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제 3세계 채무위기와 국제금융질서

Lipson, Charles. 1981. “The International Organization of Third World Debt.” International Organization 35(4):603-631.
Sep 20, 2025
제 3세계 채무위기와 국제금융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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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를 깊은 불황에 빠뜨렸고, 각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높이고 경쟁적으로 통화를 절하하는 이른바 보호무역과 환율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세계 무역을 더욱 위축시키고 국가 간 갈등을 심화시켜 2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러한 혼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안정된 국제 경제 질서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에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달러를 금(1온스=35달러)에 고정하고 다른 나라 화폐를 달러에 연동하는 달러 중심 고정환율제가 마련되었다.

IMF와 세계은행이 그 안전장치로 기능하면서 세계 무역은 안정과 성장을 누렸지만,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복지 확대 지출로 달러가 과잉 발행되자 금 보유량으로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달러 교환을 중단하는 ‘닉슨 쇼크’를 선언했다. 이로써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하고, 금은 자유롭게 거래되는 한편 달러는 여전히 국제 금융의 중심 통화로 남은 채 변동환율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제3세계 채무위기는 미국의 볼커 쇼크(1979~82)로 급격히 금리가 인상되면서 달러 가치가 치솟고, 달러 표시 부채를 떠안은 개발도상국들의 상환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데서 비롯되었다. 결국 1982년 멕시코가 디폴트를 선언하며 위기가 촉발되었고,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라틴아메리카는 성장이 정체되고 사회적 불안이 격화된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국제금융체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달러는 금이라는 뒷받침을 잃었지만, 미국의 경제력·금융시장·네트워크 효과·군사적 영향력이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대안이 없었고, 그래서 변동환율제 속에서도 국제 금융의 중심 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금에 의존하지 않는, 순전히 신뢰와 힘에 기반한 국제통화가 된 것)

1970년대 들어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국제 은행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석유와 제조업 수입 비용이 급등하면서 생긴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브라질, 한국, 대만처럼 신용도가 높았던 나라들은 이러한 대출로 경제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더 약한 국가들은 시간이 지나며 막대한 부채와 이자 부담에 짓눌리게 되었다. 실제로 1970년 12개 주요 차입국의 이자 부담은 수출액의 6%였으나, 1980년에는 14% 이상으로 뛰어올랐고, 터키와 자메이카 같은 나라들은 상환 일정을 지키지 못하기도 했다.

이 막대한 부채는 주로 규제가 느슨한 유로시장(Euromarket)에서 형성되었다. 유로시장은 달러 등 주요 통화를 본국이 아닌 해외 은행에서 예치·대출하는 시장으로, 미국이나 유럽 국내 규제를 피할 수 있어 더 높은 이자(예금자)와 더 낮은 금리(차입자)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저렴하고 빠른 돈’은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로 수요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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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시장은 1950년대 후반 냉전 시기 소련이 미국 은행 대신 런던 은행에 달러를 예치하면서 시작되었고, 미국의 지급준비율·이자율 상한 같은 규제를 피하려는 기업과 은행들이 몰리면서 1960년대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런던·룩셈부르크 등 규제가 느슨한 금융허브를 거점으로, 다국적 기업과 정부들이 빠르고 값싼 달러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기에 규모가 급팽창했으며,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석유수출국의 막대한 흑자가 유로시장에 예치되고 개발도상국의 적자가 같은 통로로 조달되면서 세계 금융의 핵심 창구로 자리 잡았다.

오일쇼크로 석유수출국(OPEC)은 엄청난 달러 흑자를 쌓았고, 반대로 석유수입국인 개발도상국은 커진 수입 부담으로 적자에 허덕였다. 이때 유로시장 은행들이 중간에서 산유국의 돈을 예금으로 받고, 이를 수입국에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자금을 순환시켰다. 이 과정을 흔히 “페트로달러 재활용”이라 부른다. 그 덕분에 개발도상국은 긴축 대신 빚을 통해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은행들은 이자 차익으로 큰 이익을 챙겼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단기 자금을 장기 대출로 바꾸는 ‘만기 불일치’, 그리고 변동금리에 따른 급격한 이자 증가라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초 멕시코 등 여러 나라가 부채 상환 위기를 맞으며, 국제통화기금(IMF)과 상업은행들이 주도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국제 금융질서의 핵심 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60~70년대 유로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개발도상국 정부나 국영기업 같은 새로운 차입자들을 상대로 대규모 장기대출을 제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은행 입장에서는 대출 금액이 크고 차입자의 신용을 평가하기도 어려워 위험이 컸다. 이에 은행들은 여러 곳이 함께 돈을 빌려주신디케이트 대출을 통해 위험을 나누었고, 차입국은 대출 계약에서 주권면책 포기(sovereign immunity waiver)를 받아들여야 했다.

