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eun Sim

투키디데스의 현실주의: 정의 vs. 자기 이익

Pangle, Thomas & Peter Ahrensdorf, Justice Among Nations: On the Moral Basis of Power and Pea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9), pp. 13-32 (Chapter 1)
Sep 24, 2025
투키디데스의 현실주의: 정의 vs. 자기 이익

투키디데스는 정치적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상적 규범이나 당위가 아닌 실제 정치 공동체의 행태를 중심에 두었기에 현실주의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국제정치의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평화로운 조건 속 이상적 도시의 목표를 강조한 반면, 그는 정치적·인간적 지혜를 얻기 위해 실제 공동체의 삶과 죽음, 특히 그들 사이와 내부의 치열한 갈등을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언제든 법과 정의의 가장 신성한 제약조차 무너뜨릴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직시하게 한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들이 정의는 국제정치에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적 논지와, 스파르타가 정의와 신의 가호를 믿으며 전쟁을 정의롭게 정당화한 도덕주의적 논지를 모두 제시한다. 아테네는 두려움·명예·이익이라는 불가항력적 충동이 제국 획득을 강제했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기적 행위도 비난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스파르타와 멜로스인들은 정의가 실제로 힘을 갖는다고 맞섰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정의가 국제정치에서 과연 설 자리가 있는지를 시험하는 탐구이며, “현실주의자” 투키디데스 또한 “이상주의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못지않게 정의 문제를 깊이 성찰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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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국가의 행위를 정의롭거나 부정의하다고 평가하려면, 그 국가들이 정의와 부정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다른 나라를 이유 없이 공격·예속시키는 행위조차 “강제된(compulsory)” 것이므로 정당하게 비난할 수 없다.

멜로스인들은 정의를 집행하는 신들이 존재해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아테네 현실주의에 도전했지만, 아테네인들은 모든 인간이 본성상 이익을 정의보다 우선시하므로 멜로스 역시 힘이 있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 반박했다. 이로써 갈등은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 아니라 두 세력의 자기이익 추구일 뿐이므로 신들도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아테네가 내세운 “정의는 국제정치에서 아무 힘도 없다”는 현실주의적 주장은 논리적으로 완결된 듯 보이지만, 투키디데스는 책에서 스파르타의 모습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 즉, 그는 직접적으로 “아테네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스파르타가 정의를 내세워 결국 승리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아테네식 현실주의만으로는 국제정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처음에는 스파르타를 아테네 현실주의의 반례처럼 제시한다. 스파르타는 절제된 강대국으로서 아테네의 폭정에 맞서 그리스 해방을 내세웠고, 브라시다스의 원정은 정의의 승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스파르타 역시 두려움과 이익을 따라 움직였고, 플라타이아 학살이나 니키아스 평화조약처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저버렸다. 스파르타가 해외 제국을 세우지 않은 것도 내부의 헬로타이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스파르타의 사례는 아테네의 현실주의적 주장을 반박하기보다 오히려 뒷받침했으며, 위선적 정의 담론보다 차라리 아테네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인정이 더 솔직해 보일 수 있다.

멜로스인들은 불의한 지배를 거부하고 싸움을 택하며 정의를 중시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신들이 정의를 보상할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궁극적인 이익을 추구했다.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기에게 좋은 것을 좇는다는 아테네 논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스파르타와 멜로스의 도전이 실패로 드러난 끝에, 투키디데스는 결국 국제정치에서 정의가 설 자리가 없다는 아테네의 현실주의 논지를 사실상 인정하는 듯하다.

투키디데스는 멜로스 학살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현실주의 논리가 반드시 비인도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스파르타가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대의를 절대화하고, 이에 반대하는 도시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한 것과 달리, 아테네는 “모든 인간은 본성상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때때로 더 절제된 선택을 한다. 대표적 사례가 미틸레네 사건인데, 반란 직후 분노에 휩싸인 아테네인들은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을 몰살하기로 했으나, 디오도토스가 정의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아니라 냉정한 이익 계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는 미틸레네인들이 자유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도 본성에 따른 자기이익 추구일 뿐 비난할 수 없는 행위라 설명했고, 결국 아테네인들은 지도자들만 처벌하고 대다수 시민은 살려두는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아테네의 현실주의는 정의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기이익을 강조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감정적 복수심을 제어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인도적인 처우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투키디데스는 동시에 아테네 현실주의가 실천 불가능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자기이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국가는 적을 비난하지도, 자신을 정의롭다 칭하지도 않아야 하지만, 실제 아테네인들은 멜로스·스키온을 학살하며 분노에 휩싸였고, 제국 지배를 정당화하며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들은 신의 가호를 부정하면서도 종교적 열망을 억누르지 못했고, 이는 알키비아데스의 축출과 니키아스의 기용 같은 결정으로 이어져 결국 몰락을 자초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비판은 이렇다. 아테네의 현실주의 논리는 논리적으로 강력해 보이지만, 실제 정치공동체가 끝까지 유지할 수 없는 자기모순적 태도이며, 종국에는 인간이 정의와 신성에 기대려는 심리적·정치적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특히 아테네는 멜로스·스키온 학살 뒤 죄책감과 신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고, 헤르메스 신상 훼손을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며 알키비아데스를 추방하고 니키아스 같은 독실한 장수에게 시칠리아 원정을 맡기는 등 종교적 열망과 공포를 억누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월식이라는 징조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철수를 지연하다 전멸을 자초한 사건은, 아테네의 냉혹한 현실주의가 끝내 도덕적·종교적 심리를 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몰락을 불러왔음을 드러내며, 현실주의가 정치 공동체의 지속적 기반이 될 수 없다는 투키디데스의 비판을 상징한다.

저자에 따르면 투키디데스는 제국과 권력보다 더 높은 선, 곧 이해와 진리 추구의 삶이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길이라고 제시한다. 정의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합리적이며 필수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을 서술하면서 국가 간 정의의 취약성을 보여주되 도덕적 명분이 가진 설득력과 심리적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그는 transcivic(도시를 초월한) 관점을 통해 아테네 현실주의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며, 인간과 자연의 무정한 힘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인간의 고통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기록한다. 또 transpolitical(정치를 초월한) 시각에서, 헤르모크라테스의 지혜와 디오도토스의 온화함처럼 정치적 삶 속에서도 드물게 드러나는 고결한 덕목을 긍정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권력과 영광이 아닌 진리 탐구와 이해의 삶이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길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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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투키디데스를 플라톤·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적 전통에 기대어 해석하고 있다. 투키디데스는 역사가로서 인간 본성과 정치적 공동체의 몰락을 기록했지, 정의나 진리 탐구라는 초월적 이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는 그가 아테네 현실주의의 한계를 폭로하고 결국 “정의 추구는 합리적”이라 말한다고 해석함으로써, 투키디데스의 본래 현실주의적·비극적 시각을 희석시킨다. 이 글은 정의의 무력함을 간과한 과도한 이상주의적 독해가 아닐지…