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hen D. Krasner(2004)는 전통적 주권 개념이 더 이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전통적 주권은 국가 간 상호 인정과 내정불간섭을 핵심 원칙으로 하지만, 실패국가와 취약국가의 증가는 이 원칙의 한계를 드러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 짐바브웨의 경제 파탄, 르완다의 집단학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점령 이후 혼란은 모두 기존 제도가 대응하기 어려운 사례들이다. 국제사회가 주로 사용해 온 정책 수단인 거버넌스 지원이나 과도 행정은 단기간 내에 해당 국가가 정상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가정에 의존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생적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실패국가의 문제는 단순히 해당 국가 내부에 국한되지 않고, 테러·범죄 네트워크와 난민, 인도적 위기를 통해 국제 안보와 안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에 따라 Krasner의 글은 전통적 주권 규칙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는 국제사회의 대응이 기존의 제한적 도구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공유 주권(shared sovereignty) 과 사실상의 신탁통치(trusteeship) 같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도는 전통적 주권의 원칙을 형식적으로는 위반할 수 있으나, 실패국가와 점령국가의 장기적 안정을 도모하고, 국제적 안보 위협을 줄이며, 해당 사회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전과 기본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제시된다.
대안적 제도 형태 (Alternative Institutional Arrangements)
제도 형태 | 국제법적 주권 (International Legal Sovereignty) | 베스트팔렌/바텔리안 주권 (Westphalian/Vatellian Sovereignty) | 주권 침해 정도 (Violation of Sovereignty) | 지속 기간 (Duration of Rule) |
전통적 주권 (Conventional sovereignty) | 인정 (Yes) | 인정 (Yes) | 없음 (None) | 해당 없음 (n/a) |
식민지 (Colony) | 부정 (No) | 침해 (Yes) | 완전 침해 (Full) | 장기 (Long) |
과도 행정 (Transitional administration, 외부의 완전한 행정 권한) | 인정 (Yes) | 침해 (Yes) | 완전 침해 (Full) | 단기/중기 (Short/Medium) |
신탁통치 (Trusteeship) | 일부 인정 or 부정 (Yes or No) | 침해 (Yes) | 완전 침해 (Full) | 중기/장기 (Medium/Long) |
공유 주권 (Shared sovereignty) | 인정 (Yes) | 부분 침해 (Some) | 부분 침해 (Some) | 중기/장기 (Medium/Long) |
19세기형 보호국 (Protectorate) | 인정 (Yes) | 부분 침해 (Some) | 부분 침해 (Some) | 중기/장기 (Medium/Long) |
전통적 주권(conventional sovereignty)은 국제법적 주권(international legal sovereignty), 베스트팔렌/바텔리안 주권(Westphalian/Vatellian sovereignty), 국내 주권(domestic sovereignty)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국제법적 주권은 독립된 영토 실체를 인정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하며, 베스트팔렌/바텔리안 주권은 외부의 내정 불간섭을 핵심으로 한다. 국내 주권은 규범이라기보다는 국가 내부의 권위 구조와 행정 능력을 묘사하는 개념으로, 이상적으로는 평화, 인권 보호, 법치가 보장되는 체제를 지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많은 국가들이 국제법적·베스트팔렌적 주권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내 주권이 무너져 효과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도 주권에는 다양한 대안적 형태가 존재했다. 19세기 쿠웨이트의 영국 보호국(protectorate), 중국의 조계지(treaty ports), 영국 도미니언(dominions), 식민지 지배 등은 모두 전통적 주권 이외의 제도적 선택지였다. 오늘날에도 실패·취약·점령국의 경우 전통적 주권 원칙만 고수하면 오히려 통치 구조가 더 약화되고 지도자들이 권력과 부를 위해 사회 혼란을 방치하거나 악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Krasner는 공유 주권(shared sovereignty) 과 사실상의 신탁통치(trusteeship) 같은 새로운 제도를 통해 일정 기간 외부 행위자가 국내 권위 구조를 함께 관리하거나 대신 담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전통적 주권의 원칙을 훼손하지만, 실패국가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 안보와 국내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전통적 주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항상 안정적인 국내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가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권위 구조는 국민의 경제적 복지와 인권, 안전을 심각하게 훼손했으며, 때로는 국가 권위가 완전히 붕괴하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시에라리온은 대표적인 예로, 내전과 외부 개입 속에서 수십 년간 혼란을 겪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외부 침공으로 기존 권위 구조가 무너졌고, 점령 세력은 새로운 통치 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전통적 주권을 존중하는 것으로는 실패국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국가 실패는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다. 1955년에서 1998년 사이 인구 50만 이상 국가에서 136건의 국가 실패가 기록되었으며, 1990년대 초에는 전체 국가의 30% 가까이가 실패 상태에 있었다. 