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인권 조약의 비상시 권리 유보(derogation) 조항 분석

Hafner‑Burton, Emilie M., Laurence R. Helfer, & Christopher J. Fariss. “Emergency and Escape: Explaining Derogations from Human Rights Treaties.” International Organization 65(4), 2011.
Sep 18, 2025
인권 조약의 비상시 권리 유보(derogation) 조항 분석

이 글은 인권 조약의 비상시 권리 유보(derogation) 조항을 분석한다. 전쟁·내전·경제 위기 등 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인권을 제한하려는 압력에 직면하는데, 조약 초안 작성자들은 이를 막기 위해 특정 권리를 일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합법적 탈출구를 마련하면서도, 이를 국제법의 절차·통제 속에 두었다. 저자들은 1976~2007년의 데이터로 국가들이 언제, 왜 유보를 사용하는지 분석하며, 유보는 국내 정치적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합리적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강한 사법부를 가진 국가는 유보를 통해 권리 제한을 임시적·합법적으로 포장하고, 국내 청중(유권자·사법부·인권단체 등)에 신호를 보낸다. 반대로 권위주의 국가는 감시가 약해 국제규범을 아예 무시하거나 ‘영구적 비상상태’로 유보를 남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연구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안정적 민주주의와 강한 사법부가 있을수록 유보를 공식적으로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권위주의 국가는 공식 유보 없이도 인권을 침해하거나, 유보 시 정보 공개 없이 장기간 유지한다. 셋째, 한 번 유보를 선언한 국가는 반복적으로 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권 조약 초안자들의 기대와 달리, 국제적 감시보다는 국내 정치적 책임성이 유보의 사용과 준수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연구는 국제 인권법의 효과성을 설명할 때, 국가 간 보복이나 평판보다는 국내 정치 제도와 이해관계자의 역할이 핵심임을 강조한다.

유보 제도의 필요성은 전쟁·내전·테러·경제위기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인권을 제한하려는 압력을 합법적으로 조율하기 위해서다. 국제인권규약(ICCPR)과 유럽·미주 인권협약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특정 권리는 제한 가능하되(예: 집회·언론 자유), 생명권·고문금지·차별금지 같은 핵심 권리(nonderogable rights) 는 절대 제한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동시에 유보를 선언할 경우, UN 사무총장에 통보하고, 어떤 권리를 얼마나 제한하는지 명확히 밝히도록 하여 국제적 감시와 검증 절차를 마련했다.

둘째, 이 제도의 양면성은 분명하다. 긍정적으로는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조약 자체를 아예 파기하거나 몰래 위반하는 대신, 공개적으로 일시적 제한을 선언하게 하여 더 많은 국가가 조약에 가입하고, 심화된 의무를 수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반대로 부정적으로는, 위기 시기에야말로 인권 보호가 가장 중요한데, 이 시점에 공식적으로 권리 제한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남용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콜롬비아·이스라엘·터키·영국 등 민주주의 국가들도 반복적으로 유보를 사용했고, 권위주의 국가는 ‘영구 비상사태’를 빌미로 제도를 악용하기도 했다.

셋째, 저자들의 이론은 유보를 국가의 “합리적 전략”으로 본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유권자·법원·시민단체로부터 비판받지 않으면서 긴급조치를 시행할 시간과 정치적 여유(breathing space) 가 필요하다. 유보 선언은 “이 조치는 합법적이고, 일시적이며, 위기가 끝나면 원상복귀한다”는 신호를 주어 단기적으로 비판을 누그러뜨린다. 따라서 안정된 민주주의와 강한 사법부가 있는 국가일수록 오히려 공식적으로 유보를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권위주의 국가는 어차피 책임질 필요가 적기 때문에 아예 유보를 사용하지 않거나, 형식만 갖춘 ‘영구 유보’를 남발하는 경우가 많다.

넷째, 정보 제공과 반복 사용 여부가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민주주의 국가는 어느 권리를, 얼마나 제한할지 명확히 밝히고 일정 기간 후 해제하려 하지만, 권위주의 국가는 정보 없이 무기한 유보를 유지한다. 따라서 “유보를 몇 번 했는가”보다 “그 유보가 국내 정치에서 어떻게 쓰였는가”가 핵심이다.

이 글은 국가들이 왜 인권조약에서 권리 유보(derogation)를 하는지에 대해 네 가지 이론을 제시했다. 첫째, 국제인권체제와의 얽힘 정도가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국제 체제를 존중한다면 위기 상황에서 합법적이고 투명하게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유보를 활용했을 것이고, 반대로 체제를 훼손한다고 본다면 유보를 피했을 것이다. 둘째, 민주화·과도기 국가의 자기구속 이론이다. 이들 국가는 권리 제한이 임시적임을 알리고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보를 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민주적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예 유보를 피했을 수도 있다.