또한 1969년 이후 금리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은행들은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보통 은행은 단기 예금으로 돈을 모아 중·장기 대출을 해주는데, 이때 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보다 높아지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져 손실을 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변동금리 대출이다. 이는 대출 기간 자체는 수년간 보장되지만, 이자율은 고정이 아니라 3~6개월마다 재조정되어 LIBOR(런던 은행 간 금리)에 연동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금리 변동 위험은 은행이 아닌 차입자가 부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출 방식도 다양해졌다. 한 번에 전액을 쓰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회전신용(revolving credit)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차입국이 1억 달러 신용한도를 확보하고 당장 절반만 사용한다면, 나머지 5천만 달러는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은행이 대기해야 한다. 이에 대해 은행은 커미트먼트 수수료(commitment fee)라는 예약 비용을 받는다. 즉, 유로시장의 대출은 신디케이트 구조, 변동금리, 회전신용 같은 장치를 통해 대규모 국가 대출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개발도상국이 국제 금융에 대거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제3세계 차입자들(정부, 국영기업, 정부 보증 민간기업)은 여러 은행 단계를 거쳐 다양한 저축자들과 연결되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시기에는 석유수출국(OPEC)의 막대한 흑자가 유로시장을 통해 석유수입국에 대출되는 “페트로달러 재활용(petrodollar recycling)”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다른 시기에는 선진국이 무역 흑자를 내며 유로시장에 자금을 공급했고, 이 돈이 다시 개발도상국에 흘러 들어가 자국 제품 수출을 늘리는 데 쓰였다. 이런 과정을 연구자들은 대칭적으로 “메트로달러 재활용(metrodollar recycling)”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metropolis)의 흑자가 유로시장을 통해 다른 나라로 대출되는 현상을 뜻한다. 결국 유로시장은 어느 나라가 흑자를 내든 그 돈을 적자국에 연결시키며, 흑자국과 적자국 사이의 거대한 금융 중개소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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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오일쇼크 (1973~74)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 이집트·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
    • 미국과 서유럽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아랍 산유국들이 보복으로 석유 금수조치(수출 중단), 원유 가격이 4배 폭등(배럴당 약 3달러 → 12달러)→ 전 세계가 물가 급등(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짐.

제2차 오일쇼크 (1979~80)

  •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친미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서고, 이란-이라크 전쟁까지 터짐.
    • 중동 최대 산유국이었던 이란의 석유 공급이 급감. 원유 가격이 다시 2배 이상 폭등(배럴당 약 15달러 → 39달러)→ 또다시 세계 경제에 큰 충격.

1970년대 중반 이후 비산유 개발도상국들의 유로시장 참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에는 절반 이상이 원조 형태였던 외부 자금이 1974~79년 사이에는 3분의 2 가까이가 상업은행 대출로 채워졌다. 브라질, 멕시코, 한국, 필리핀 같은 신흥공업국들은 대규모 장기 차입으로 성장을 이어갔지만,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2개 주요 비산유 개발도상국의 이자 상환액은 1973년 29억 달러에서 1980년 184억 달러로 2년마다 두 배씩 늘었고, 수출 수입의 16~20%가 이자 지급에 쓰였다. 결국 채무국들은 수출을 늘려 외화를 벌 수밖에 없었고, 이는 무역마찰을 심화시키면서 세계무역체제의 개방성을 지켜야 할 강한 이해관계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제 자본의 중개 역할은 국가가 아니라 민간 은행이 맡게 되었다. 석유수출국(OPEC)의 흑자는 유로은행들을 통해 석유수입국으로 흘러 들어가며 페트로달러 재활용이 이루어졌다. 이는 1930년대처럼 각국이 경쟁적으로 자국 문제를 남에게 떠넘기는 “이웃을 거지로 만들기(beggar-my-neighbor)” 정책을 피하게 했고, 세계적 부의 대규모 이동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이 구조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했다. OPEC 흑자가 얼마나 지속될지, 선진국이 적자를 떠안을 의지가 있을지, 은행들이 계속 대출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0년대 초에 접어들며 채무 위기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커졌고, 민간 금융의 한계는 IMF와 세계은행 같은 공적 기관 개입 압력으로 이어졌다.