주요 원인으로는 부분적 민주주의, 교역 차단, 높은 영아 사망률이 지적되었고, 빈곤·탈식민화·산악지형 등은 게릴라 활동을 용이하게 하여 내전 가능성을 높였다. 실패국가에서는 행정 능력 부재로 인해 범죄와 부패가 만연하고, 국경과 화폐 질서가 무너진다. 시에라리온은 1990년대 내전으로 수만 명이 희생되고 국가 수입이 10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정치 지도자들은 의도적으로 혼란을 조장해 사익을 추구했다. 이처럼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국내 주권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으며, 세계 경제가 성장하던 1990년대에도 최빈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오히려 감소했다. (탈냉전기 급격한 원조의 감소가 국가실패로 이어짐. 주권 안에는 정당성의 요소도 있음을)
- 일반적 정의: 국가가 영토 내 권력 독점, 법 질서 유지, 치안과 안보 보장, 기본적 공공서비스 제공 같은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
- 정치학적 정의: Jack Goldstone, Ted Gurr, Barbara Harff 등이 참여한 State Failure Task Force는 국가실패를 네 가지 유형으로 operationalize 했음
- 혁명전쟁 (Revolutionary war)
- 민족분쟁/내전 (Ethnic war)
- 체제 붕괴·퇴행적 정권교체 (Adverse regime change)
- 집단학살 (Genocide)
주권 실패는 강대국에게도 직접적 위협을 준다. 국내 권위가 무너진 국가는 테러와 범죄 네트워크의 활동 무대가 되며,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통해 적은 자원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가할 수 있다. 실제로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은 알카에다를 지원하여 미국 본토 공격을 가능하게 했고,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 의혹으로 인해 침공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약소국은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강대국의 핵심 안보 이익을 위협할 수 있고, 이는 결국 군사 개입과 점령으로 이어져 새로운 통치 구조를 수립해야 하는 부담을 강대국에 안겨준다. 또한 마약·무기·인신매매 같은 초국가적 범죄도 실패국가에서 특히 심각하며, 이는 국제 질서 전반에 불안정을 확대시킨다.
더 나아가, 주권 실패는 인도적 위기로 이어져 선진 민주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개입하든 안 하든 손해인’ 딜레마를 안겨준다. 르완다 집단학살이나 시에라리온 내전 같은 사례는 국제사회에 도덕적 압력을 가하며, 유권자 일부는 해외 인도적 개입을 중요한 정치 의제로 인식한다. 그러나 개입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고, 개입하면 군인들의 희생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구호 성과는 확실히 증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맥락에서 캐나다가 주도한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 논의나 사만사 파워의 저서 A Problem from Hell 등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국제사회가 더 이상 주권 실패를 방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크라스너는 주권이 곧 책임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에, 해당 개념도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함)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은 외부 국가가 대규모 인권 침해를 이유로 개입할 수 있는 권리에 초점을 맞춘 개념인 반면,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R2P)은 주권을 국민 보호의 의무로 재정의하여,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국제사회가 개입할 책임을 가진다는 원칙이다. 즉, 전자는 강대국의 자의적 개입 위험이 크다는 한계가 있고, 후자는 UN 합의를 통해 제도화된 규범으로서 국제적 합의와 정당성을 더 중시함
기존 제도적 수단
- 거버넌스 지원(Governance Assistance)
국제기구와 원조국은 지난 수십 년간 개발도상국의 행정·제도 역량 강화를 위해 재정투명성 제고, 사법제도 개혁, 선거 모니터링, 정당 훈련 등을 지원해왔다. IMF·세계은행은 대출 조건을 통해 세제, 보조금, 공공부문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형식상 주권을 존중하는 방식이지만, 힘의 비대칭 때문에 사실상 내정에 간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자국민 착취를 더 유리하게 여길 때 외부 압력은 쉽게 무력화되며, 개혁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 과도 행정(Transitional Administration)
UN이나 연합군이 직접 행정권을 행사하며 국가를 일정 기간 관리하는 방식으로, 동티모르, 보스니아, 코소보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임시적 조치로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는 현지 정치 지도자들의 이해관계, 국제기구 간의 협력 부족, 자원 한계로 인해 성과가 제한적이었다. 비교적 평화 합의가 이루어진 국가(예: 나미비아, 중앙아메리카)에서는 효과가 있었지만, 보스니아·코소보·이라크 같은 분쟁이 심한 지역에서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제도적 대안
- 사실상 신탁통치(De Facto Trusteeship)
심각한 국가실패 상황에서는 외부 행위자가 안보·행정을 장기간 직접 관리하는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과거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나 UN 신탁통치와 비슷하지만, 오늘날에는 공식 제도화된 조약이 없는 비공식적·사실상 체제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약소국에게는 신식민주의처럼 보일 위험이 있어 제도적 합의가 쉽지 않다.
