자(왕, 재판관 등)에 대한 올바른 규정을 포함하고 있었는가? (Did the Old Law Enjoin Fitting Precepts Concerning Rulers?)를 물으면서, 일부 반론을 검토한다. 먼저 그는 구약의 법이 통치자들에 대한 적절한 규정을 두지 않았다는 비판을 소개한다. 예를 들어, 구약에는 왕의 제도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왕정이 나중에 분열과 폭정을 초래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반론에 대해, 이스라엘의 정치 질서는 신의 섭리에 따라 세워진 “가장 아름다운 질서”였다고 반박한다. 이스라엘은 통치자를 뽑는 권한을 백성에게 주었지만, 궁극적인 통치권은 하나님께 있었다. 즉, 신정정치와 귀족정, 그리고 제한된 군주정이 결합된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가 이상적이라고 본다.

이어 그는 정치적 공동체의 바람직한 질서는 두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설명한다. 첫째, 국민 모두가 일정 부분 통치에 참여해야 평화가 유지된다. 둘째, 덕과 지혜를 갖춘 이들이 지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러한 체제는 군주정(monarchy), 귀족정(aristocracy), 민주정(democracy)의 장점을 조화시킨 것으로, 모세가 통치하고 장로 72인을 임명한 제도에서 그 원형을 본다. 왕의 권위는 신의 허락에 의한 것이며, 그가 백성의 복지를 위해 절제와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아퀴나스는 강조한다. 그는 왕이 재물·권력·쾌락을 탐하면 폭군으로 타락한다고 경고하며, 왕권은 은총에 의해 주어진 신적 사명임을 상기시킨다.

Justice

아퀴나스는 정의를 인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덕으로 규정한다.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권리를 돌려주는 항구적 의지”이며, 그 본질은 타인과의 평등(equality) 관계에 있다. 따라서 정의의 대상은 ‘정당한 것(the just thing)’이며, 이는 곧 ‘권리(jus)’이다. 그는 권리를 자연권(natural right)실정권(positive right) 으로 구분한다. 자연권은 사물의 본성에 따라 스스로 조정되는 질서(예: 등가 교환, 자녀 양육 등)이고, 실정권은 인간의 합의나 법률에 의해 조정되는 질서(예: 재산 소유, 계약 등)이다. 아퀴나스에게 정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덕이며, 이성에 의해 조정된 행위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 정의관에서 중요한 점은 정의가 개인 간 관계의 조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분배적 정의는 공동체 전체의 재화를 비례적으로 나누는 것(기하학적 평등)을, 교환적 정의는 개인 간의 거래에서 양적 평등(산술적 평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정의의 기준은 개인 간의 균형, 즉 관계적 평등이며, 사회 제도나 구조 자체의 불의는 전제로 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정의는 덕 윤리적 맥락에서 이해되며, 각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게 행동하도록 이끄는 미덕이지, 제도적 불평등을 분석하는 사회구조적 이론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공동선(common good)’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도적 정의의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열어둔다. 정의로운 법과 통치는 인간의 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선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적 불의—예컨대 제도적 차별이나 체계적 억압—은 아퀴나스의 틀 안에서는 “개인의 덕의 결핍” 혹은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 통치의 부정의”로 해석될 뿐, 사회 구조 자체의 문제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정의 개념은 개인적·윤리적 차원에서는 강력하지만, 현대 사회가 직면한
비인격적이고 제도화된 불평등을 비판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는 한계가 있다.

War and Killing

아퀴나스는 전쟁과 살인을 다루며,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을 논의했다. 그는 모든 전쟁이 악하다고 보는 평화주의적 관점에 반대하면서,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의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전쟁은 반드시 정당한 권위(legitimate authority) 를 가진 통치자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개인이 사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둘째, 정의로운 원인(just cause) 이 있어야 하며, 부당한 침략이나 불의에 대한 방어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셋째, 정당한 의도(right intention) 가 필요하며, 목적은 평화의 회복과 악의 억제여야 한다. 전쟁이 개인의 복수심이나 권력욕에서 비롯된다면 정의롭지 않다.

살인에 관해서는 아퀴나스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원칙은 “무고한 자를 죽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생명이 신의 창조 질서에 속하며, 의로운 사람의 생명은 공동선의 토대이기 때문에, 의도적 살인은 근본적으로 부정의하다고 본다. 다만 그는 ‘이중 효과의 원리(double effect principle)’를 제시하여, 자기방어처럼 하나의 행위가 두 가지 결과(자신의 생존과 상대의 죽음)를 낳을 때, 의도된 목적이 정당하다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단, 방어행위는 비례적이어야 하며, 과도한 폭력은 금지된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개인 도덕의 차원을 넘어, 국가 권력의 폭력 사용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전쟁을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며, 국가의 정당한 폭력은 공동선을 지향할 때만 도덕적으로 허용된다고 본다. 즉, 아퀴나스의 전쟁론과 살인론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며, 폭력의 합법성은 궁극적으로 정의와 질서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한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Practical Wisdom and statecraft.

아퀴나스는 『왕권론(De Regno)』에서 인간을 “본성적으로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 규정하며, 정치 공동체(polity) 의 필요성을 철저히 자연적 이성의 질서 속에서 설명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성과 언어를 통해 협력하며 살아야 하므로, 사회와 통치가 필연적이다. 그는 “통치자가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흩어진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공동선을 지향하는 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간 사회의 조화는 개인의 선이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지향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치 형태에 대해서 그는 군주제(monarchy), 귀족제(aristocracy), 정체(politeia)를 정의로운 체제라 보고, 폭군정(tyranny), 과두정(oligarchy), 왜곡된 민주정(democracy)을 부정한 형태로 구분했다. 그중에서도 군주제를 가장 우월한 형태로 보았는데, 이유는 하나의 의지가 공동선을 위해 통합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권력의 타락 가능성을 인식하고, 헌법적 제도와 도덕적 덕을 통해 폭군을 방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폭군이 경미한 경우에는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인내해야 하지만, 공동체 전체가 통치자를 세웠다면, 폭정 시 합법적 저항을 통해 왕을 폐위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신학대전』에서 아퀴나스는 통치에 필요한 덕으로 신중함(prudence) 을 제시하며, 이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개인의 선을 위한 일반적 신중함, 가정의 선을 위한 가정적 신중함,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정치적 신중함(political prudence) 이 그것이다. 정치적 신중함은 단순한 행정 기술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올바른 판단력이며, 통치자뿐 아니라 피통치자에게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통치자의 신중함은 입법적이고 설계적인 반면, 신하의 신중함은 실행적이고 구체적이라고 구분한다. 요컨대, 아퀴나스의 정치철학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공동선의 원리, 그리고 신중함의 덕에 기반한 통치 윤리를 통해 정의롭고 안정된 정치 질서를 구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