국제 은행들은 경쟁적인 시장에서 활동하지만, 신디케이트 대출 구조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 협력적으로 움직인다. 여러 은행이 함께 대출을 나눠 갖기 때문에 한 나라가 부도를 내면 다 같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계속해서 정보공유가 있어야함) 이를 보완하는 장치가 크로스 디폴트 조항(cross-default clause)인데, 한 건의 부도가 다른 대출에도 자동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한다. 이 강력한 제재 가능성 때문에 차입국은 쉽게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지 못하고, 은행들은 보통 채권자 회의를 통해 조건을 조정하면서 집단적으로 대응해왔다.

물론 은행들 사이에는 이해관계 차이가 있다. 대규모로 빌려준 은행은 시간을 벌어 이자만 받아도 손해가 적기 때문에 재조정을 선호하는 반면, 작은 은행들은 빠른 부도 선언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디케이트 계약의 투표 규칙, 주간사 은행(큰 손해가 나는 아이는 금리를 높여줌, K그룹의 행위자, 정보공유를 필수적으로 해야함)의 조정, 그리고 은행 간 얽힌 금융관계가 이런 차이를 억제한다. 결과적으로 상환 능력이 있는 국가가 부채를 거부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실제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갚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는 민간 은행들이 사실상 국제적 제재 체제를 구축해, 세계 금융 질서를 지탱해온 중요한 메커니즘이었다.

1970~80년대 제3세계 부채 위기에서 상업은행들은 유로시장 대출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공급했지만, 차입국이 갚지 못하면 은행들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은행들은 협조적으로 부채를 재조정하거나 신규 자금을 넣어 위기를 관리했지만, 그 나라 경제 구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IMF가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IMF는 직접 돈을 빌려주되, 반드시 조건부 대출(conditional lending)로 진행했다. 즉, 재정·통화 긴축, 보조금 축소, 신용 억제, 환율 절하 등 ‘안정화 프로그램’을 요구하며 차입국의 경제 개혁을 강제했다. 동시에 IMF의 개입은 “이 나라가 긴축과 개혁을 시작했다”는 신호를 주어 은행과 정부 채권자들이 안심하고 부채를 재조정하거나 추가 대출을 제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채무국가의 데이터를 공개하는 역할, 처벌의 기능도 있음. 중요)

  • 제도주의 관점에 따르면, 국제기구는 제도의 감시자 역할을 맡음. “정보공유” → 협력
  • IMF는 구조조정은 유권자의 피해, 유권자는 지도자를 처벌하는 국내정치적 처벌 메커니즘