셋째, 불성실한 행위 이론은 유보가 단지 형식적인 행위였다고 본다. 인권조약의 감시와 집행이 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권위주의적 국가들이 조약에 가입은 하되 실제로는 인권을 억압하면서 유보를 남발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구체적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고, 유보가 장기간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넷째, 국제적 신호 이론은 원조나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들이 미국이나 EU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유보를 했다고 본다. 이런 경우에는 유보 사유와 기간을 명확히 밝혀 합법성을 강조했을 것이고, 반복적 유보를 자제했을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1977년부터 2007년까지 주요 인권조약(ICCPR, 유럽인권협약, 미주인권협약)에 제출된 유보를 모두 모아 약 600건을 분석했다. 분석 단위는 “비상사태가 발생해 유보가 가능한 한 해”였는데, 이런 경우가 총 1,193건이었다. 쉽게 말해, 30년 동안 조약 가입국의 연도별 상황을 다 살펴보았는데, 비상사태가 발생한 해에는 약 3분의 1 정도(1,193/3,555)만 실제로 유보를 신청했다. 연구진은 어떤 국가가 유보를 하는지, 정보를 얼마나 공개하는지, 얼마나 오래 유지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로지스틱 회귀와 생존분석 같은 통계기법을 사용했다.

  • 연구진은 1977년부터 2007년까지 주요 인권조약(ICCPR, 유럽인권협약, 미주인권협약)에 제출된 유보를 모두 모아 약 600건을 분석했다. 분석 단위는 “비상사태가 발생해 유보가 가능한 한 해”였는데, 전체 조사 대상이었던 약 3,555개의 국가-연도 중 1,193건에서 실제로 비상사태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실제로 유보를 신청한 국가는 일부에 불과했다. 즉, 위기가 생겼다고 해서 무조건 유보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유보를 한 번 제출했지만, 이 유보가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 즉, 하나의 긴 ‘장기 유보’ 사례였다. 반대로 페루는 단기 유보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어떤 해에는 위기 상황이 끝나면 유보를 철회했다가, 몇 년 뒤 또다시 유보를 제출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국가별로 “유보의 패턴”이 달랐다는 점이 중요한 발견이었다.
  • 연구진은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나라가 유보를 할 가능성이 높은지”, “유보를 하더라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지”, “유보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모델링한 것이다. 그 결과, 민주화 중인 나라, 국제체제에 깊이 얽힌 나라, 원조나 무역에 의존하는 나라일수록 ‘투명하게, 제한적으로’ 유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억압적인 정권일수록 ‘형식적으로, 장기간’ 유보하는 패턴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 글은 비상사태에서 국가들이 인권조약에서 권리 유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연구진은 안정된 민주주의와 강한 사법부를 가진 국가들이 유보를 통해 시간을 벌고, 국내 유권자와 이해관계자, 법원의 비난을 줄이려 한다는 핵심 가설을 뒷받침하는 통계와 사례를 제시했다. 반대로 기존 국제정치학에서 제기된 네 가지 대안 가설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분석 결과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첫째, 비상사태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민주주의 국가는 권리 제한을 무제한적으로 남용하지 않고, 공개와 설명을 병행하며 장기적 조약 준수 의지를 유지하려 했다. 둘째, 유보는 국제적 보복이나 평판 문제보다는 국내 정치·제도적 이유 때문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향후 연구는 조약 설계, 정보 공개, 국내 제도와의 관계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결과는 제도 설계와 정책에도 시사점을 주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유보 제도가 예상보다 덜 위험했지만, 권위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비용 없이 유보를 남용해 인권 침해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유보 조항 같은 조약의 유연성 장치 자체를 재설계해, 국제법 준수를 강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
저자들은 유보를 설명하면서 국제적 평판·보복보다 국내 정치와 제도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Keck & Sikkink가 말한 이중 청중(double audience) 개념에 따르면, 인권 조약과 유보는 언제나 두 층위의 청중—국내 청중(시민, 정당, 사법부, 언론 등)과 국제 청중(타국 정부, 국제기구, NGO, 원조 공여자 등)—을 동시에 겨냥한다. 따라서 유보는 국내적 논리와 국제적 압력이 서로 분리된 독립변수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한 민주주의 정부가 유보를 통해 국내 유권자에게는 “합법적이고 임시적인 조치”라고 신호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국제 사회에는 “조약 틀을 지키며 권리를 제한했다”는 정당성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보를 국내 vs. 국제라는 이분법적 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아가, 민주주의 국가의 유보를 “합법적 시간벌기”로 해석하는 저자들의 시각은 동일한 권리 제한을 두고도 민주주의 맥락에서는 정당화하고 권위주의 맥락에서는 억압으로 치부하는 규범적 편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토론은 “유보가 과연 민주주의적 제도와 법치의 산물인지, 아니면 국내·국제 청중을 동시에 관리하려는 정치적 전략의 산물인지”라는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다.

Can derogations really be explained solely as domestic political acts, given the double audience dynamic where states signal to both domestic and international publics? And does the authors’ interpretation of democratic derogations as ‘time-buying’ reflect a normative bias that excuses similar rights restrictions when carried out by democrac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