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의 접점 - Legalization 논의

Abbott, Kenneth W., Robert O. Keohane, Andrew Moravcsik, Anne‑Marie Slaughter, & Duncan Snidal. “The Concept of Legalization.” International Organization 54(3), 2000.
Sep 10, 2025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의 접점 - Legalization 논의

*이 글에서는 Legalization을 법적 제도화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한다.

1. Legalization의 개념

Legalization은 국제 제도나 규범이 법처럼 작동하는 정도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단순히 “국제법은 진짜 법인가?”라는 흑백 논쟁을 넘어서, 제도가 법적 성격을 얼마나, 어떻게 띠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들은 이를 세 가지 요소로 나눈다. 첫째, 의무(Obligation)는 규칙이 법적 구속력을 갖고 당사국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를 뜻한다. 둘째, 명확성(Precision)은 규칙이 구체적이고 모호하지 않아 해석 여지가 적은지를 말한다. 셋째, 위임(Delegation)은 제3자(법원, 중재자, 국제기구 등)에게 규칙의 해석과 집행 권한이 맡겨져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 세 요소는 서로 독립적이며, 각각의 강도에 따라 제도가 달라진다. 즉 국제 제도는 법적 성격을 더 많이 혹은 덜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continuum) 위에 존재한다.

따라서 Legalization은 국제 규범을 단순히 “법이다/아니다”로 구분하지 않고, 어느 정도로 법적 제도화되었는가를 분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2. Obligation (의무)

Obligation은 국제 규범이 당사국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강압, 관습, 도덕적 압박과 구별되는 법적 성격이다. 국제법의 기본 원칙인 pacta sunt servanda(조약은 지켜져야 한다)에 따라, 일단 법적 형식으로 성립한 합의는 국내법과 충돌하더라도 선의로 이행해야 한다.

의무 위반은 자동적으로 법적 책임(legal responsibility)을 발생시키며, 여기에는 원상회복, 금전적 배상, 사과(satisfaction) 등이 포함된다. 다만 현실적으로 구제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 국제법은 제한적으로 자력구제(self-help) 를 허용한다.

자력구제의 대표적 방식
  • 보복조치(reprisals, reciprocity): 예컨대 WTO에서 어떤 나라가 불법적으로 수입을 막으면, 상대국도 합법적으로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음.
  • 외교적 제재(retorsion): 외교 관계를 축소하거나 원조를 중단하는 등 불이익을 주는 것.
  • 다만 이런 자력구제도 비례성(principle of proportionality) 등 일정한 제한이 있음. 즉, 상대방의 위반 규모에 비해 과도하게 대응할 수는 없음.

의무의 강약은 다양한 사례로 드러난다.

  • 강한 의무(hard obligation): 비엔나 외교관계협약(1961) 제24조는 “공관의 문서와 기록은 언제 어디서나 불가침이다”라고 규정하며, 무조건적·절대적 의무를 명시한다.
  • 약한 의무(weak obligation): 헬싱키 최종의정서(1975)는 아예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음을 명시하며, UN에 등록조차 불가하다. 1992년의 “산림원칙(Forest Principles)” 또한 이름에 “Non-Legally Binding”을 붙여 법적 의무를 부정한다.

또한 조약에는 종종 조건부 의무(contingent obligation)나 탈출조항(escape clause)이 포함된다. 기후변화협약(1994)은 감축 의무를 “각국의 개발 우선순위와 상황을 고려하여” 이행하도록 규정했고, 대부분의 무기통제 협정에는 “국가의 최고 이익을 해치는 특별한 상황 발생 시 탈퇴할 권리”를 명시한다. 이러한 장치는 법적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3. Precision (명확성)

Precision은 규칙이 구체적이고 모호하지 않게 기대되는 행위를 정의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명확성이 높을수록 해석의 여지가 줄어들고, 집행 가능성이 강화된다. 프랭크(Franck)는 명확성이 규칙의 정당성과 준수 유인을 높인다고 설명하며, 풀러(Fuller)는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법의 핵심 가치로 본다.

국내법에서는 규칙(rule)과 기준(standard)이 혼재한다. 예컨대 “시속 50km 이상 주행 금지”는 규칙적 처방이고, “난폭 운전 금지”는 기준적 처방이다. 규칙은 명확성을, 기준은 유연성을 제공하며, 후자는 사법부와 행정기관이 보완한다. 국제법에서는 중앙집중적 제도와 재판소가 약하기 때문에, 규칙의 명확성이 곧 법적 구속력의 핵심 지표가 된다.