이 과정에서 채권자들은 비공식 클럽 체제를 발전시켰다. 정부 간 채권은 파리클럽, 민간 은행은 런던·뉴욕클럽을 통해 조정되었으며, 모든 채권자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원칙 아래 협상이 진행되었다. 정부 대출은 주로 상환 연기(rescheduling), 은행 대출은 재융자(refinancing) 방식이 많았고, 특히 은행들은 계약 성실성을 강조하며 원금 탕감 대신 이자 상환을 끝까지 요구했다. 이런 IMF의 조건부 개입과 채권자 클럽의 협조적 틀 덕분에, 부채 위기는 대체로 관리 가능했으며 차입국이 채무 불이행(default)을 사실상 선택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국제금융의 규율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1976년 페루는 IMF 조건부 대출을 피하려 미국 은행들에서 직접 차입했지만, 은행들이 경제 감시까지 떠안으면서 정치적으로 곤란에 빠졌다. 이 경험은 “조건부 긴축(conditionality)을 강제할 수 있는 기관은 IMF뿐”이라는 교훈을 남겼고, 이후 은행들은 IMF 개입을 전제로만 재협상에 나섰다. IMF는 회원국 분담금(쿼터)을 늘리고 새로운 기금을 도입해 자금을 확충했고,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OPEC 국가의 대규모 출자를 받아 영향력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는 IMF 집행이사회에서 사실상 영구 의석을 확보하며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이렇게 IMF는 단순한 대출 기관을 넘어 국제금융의 보증인이자 위기 조정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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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1973~74) 때문에 수입 에너지 비용이 급등
  • 페루는 구리 같은 1차 상품 수출에 의존했는데, 국제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면서 외화 수입이 줄어듦. 결과는 무역적자 + 외채 급증 → 외환 부족.
  • 내부 정치·경제 문제
    • 당시 페루는 군사정권(후안 벨라스코 →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문데) 하에서 국유화·개발 중심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음. 대규모 공공 지출, 비효율적 국영기업 운영, 부패가 겹쳐 재정적자 확대.
    • 국민 반발 때문에 세금 인상이나 보조금 삭감 같은 긴축정책은 정치적으로 위험했음.

세계은행도 전통적인 개발 프로젝트 대출을 넘어 구조조정 지원과 민간 은행과의 공동 융자(co-financing)에 나섰다. 이는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면서도 세계은행의 공신력을 등에 업어 위험을 줄이는 장치였다. 다만 세계은행은 자동적 교차불이행(clause) 즉, 한 나라가 민간 은행 대출을 갚지 못했을 때 세계은행 대출도 자동으로 연체 처리되도록 하는 조항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는 세계은행의 공공적 자금까지 민간 채권자 보호 장치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은행은 민간과 협력하되, 공적 금융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려 했으며, 이로써 IMF·세계은행·민간 은행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3세계 부채 위기를 관리하는 체제가 굳어졌다.

결론

제3세계 부채 체제는 민간은행과 IMF,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가 얽혀 있는 복합 구조였다. 국가들은 경상수지 적자와 석유 수입 부담 때문에 유로시장 자금에 크게 의존했는데, 은행만으로는 채무국 경제를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IMF의 조건부 대출과 감시가 핵심 역할을 했다. IMF 협약은 채무국의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였고, 이는 은행들이 추가 대출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점에서 IMF는 단순한 자금 공급자라기보다 채무 관리의 제도적 리더 역할을 했다.

부채 위기에서는 채권자 클럽과 은행 컨소시엄 같은 협력 구조가 작동했다. 이들은 모두 채권자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규칙을 따르며, 경우에 따라 공식부채(정부 대 정부)와 민간부채(상업은행 대출)를 연계해 재조정했다. 또 은행들은 교차불이행 조항을 넣어 한 건의 불이행이 다른 대출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 그러나 세계은행은 민간 채권자를 과도하게 보호하지 않기 위해 자동적 교차불이행 조항은 거부했고, 대신 공동융자 프로그램을 통해 리스크를 분산시켰다. 아울러 국제결제은행은 1975년 바젤 협약을 마련해 국제은행 부도 시 긴급 유동성을 공급하는 안전망을 만들고 공통 회계·자산평가 기준을 권고했다.

이 체제의 특수성은 국제정치이론 관점에서도 주목할만 하다. Gilpin은 초국적 행위자가 어떻게 준독립적 역할을 하게 되는가를 물었는데, 실제로 유로은행과 IMF는 국가 권력을 넘어서는 독자적 규칙과 절차를 형성했다. Oran Young의 주장(“레짐의 주체는 항상 주권국가”)과 달리, 여기서는 은행과 IMF가 사실상 국제 부채 레짐의 규칙을 만들고 감독하는 주체였다. 이 구조는 내재적 제재, 즉 무역·금융 차단이라는 실질적 불이익을 통해 채무국의 불이행을 막았다. 그러나 이 체제는 개별 위기에는 효과적이지만, 여러 나라가 동시에 위기에 빠질 경우 대응력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