- 공유 주권(Shared Sovereignty)
외부와 내부 행위자가 특정 제도(예: 사법, 재정, 치안)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형태. 이는 국제법적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일부 국내 주권을 외부와 나누는 방식으로, 실패국가의 통치 역량을 회복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제시된다.
- e.g. 유럽의 재정주권성 포기, 합작투자방식. 캄보디아 내전 종식 당시 UN평화유지군, 국제기구의 일부 시스템
공유 주권은 외부 행위자가 일정 기간 국가의 국내 권력 구조에 직접 개입하되, 해당 국가의 국제법적 주권(legal sovereignty)에 의해 정당화되는 제도적 장치다. 즉, 형식적으로는 자발적 합의(조약, 일방적 선언 등)를 통해 성립되지만, 실제로는 자율성(autonomy) 이라는 전통적 주권 원칙을 침해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주권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행위자가 특정 정책 영역(재정, 사법, 치안 등)을 공동 관리한다. Krasner는 이를 “파트너십(partnership)”이라 부르며, 이는 국제체제에서 경쟁 규범(예: 인권 보호 vs. 내정불간섭)과 강대국의 권력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조직적 위선(organized hypocrisy)”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공채관리기구(Ottoman Public Debt Council), 냉전기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통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안보 제한(Bonn 협정), 그리고 차드-카메룬 송유관 사업(World Bank 개입) 등이 공유 주권의 사례로 꼽힌다. 이들 사례에서 외부 행위자는 채무 상환, 안보 제약, 자원 관리 등 특정 분야를 직접 공동 관리하거나 감독했다. 공유 주권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려면 자국 엘리트가 위반 시 더 큰 손해를 본다고 믿는 자기 집행적 균형(self-enforcing equilibrium)이 형성되어야 한다.
Krasner는 국가가 공유 주권(shared sovereignty)을 수용하게 되는 네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첫째, 석유 같은 자원의 탐욕(avarice)으로 인해 국제사회와 기업의 개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예: 차드–카메룬 송유관). 둘째, 전쟁 이후 전후 점령(postconflict occupation) 상황에서 외부 세력이 행정과 안보를 장악하며 공동 관리 체제가 불가피한 경우(보스니아, 코소보 등). 셋째, 자원도 없고 국가가 몰락해 국제 원조 의존(desperation)이 불가피할 때, 교육·보건 등 분야에서 국제기구와 공동 관리가 이루어지는 경우. 넷째, 선거(elections) 국면에서 개혁 후보가 외부와의 공유 주권 계약을 공약으로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경우다. 요컨대 공유 주권은 강제라기보다, 특정 상황에서 국내 정치 엘리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얻는” 구조 속에서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제도적 타협으로 이해된다.
- 공유 주권은 인권 보호·거버넌스 개선을 명분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적 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다. 예컨대, 특정 분야(재정·자원·사법)를 외부와 공동 관리하는 상황에서, 국민이 선거를 통해 다른 정책을 원해도 실현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시민의 자기결정권”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인권 보호를 위해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 Krasner의 논의는 미국·세계은행·IMF 같은 서구 주도 질서를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일대일로(BRI), 중동 자본(PIF), 브릭스 은행 등 다극적 거버넌스가 부상하는 시대에, 공유 주권은 강대국의 “경쟁적 제도 수출”로 변질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 국가가 서방과 ‘공유 주권 계약’을 맺고, 동시에 중국과도 맺는다면, 이중 의존이 만들어내는 충돌·균열은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