사례를 보면,

  • 높은 명확성(high precision): WTO 협정, 몬트리올 의정서(1987, 오존층 파괴 물질), 교토 의정서(1997, 기후변화) 등은 규제를 세세하게 명시한다. 비엔나 조약법 협약과 UN해양법협약도 조문을 촘촘히 구성하여 해석 여지를 줄인다. 심지어 리우 선언(1992)이나 Agenda 21 같은 비구속적 문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작성되어 정치적·규범적 효과를 강화한다.
  • 낮은 명확성(low precision): NAFTA 노동 부속협정은 단순히 “높은 노동기준을 보장한다”고만 규정하고, NPT 제6조는 “핵 군축을 위한 협상을 선의로 추구한다”고만 적시한다. 투자협정들도 “우호적인 환경 조성”, “불합리한 규제 금지” 같은 모호한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러나 모호성이 반드시 규범을 무력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제기구에 해석 권한이 위임(Delegation)되면, 모호성은 해당 기구의 권한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 미국은 1998년 로마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논의에서 범죄 정의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려 했는데, 이는 법원의 자의적 해석을 차단하기 위한 시도였다.

4. Delegation (위임)

Delegation은 규칙을 해석·적용·집행할 권한을 제3자(법원, 중재자, 국제기구)에 부여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분쟁 해결의 경우, 위임의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다:

  • 전혀 없음(no delegation) → 전통적 정치 협상
  • 중재·조정(mediation/conciliation) → WTO 협상 지원, UN해양법협약의 조정 옵션
  • 비구속적 중재(nonbinding arbitration) → 구 GATT 체제
  • 구속적 중재(binding arbitration) → 미-이란 청구재판소
  • 정식 재판(adjudication) → 유럽사법재판소(ECJ), 유럽인권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 등

최근에는 개인과 민간단체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분쟁 절차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개인 제소권을 보장하며, 세계은행은 Inspection Panel을 통해 민간의 불만을 접수한다. 이는 국제 제도의 권위를 확대시키는 요인이다.

위임은 분쟁 해결을 넘어 규범 형성과 집행에도 작동한다. EU 집행위원회는 규정을 작성하고, ICAO나 Codex Alimentarius는 기술적 규칙을 제정한다. WHO, 세계은행, UNEP 등은 교육·정보 제공·정책 권고를 통해 규범을 실질적으로 구현한다. 세계은행의 경우, 환경영향평가 지침은 대출 계약에 포함될 때 법적 구속력을 가진다.

예시

CAO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 국제민간항공기구. 비행 안전, 항로 관리, 기술 기준 등을 정하는 UN 산하 기구.
  • 항공기 운항 기준이나 안전 규칙 같은 기술적 규범을 제정해서 회원국들이 따르게 함.
  • 대부분 권고적(recommendation) 성격이지만, 실제 항공 안전 규범에서는 사실상 국제표준처럼 작동.

Codex Alimentarius Commission (국제식품규격위원회)

  • FAO(식량농업기구)와 WHO가 공동 운영하는 위원회.
  • 식품 안전과 품질에 관한 국제 기준(예: 농약 잔류 허용치, 식품 첨가물 규격 등)을 마련.
  • 역시 권고이지만, WTO 분쟁에서 “과학적 근거”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사실상 강한 영향력을 가짐.

또한 위임은 국제기구에 일정한 집행 능력(enforcement power) 을 부여한다. UN 안보리는 이라크에 무기 사찰과 배상 프로그램을 부과했고, 국제금융기구는 대출을 중단하거나 기술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제재를 가한다. WTO는 회원국 간 제재를 정당화하고 조율한다.

그러나 위임이 강화될수록 새로운 행위자(국제기구, NGO 등)가 국제 정치의 주체로 부상하고, 이는 회원국의 이해와 충돌하기도 한다. 따라서 Delegation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과정이다.

5. Conclusion (결론)

Legalization은 국제 규범과 제도를 의무(Obligation), 명확성(Precision), 위임(Delegation)의 정도에 따라 스펙트럼으로 파악한다. 강한 법(hard law)에서 약한 법(soft law)까지 다양한 조합이 존재하며, 정치적 타협 속에서 의도적으로 약하게 설계된 경우도 많다.

차원 (Dimension)정의강한 사례 (High)약한 사례 (Low)
Obligation (의무)규칙이 당사국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정도비엔나 외교관계협약(1961), WTO 협정헬싱키 최종의정서(1975), OECD 지침
Precision (명확성)규칙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모호하지 않은가WTO 무역협정, 몬트리올·교토 의정서NAFTA 노동 부속협정, NPT 제6조
Delegation (위임)규칙 해석·적용 권한을 제3자에게 위임하는 정도ECJ, 유럽인권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전통적 외교 협상, 권고적 기구

법과 정치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국제법은 언제나 정치적 고려와 맞물려 작동한다. 순수한 정치적 협상도 사실상 주권 원칙 등 기본 규범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국제재판도 정치의 그림자 속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제 제도는 법과 정치가 복합적으로 얽힌 혼합 형태로 존재한다.

결국 Legalization은 국제법이 단순히 “강제력의 부재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시각을 넘어서, 국제 규범의 다양한 제도화를 설명하는 분석틀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법은 정치적 상호작용의 연장이며, 그 수단 중 하나이다.

이 논문이 나온 학술적 배경을 살펴보자.

  • Abbott, Keohane, Moravcsik, Slaughter, Snidal이 제시한 The Concept of Legalization은 1990년대 국제정치학과 국제법학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개념적 전환의 산물이다. 전통적으로 국제정치학, 특히 현실주의는 국제법을 경시해왔다. 강제적 주권자가 부재한 국제사회에서는 법이 사실상 정치의 수사학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국제법학자들은 법의 규범적 힘을 강조했으나, 이를 경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틀은 부족했다.
  • 이 상황은 1980년대 이후 제도주의(Neoliberal Institutionalism)의 부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Keohane의 After Hegemony는 국제제도가 협력 촉진에 실질적 역할을 한다는 논리를 제시했고, 냉전 종식 이후 WTO 출범, 국제형사재판소 논의, 환경·인권 레짐의 확대는 국제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법을 정치와 별개의 “법”으로 다루거나, 반대로 실질적 효용이 없는 “정치적 합의”로 치부하는 이분법적 접근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 이 논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국제법적 제도를 흑백 논리가 아닌 연속체(continuum) 위에서 파악할 수 있는 분석틀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국제정치학자들은 국제법을 변수로 연구할 수 있는 도구를 얻었고, 국제법학자들은 법적 제도를 제도주의적·경험적 틀 속에서 새롭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 국제정치학자들은 Legalization을 설명 변수(IV)로 두고, 협정 유형에 따라 결과 변수(DV)(예: 준수율, 제도 지속성, 협력 강도 등)가 달라지는지를 검증할 수 있음.
    • 국제법학자들은 국제정치학의 경험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Soft law라도 왜 효과적인가?” “Delegation이 강하면 왜 준수율이 높아지는가?” 등을 설명할 수 있음.
    • 즉, 이 개념 덕분에 두 분야가 공통의 언어를 가지게 되었고, 국제법을 더 이상 IR의 ‘주변부’가 아니라 분석 가능한 중심 변수로 다룰 수 있게 된 것.

비판점에 대해서도 짚어보자.

역시나 반증가능성 문제

해당 논문은 “법적 성격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 연속체로 측정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측정의 애매함이 여전히 남는다. 예를 들어, 의무(Obligation)가 강한지 약한지는 조약 문구만으로 파악할 수 없고, 국가들의 정치적 해석·실천에 따라 달라진다. 2025년 관점에서 보면, 이는 실증적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이 약하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즉, Legalization 개념은 “분석적으로 유용하다”는 이름으로 과학주의적 언어를 빌려왔지만, 정작 경험적으로는 애매한 회색 지대를 과도하게 단순화했다.

비서구 맥락의 부재

Abbott 외 연구진이 만든 Legalization 틀은 대부분 서구적 제도 경험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비서구 지역 제도는 다르게 작동한다.

  • ASEAN(아세안): “합의(consensus)와 불간섭(non-interference)” 원칙을 중시 → 모호한 선언문과 신뢰 구축이 중심, 강한 의무·위임은 기피됨. 그러나 실제로는 아세안 방식이 역내 평화와 협력을 유지하는 실질적 기능을 한다.
  • 아프리카연합(AU): 주권 불간섭 대신 “non-indifference” 원칙을 내세워, 인권침해·쿠데타 시 개입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는 전통적 O–P–D 축으로는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애매하다.
  • 중국의 BRI(일대일로)나 상하이협력기구(SCO): 경제·안보 협력에서 법적 구속력보다 정치적 신뢰와 점진적 합의에 의존.

즉, 비서구 맥락에서는 O–P–D 축으로 법적 성격을 측정하기 어렵고, 정치적 합의·사회적 신뢰 같은 요인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Legalization은 비서구적 제도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법–정치 경계의 불충분한 해체

논문은 “법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이를 “양적 차이”로만 다뤘다. 즉, 어떤 제도는 의무·명확성·위임이 높으니 “더 법적”, 낮으니 “덜 법적”이라고 서술한다.

하지만 2020년대 이후의 학계에서는, 법과 정치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경계(constructed boundary)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강하다. 다시 말해, 문제는 단순히 “얼마나 법적이냐”가 아니라, 누가 그 규칙을 법이라고 부르며, 어떤 맥락에서 법적 정당성을 만들어내는가이다.

  • 예: 기후변화 협정에서 어떤 국가는 파리협정을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강조하지만, 다른 국가는 이를 “법적 책임”으로 간주한다.
  • 같은 문서를 두고도 행위자들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그 정치적 담론 자체가 법적 성격을 구성한다.

따라서 Legalization은 법–정치를 “혼합”이라고 보면서도, 여전히 법적 성격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전제를 유지한다. 그러나 2025년 학자의 시선에서는, 그 경계 자체가 권력·담론·정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더 강조해야 한다. 즉, Legalization은 질적·구성적 전환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절반짜리 시도라는 비판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